199화. 통합 마탑(1)
검은 마물의 숲 한복판.
더 정확히는, 마그릭 협곡을 우회하여 테라로 향하는 제국군 진영.
“블레어 탑주님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그 한마디에, 주변은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여 있는 이들은 총 네 사람이었다.
제국의 2황자 스노비 벨 그레이스.
소환의 마탑주 레이나 더글린.
조합의 마탑주 간다르 테이들러.
그리고, 염화의 부탑주 프레이 던 마그마르까지.
그 외 두 마탑주는, 타국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미 전장으로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일찍이 테라를 함락하기 위해, 스란과의 국경으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프레이였다.
그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몸까지 덜덜 떨어댔다.
“누구는 믿고 싶은지 아나? 사실이 그런 걸 어쩌라고…….”
“레이나 마탑주님. 하면 정말로 이 헛소리를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 이 아저씨야. 탑에 억류되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풀려났다잖아. 만약 염화 할아범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그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분명 무언가 착오가 있는 걸 겁니다. 다른 목적이 있어 스승님께서 일부러 풀어주셨을지도 모르지요.”
“헹. 퍽이나 그러시겠다. 그런 중대한 사안에, 이리 우리한테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는데?”
그때, 가만히 실랑이를 지켜보던 간다르 테이들러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그만. 지금은 이럴 일이 아니라, 당장 에르사와 제우스부터 불러들여야 하네.”
“그러고 보니, 여태 그 인간들은 뭐 하고 있는 거람? 고작 약소국의 국경 하나 어찌하지 못하고…….”
“8월의 검사와 대륙 제일의 천재 마법사가 그곳에 있다지 않나. 아예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지.”
“흐응~ 그 대륙 제일이라는 칭호도 이제는 반납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번 우리 마탑의 치욕스러운 대참사는, 또 ‘그놈’이 주범이라며?”
“…….”
이어지는 레이나의 말에, 간다르가 표정을 굳혔다.
그놈이 누구인지는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으니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몇 남지 않은 이까지 갈리는 애송이.
“세타 쿤 이그니스… 역시 그 아이입니까?”
“……!”
탑주들이 감히 이름조차 입에 담기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스노비가 운을 뗐다.
그는 일견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참으로 귀신같은 아이입니다. 바로 며칠 전에는 마그릭 협곡에서 우리의 진군을 방해하더니, 이번에는 마탑이라…….”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마그릭 협곡에서 마탑이 있는 대평야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도 말을 타고 꼬박 몇 주야는 달려야 했으니까.
전쟁통에 워프는 모두 막혔고.
매개체가 없는 텔레포트는 마나 소모가 막대했다.
어지간한 대마법사라도 이동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그 아이는 무리 없이 임무를 해냈다.
물론, 스노비는 그럴 수 있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색욕의 이능… 너무 골치 아픈 능력을 우리가 내어준 게지.”
나직이 한숨을 내쉰 스노비가 이내 눈을 빛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그러니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가진바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이제부터 저는 세타 쿤 이그니스, 그 아이 하나에게 제 모든 힘을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자 전하. 그 말씀은…?”
“어차피 정복 전쟁은 폐하와 형님께서 잘 해내주고 계십니다. 더욱이, 우리 제국이 자랑하는 십이월도 건재하고요.”
“분명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군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놈을 어찌하실 생각이신지요?”
“군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적이 일개 개인인 이상, 머릿수가 아무리 많은들 딱히 의미가 없겠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능력을 갖춘 소수정예입니다.”
“…뜻이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빙결과 뇌전의 마탑주도 불러들이겠습니다.”
간다르의 제안에, 의외로 스노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분들은 예정대로 테라를 공략해 줘야 합니다. 제 집 앞마당이 혼란스러워야 틈이라도 보일 테니까요.”
“송구합니다만, 고작 저희만으로는…….”
“대륙에는 십이월과 십이지왕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
그제야 간다르는 스노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설마…?”
