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영웅의 길(2)
‘내가 다 먹는다…?’
잠시간 생각해 봤다.
우선,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확고한 목표를 세워뒀다.
다시는 내 사람들을 잃지 않겠다는, 예의 그 맹세와도 같은 목표 말이다.
하여, 비록 가작위지만 귀족이 되었다.
앞으로 그럴듯한 영지도 얻을 것이며, 오직 내 사람들을 위한 성(城)도 증축할 계획이다.
자금력은 충분했으니까.
이제 내 개인 아공간에는 그간 모아둔 무수한 재물들이 쌓여 있었다.
문제는…
‘그것들만으로 충분할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람.
즉, 세력이다.
대륙 전체로 보면 기껏해야 나는 약소국의 수많은 귀족들 중 하나일 뿐이니까.
최강대국인 제국을 제외해도, 테라는 국력(國力)에 있어 언제나 하위권으로 분류되어 왔다.
달리 마법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특정 분야의 수준은 높았지만, 지리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그야말로 사방이 강대국이었다.
당장 위로는 제국이 있었고.
서부로는 전통 강호인 자이툰.
동부로는 스란 공국과 게르힘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남부는 또 어떤가?
왕국 중 최다 마스터 보유국인 노르망, 부자국으로 유명한 리비아 왕국 등 무려 6개국을 인접하고 있었으니.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도 곳곳에서 견제를 받아온 테라다.
다시 말해,
‘황제의 야욕을 막은 이후에는, 다시 그 시절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지. 언젠가는 제국의 빈자리를 또 다른 강대국이 차지하게 될 테니까.’
역사는 그렇게 반복되어 왔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조금만 힘이 강해졌다 싶으면, 타국인들을 깔고 앉고 싶어 안달인 종족이 인간이었으니까.
‘그런 거라면…….’
이윽고 상념을 마친 나는 결단을 내렸다.
결론은, 역시 내가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야 했다.
작금의 황제처럼 누구도 감히 덤벼들 생각조차 품지 못하도록.
그것을 위한 어렵지만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고작 테라 출신의 귀족이 아닌.
나라를 초월한, 대륙 급의 위인이 되는 거다.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초국가적인 조직을 구성해 냄으로써.
“다들 집중하세요!”
직후, 나는 마나를 담아 고함쳤다.
우렁찬 목소리가 삽시간에 주변을 잠식했다.
“……!”
여태 떠들어대던 각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대번에 입을 다물었다.
다들 할 말은 많지만, 마지못해 참는 분위기였다.
하기야 내가 이대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그것보다 더 최악은 없을 테니까.
“저는 테라에서 온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여러분을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오오오오오!”
설마 했던 일이 사실이 되자, 몇몇 인사들이 참지 못하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세타 쿤 이그니스라… 분명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야.”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마법 대전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그 아이가 아닌가?”
“새삼, 다시 봐도 잘생겼군. 아주 내 사위라도 삼고 싶은 기분이야.”
입에 발린 목소리들이 연이어 귀청을 때렸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지, 다들 하나같이 필사적이었다.
마탑은 이들에게 특별한 위해는 가하지 않았으나, 장장 수 개월간의 징역살이 자체가 높으신 분들에게는 크나큰 고통일 것인즉.
다만, 그 와중에도 소위 ‘깨어 있는’ 사람들은 있었다.
“다들 고생 좀 했다고 머리까지 굳어버리신 거요? 어찌 그리들 금세 믿으시는 거요? 저 아이도 마탑과 관련되어 있을지 어느 누가 알겠소?”
“…….”
찰나,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영 머저리들만 모여 있는 건 아닌 모양인데?”
이제 어쩔 거냐는 양,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곧장 내 옆구리를 찔러왔다.
물론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도 해주지 않으면 내 쪽에서 실망했을 테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구태여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혹시 또 모르지. 일단 고생을 시켜놓고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뒤, 마지막 순간에 뒤통수라도 치려는 속셈일지도.”
그제야 내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멀지 않은 좌측 철창 너머에, 오십 전후의 배불뚝이가 있었다.
