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95화 (195/251)

195화. 영웅의 길(3)

귀국(歸國) 한 시간 전.

나는 마탑을 떠나기 직전, 각국의 고위급 인사들과 마지막 조율을 하고 있었다.

“리, 리비아 남부에 내 소유의 개인 성이 하나 있네. 만약 이 철창을 제거해 준다면, 그곳의 소유권을 통째로 넘기지. 영지가 아닌 건물만 양도하는 것이니, 타국인인 자네라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네!”

“잘 알겠습니다. 성함이…?”

“콘슈레드 백작이네.”

“접수했고요.”

서걱!

순간, 내 가벼운 손짓에 두꺼운 철창이 통째 잘려 나갔다.

달리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평범한 쇠 철창이었다.

물론 마력 구속구에 신체가 구금된 내부의 사람들은 이런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테지만.

“고맙네! 정말 고마우이! 어서 이 빌어먹을 구속구도 풀어주게!”

눈앞에서 희망을 목도했기 때문일까?

대번에 주변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했나? 듣기로 자네는 평민이라지? 우리나라로 귀화한다면, 내 직접 귀족 추천서를 써주겠네. 참고로 나는 게르힘의 덴마 후작이야.”

“나는 인력으로 은혜를 갚겠네! 혹 자네가 원한다면, 우리 가문은 언제 어느 때든 단 한 번, 자네를 위해 모든 가문력을 동원할 것이야!”

“나는 귀국 즉시 100만 골드를 그 자리에서 지급하겠네!”

갖가지 제안들이 물밀 듯 들이닥쳤다.

다만, 이들의 기억은 마법 대전 당시로 머물러 있었기에 현재의 내게는 딱히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그럼에도 걔 중에는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제안도 있었다.

“저는 이미 테라의 국왕 폐하께 작위를 하사받았으니, 타국의 귀족은 될 수 없습니다. 돈도 이 이상 필요하지는 않고요. 아시다시피, 전쟁통에 화폐의 가치는 한낱 종잇장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모, 모두 금! 순금으로 지급하겠네. 그거라면…….”

“아니요. 그보다 저는 인력… 어쩌고 했던 말씀에 더 관심이 가는데요.”

“……!”

이어지는 내 말에,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고, 고맙네.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네. 나는 노르망의 리베라 백작이야.”

“리베라 백작님뿐만 아니라, 은혜를 은혜로 갚겠다는 분들이 계신다면. 그분들 또한 모두 풀어드리겠습니다.”

“……!”

직후, 귀족들이 잠시간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속내가 훤히 보였다.

이 상황에서도 계산질이라니.

이러니 내가 높으신 분들을 좋게 볼 수가 있나?

“나도! 나도 그리하지!”

“자이툰의 제이든 자작가도 절대로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네!”

“돌아가더라도 이 구명의 은혜는 꼭 갚겠어!”

잠시 후, 이곳에 갇힌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쳤다.

조금만 계산해 봐도 훨씬 나은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지금 당장 돈이 나가는 일도 아니고, 고작 말뿐인 약속이 아니던가?

‘나중에 내가 어떤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르면서.’

허나, 그런 속내는 철저하게 감춘 나는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하면 모두 풀어드리지요.”

“오오오오!”

“단.”

순간, 나는 척하니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혹시나 그럴 리야 없겠지만, 풀어드리고 나서 입 싹 닦으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겠습니까? 위기 상황에서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말뿐인 약속을 뱉어내곤 하니까요.”

“우, 우리를 뭘로 보고! 그런 얌체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야!”

“저도 그리 믿고 싶지만 세상이 워낙 흉흉해서… 정 뜻이 그러시다면, 약속의 증거로 모두 ‘가문의 패’를 내어주시기 바랍니다.”

“……!”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는지, 거짓말처럼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증거까지 있는 마당에 모르는 척하고만 있을 수는 없을 터.

더욱이 이들은 목숨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이니까.

“당연히 이 정도는 해주실 수 있으시겠죠?”

주변을 둘러보는 내 미소가 점차 짙어졌다.

***

1층의 암흑 필드 내에 갇혀 있던 마법사들은 빠르게 포박되어 갔다.

머릿수는 이쪽이 명백히 열세임에도, 그들은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품지 못했다.