“예. 제 권한으로 남은 ‘칠악’을 ‘전원’ 소집하도록 하겠습니다.”
“……!”
끝내 간다르는 기함하고 말았다.
제국과 칠악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감춰져야 할 비밀이었으니까.
물론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단순한 의심과 눈으로 본 확신은 명백히 달랐다.
전쟁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民心).
어쩌면 그 민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일임에도 스노비는 조금도 게의치 않았다.
이유는 오직 하나.
“이번에야말로 그 아이. 세타 쿤 이그니스를 죽이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
떠날 채비는 금세 갖춰졌다.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떠나는 것이 한편으로는 불만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
그러니 휴식은 사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근데 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 따위, 내가 걱정할 이유가 있나?’
자연스레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의문은 애써 무시했다.
만약 이런 생각을 스스로 납득하게 되면, 더는 ‘인간’이 아니게 될 것 같아서.
벌컥!
“준비 다 됐냐?”
“……!”
그때, 스승님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곁에는 페르도 함께였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내가 자못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스승님이라지만 노크도 없이 너무한 것 아니에요?”
“뭐야, 딸딸이라도 치고 있었냐?”
“뭐, 뭔 딸이…?”
“뭘 모르는 척이야. 자위행위 말이야. 하긴, 너도 그럴만한 나이가 되긴 했지.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요만한 꼬맹이였는데…….”
그러면서 손날을 만들어 제 가슴팍 앞에 가져다 놓는 스승님이셨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내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자,
“부모, 자식 간에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주는 게 예의다.”
의외로 페르가 대신 나서줬다.
“뭐야, 너. 갑자기 웬 편들어주기? 같은 남자라 이거냐?”
“네가 그런 쪽으로 너무 자각이 없는 거겠지, 이 주책바가지 아줌마야.”
“뭐, 아줌마? 나 아직 결혼 안 했거든?”
“그럼 뭐, 노처녀라고 해주랴?”
“이 얼굴만 어린 쭈글탱이가?”
“주름은 네가 더 많다.”
…금세 티격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과연 ‘친구는 친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설하고,
“아 됐고, 바로 출발하죠.”
웨에에에에엥!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곧장 색욕의 이능을 펼쳤다.
곧 눈앞으로 새까만 아가리가 생성되었다.
물론 좌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누군가는 당연히 제국군의 이동 경로 중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리되면, 셋으로 군 전체를 상대해야 하니까. 이번에는 저들이 직접 오게 만든다.’
아쉬운 놈이 먼저 우물을 파는 법.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방문객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보다 철저한 덫을 준비하여 적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참고로, 저희는 이대로 마탑으로 돌아갈 겁니다.”
“……!”
내 말이 퍽이나 의외였는지, 그제야 실랑이를 멈춘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탑? 내가 아는 그 마탑?”
“세상에 마탑이 어디 또 있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이미 먹을 것도 없는 그곳에는 왜 가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치울 거라고.”
“그러니까, 이미 텅 빈 식탁에 왜 또 가냐고?”
“비긴 왜 비어요? 아직 입도 못 댄 진수성찬이 한 가득인데.”
“……?”
스승님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착한 제자였기에, 조금 더 상세히 설명을 이어갔다.
“주인은 자리를 비웠지만, 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잖아요.”
“근데?”
“자고로 인간은 세상 그 어떤 생명체보다 욕심이 많은 종족이죠. 제 욕망을 위해 같은 종족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으니까.”
“서두가 길다. 핵심만 간단히 말해.”
“그 안에 보관된 탑주들의 각종 연구 자료들. 그리고 무수한 아티팩트들은 물론이고, 지식의 보고라고까지 불리는 탑 내 수백 년 묵은 서적들까지. 제가 그 모든 걸 취하려 하면, 과연 집 나간 주인들이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까요?”
“……!”
그제야 스승님과 페르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 그것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하긴… 충분히 신빙성 있는 얘기야. 더욱이 간다르 테이들러는 제 연구 자료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니…….”
내 입가로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동의하시는 거죠?”
“두말하면 입 아프지. 아주 재미있겠구먼.”
냉큼 대답한 세논 스승님이 망설임 없이 이능 안으로 몸을 집어 던졌다.
꿀-꺽!
검은 아가리는 순식간에 스승님을 집어삼켰다.
“나 참, 뭐 저리 급하시다고…….”
직후, 당장에 내 얼굴 위로 황당함이 떠올랐다.
“…충분히 급할 수 있지. 너는 네 스승의 가슴에 불씨를 지핀 게야.”
“네?”
“마탑. 특히 염화의 마탑에서 보관하고 있는 자료 중에는, 분명 ‘아락서스’와 관련된 것들도 있을 테니까.”
“……!”
그것까지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다.
과연.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시면서도 속으로는 줄곧 생각하고 계셨던 건가.
‘…아니면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지도…….’
“나도 곧장 뒤따라 가보마. 외부인인 세논이 비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당연하게도 제지당할 테니까.”
곧, 이미 몇 번이나 경험이 있는 페르도 이능으로 접근했다.
꿀꺽!
역시나 아가리는 금세 페르의 작은 몸까지 집어삼켰다.
“…이번 기회에 아락서스에 대해 확실하게 여쭤봐야겠어.”
다시금 홀로 생각을 굳혔다.
빛의 일족, 아락서스.
지금까지는 민감한 주제라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내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는, 제국이 아닌 ‘칠악’이었다.
하니, 그들과 상극에 있는 아락서스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보다 손쉽게 적을 해치울 수 있을지 몰랐다.
하여, 지체 없이 스승님을 뒤따르려던 그 순간.
“세타.”
“……?”
“이번에는 나도 가겠어.”
“…….”
어느새 등장한 루나가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굳이 루나까지 갈 필요는 없는데?”
“아니. 꼭 가고 싶다.”
“왜?”
“…있고 싶으니까.”
“뭐라고? 잘 안 들려.”
예의 무뚝뚝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루나가 이내 목소리를 높인다.
“네 옆에 있고 싶으니까. 이건 내 진심이다.”
다만, 그 내용은 나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엉?”
***
이번만큼은 루나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솔직히, 크게 보면 그녀는 빠지는 편이 나았다.
괜한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니까.
남은 마탑주들을 제거하는 데 검사의 힘을 빌리면, 추후 마탑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분명 걸림돌이 될 것이기에.
그러니 전투 시에는 오직 마법사 전력으로 적을 상대해야 했다.
아무튼, 루나까지 일행으로 합류하여 총 네 사람 분의 마나가 뭉텅 빠져나갔고.
“…….”
잠시 후, 나는 눈을 떴다.
“……?”
허나 곧, 내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자리를 비운 것은 불과 하루.
탑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한데, 주변의 분위기가 사뭇 묘했다.
“…너무 조용하지 않나?”
지금쯤이면 마탑 전체가 시끌시끌해야 정상이었다.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빠져나갔다곤 해도 마법사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으니까.
더욱이, 나는 스실라 씨와 로마르니 씨에게 내부 안정화라는 막중한 임무까지 부여하고 왔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혈향(血香)이었다.
“…마탑은 다 정리하고 돌아왔다고 하지 않았냐?”
“확실해요.”
“근데 이 개똥같은 상황은 뭐지?”
세논 스승님이 팍!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직후, 이번에도 페르가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끼이이이익!
굳게 닫힌 출입문은 금세 활짝 열어 젖혀졌다.
애당초 마탑 소속 마법사들의 마나에만 반응하도록 설계된 문이니까.
한데…
“……!”
곧 드러나는 내부의 광경은 스승님과 페르뿐만 아니라, 나조차 대경할 만한 종류의 것이었다.
“이, 이게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