이미 내 신위를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하여,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나는 곧장 탑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휘오오오오오오!

“…….”

드넓은 대평야 위에 우뚝 솟은 마탑.

그곳을 등 뒤로 두고 나는 불어오는 바람을 가만히 마주했다.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무려 대륙의 공식 서열 1위에 빛나는 블레어 던 마그마르를 내 손으로 꺾는 날이 올 줄이야.

“와, 진짜 어쩜 그렇게 거짓말도 잘 치냐?”

“…….”

그 상념은 한 불청객의 등장으로 금세 깨어졌다.

어느새 뒤따라 나온 유리나가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으니까.

‘우와, 우와’ 하는 추임새는 덤이었다.

…왜인지, 그 얼굴이 상당히 기뻐 보였다.

정확히는 홀가분해 보인다고 표현해야 하나?

마치…

“…한 일주일째 변비를 앓다가 쾌변이라도 한 사람처럼.”

“뭐야!? 지금 내 표정이 그렇다는 거여, 뭐여?”

“이미 스스로 잘 알고 있네.”

“이놈이?”

곧장 달려들려던 유리나가 멈칫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헤실헤실 미소 지었다.

…이쯤 되자, 솔직히 조금 무서워졌다.

“너 진짜 왜 그러냐?”

“모가.”

“딱 봐도 얼굴에 기분 좋다고 써 붙이고 있잖냐? 이 심각한 전쟁통에.”

“그야 뭐…….”

찰나, 말끝을 흐리던 유리나가 내 두 눈을 빤히 마주 바라봤다.

“무수히도 꼬이고 꼬인 실타래를, 이제야 하나 풀었으니까?”

“…….”

갑작스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랬었지.

나와 동갑이지만, 유리나 역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다.

조부는 절친한 친우에게 뒤통수를 맞아 객사하셨고.

그로 인해 왕국에서 제일 잘나가던 집안이 망했으며.

최근의 내전으로 가주인 부친마저 명을 달리했으니까.

문자 그대로 가문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

그런 생각이 들자, 짐짓 유리나가 대견스러워졌다.

누가 봐도 이 녀석은 잘해주고 있었으니까.

이에, 나도 모르게…

“…무, 무얏!?”

순간 유리나가 화들짝 놀랐다.

제 머리 위로 내 손이 얹혔기 때문이다.

나도 상당히 어색했지만 이 말만큼은 꼭 해주고 싶었다.

“고생했다.”

“……!”

직후, 안 그래도 커다란 유리나의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잠시 후, 그 눈망울에 희미한 물기마저 어렸다.

…이럴 의도까지는 없었는데?

“참 좋~을 때다.”

“음…….”

등 뒤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나는 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물론 유리나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곧 내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페르.”

“님이라고 부르라니까?”

“…님. 앞으로의 전황은 어떻게 보십니까?”

“부끄럽냐? 답지 않게 말 돌리긴…….”

“진지하게 여쭙는 거거든요?”

“어련하시려고.”

피식 웃음을 터뜨린 페르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자못 진지해진 얼굴로,

“전황이야 네가 잘 꿰뚫어 보고 있으니 나야 별생각도 없고. 다만, 각국의 인사들을 그리 대한 건 좀 아쉬웠다. 차라리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줬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자발적으로 더 큰 도움을 줬을 텐데 말이지.”

“정말로 그리 생각하십니까?”

“…….”

나는 단 한마디로, 페르의 말을 일축했다.

“아마 아닐걸요? 저는 제국의 정복 전쟁 ‘이후’까지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무슨 뜻이야?”

“이왕 시작된 전쟁, 제국이라는 강력한 적이 사라진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하려 할지,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지 않겠습니까?”

“너는 진짜…….”

그제야 자못 감탄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페르가 이내 내 어깨를 토닥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네게 자문을 구해야겠구먼. 그런 의미에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안쪽은 대충 다 정리됐다만.”

이어지는 그의 물음에 나는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돌아가야지요. 테라로.”

***

그렇게 우리가 테라로 돌아왔을 때, 성 주변으로 무수히도 많은 인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보이는 숫자만 최소 수천.

아니, 수만도 더 될 듯싶다.

선두에는 갖가지 다른 깃발들까지 앞세운 채로.

“연합군이 벌써 도착했나 본데요?”

한데, 나를 보는 즉시 군영 곳곳에서 움찔 몸을 떠는 사람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내 입가로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기야, 실력 행사라면 리비아를 떠나기 전에 이미 충분히 해뒀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원군이 오는 거야 이미 들었지만, 각국의 핵심 전력들은 끝까지 아낄 거라며?”

그때, 빠르게 내 곁으로 다가선 실비아가 속삭였다.

“그런데?”

“자세히 봐봐. 나도 들어본 강자들이 상당히 많이 포진되어 있으니까.”

“……!”

직후, 내 동공 위로 의외라는 빛이 떠올랐다.

듣고 보니 그랬으니까.

설마하니, 각 왕국의 내로라하는 마스터들과 최상위 마법사들까지 참전해 줄 줄이야.

바로 그 순간, 저 멀리 멈춰 선 군영에서 세 사내가 접근해 왔다.

“직접 설명해 주려나 본데?”

“…….”

나는 곧장 실비아의 옆구리를 찔렀다.

한데, 이 녀석은 오히려 표정만 더 심각해지는 것이 아닌가?

“…왼쪽부터 차례로 샤네르 공작, 몽클레어 후작, 루이비트 공작이야. 각국을 대표하는 ‘마스터’들이지.”

“그래? 다시 말해, 전부 검사들이라는 뜻이지?”

“맞아. 아무리 전쟁에서는 마법사가 귀하신 분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작금의 대륙은 검사가 득세하는 시대니까.”

“뭐, 실제로 보니 알겠더라. 제국의 마스터들은 분명 다른 차원의 사람들이었지.”

짤막하게 대꾸한 내가 이내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어느새 세 사내가 지근거리까지 접근해 있었으니까.

…다만, 가장 먼저 다가선 예의 몽클레어 후작의 첫 마디가 가관이었다.

“우리는 연합군을 이끌고 있는 사령관들이라네.”

“……?”

방금 ‘들’이라고?

그럼 뭐, 지휘권이 세 군데로 분산되어 있다는 거야, 뭐야.

“사, 사령관? 세 분 다요?”

“그렇다네.”

당황한 실비아의 물음에, 몽클레어 후작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치 싸움을 이런 식으로 표출하는 모양인데, 이거야말로 최악이었다.

지휘 계통의 일원화는 전략의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나참, 어이가 없어서.”

내 잇새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당연하게도 일단 연합군이 테라로 합류한 이상, 이따위 꼬락서니를 보고 있을 생각은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됐고, 그냥 이대로 셋 다 한 번에 덤비세요.”

“……?”

순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세 사내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떠올렸다.

그만큼 파격적인 발언이었으니까.

“저는 뻔히 야기될 혼란을 방치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

“각자 소속된 국가가 다른 이상, 제 나라에서 어떤 작위를 가졌는지, 어떤 중책을 맡아왔는지는 딱히 의미가 없겠죠? 오직 강자존. 전쟁에서는 힘을 가진 자가 곧 법이니까요.”

“그 말은…?”

“네. 진 사람이 이긴 쪽의 명을 따르는 것으로 하죠. 그러니까, 편먹기로 하셨으면 셋 다 한꺼번에 덤비세요. 모두 상대해 드릴 테니까.”

“……!”

그제야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세 사내의 표정이 급변했다.

“…큭. 크크크크.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로까지 해줄 줄이야…….”

“저야말로 뻔한 반응은 이 이상 보고 싶지 않거든요? 싫으면 얌전히 제 명에 따르시던가요.”

“…아니, 네 제안 자체는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한번 붙어보지.”

“시원스러워서 좋네요.”

“물론, 이건 나머지 두 분에게도 해당되오. 설령 패배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비겁자가 되기는 싫거든.”

최초 몽클레어 후작이 일행들과 거리를 벌렸다.

자연스레 나머지 두 사내도 황급히 양쪽으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나를 포함한 네 사내의 기묘한 대치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

어느새 의지를 불태우는 다른 셋을 발견한 내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어느 정도 나에 대한 소문은 퍼져 있는 듯하니,

“…내친걸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실력 발휘나 해볼까?”

우우우웅!

직후, 내 써클이 격렬하게 떨어 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