관상은 마법이라더니, 그 고집스러운 성격이 아주 얼굴에서부터 좔좔 느껴졌다.
“되게 구체적이시네요? 마치 그런 일을 직접 해보기라도 하신 분처럼.”
“뭐야? 지금 시비 거는 거냐?”
“설마요. 그냥,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생각은 머릿속으로 하라고 있는 것이지. 그리 입으로 나불거릴 일이 아니라.”
“그게 바로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뭐라고?”
“개인적인 생각은 머릿속으로만 하시라고요. 소설 그만 쓰시고.”
“……!”
단 몇 마디로 배불뚝이 아저씨의 입을 다물게 한 내가 이내 주변을 둘러봤다.
“여러분이 의심하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머나먼 지역까지 와 강제로 구금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태 이리 고생까지 하고 계시니까요. 다만 당부드리고 싶은 건,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
“제국이든 마탑이든, 저들의 입장에서는 여러분을 그저 묶어만 둬도 이득입니다. 아니면, 인질로서 전쟁에 활용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여러분을 풀어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
“모든 행위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들 하지요. 제가 마탑의 사람이라는 가정하에, 지금 여러분을 풀어 드림으로써 얻을 이익은 무엇이 있겠는지요?”
“…….”
누구도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건 없을 테니까.
설령 내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건다고 해도, 석방되는 즉시 입 싹 닦고 무시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분명 그렇군.”
“그렇지요?”
“하면, 자네의 진짜 목적은 뭔가?”
“네?”
“방금 그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는가? 모든 행위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
나는 핵심을 찔러오는 또 다른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까의 배불뚝이와 달리, 상당히 지적으로 보이는 30대의 젊은 사내였다.
“혹,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노르망 왕국의 클레오 백작이네.”
저 나이에 백작?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내심 상당히 놀랐다.
전 대륙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국가에 속하는 노르망은, 나이까지 따져서 작위를 내리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더군다나, 테라는 오랜 내전으로 가뜩이나 여력이 없을 텐데. 자네 같은 인재를 보내면서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말은 믿기가 힘드네.”
“우선 방금 말씀의 오류부터 바로 잡고 가자면, 저는 테라가 아니라 제 개인 의지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정말인가?”
“예. 만약 그 이유를 물으신다면…….”
순간, 말끝을 흐리는 내 입가가 완연한 호선을 그렸다.
“…지금부터 한번 만들어보죠.”
“그게 대관절 무슨 뜻인가?”
“솔직히, 어떤 식으로든 제국군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움직인 거지만, 그리 답하면 안 믿으실 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거야…….”
“생각해 보니 좀 억울해서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목숨까지 걸고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건데. 이런 의심이나 받고 있으니…….”
“…….”
이제 예의 클레오 백작이라는 사내는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하니, 오히려 역으로 여쭙겠습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을 풀어드리면, 여러분은 제게 무엇을 주실 것인지요?”
“…….”
“얼핏 들은 바로는, 한 10분 전까지만 해도 성이니 작위니 하는 말씀들을 하셨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뱉은 말이 있는지라, 누구도 입조차 뻥긋하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 미소는 도리어 한층 짙어졌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 말뿐인 약속들은 아니셨겠지요?”
이내 내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특히 배불뚝이 아저씨의 표정이 가장 볼만했으니까.
그러게 왜 조건 없이 베풀려는 선량한 사람을 건드려선.
***
그 시각, 실비아는 속속들이 테라 왕국령 내로 진입하는 원군을 맞이하고 있었다.
둥! 둥! 둥! 둥!
연합군의 웅장한 북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그럴수록 실비아는 내심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연합군이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
“마침 자이툰으로 향하는 길이었으니까요. 테라는 그 중간에 있고요.”
크리스의 말에 실비아가 눈을 반짝였다.
이건 기회였다.
카이클 공작마저 없는 지금, 이 나라의 실세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어느 때보다 하나로 똘똘 뭉쳐야 할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알게 모르게 두 세력으로 이분된 테라의 못난 모습을 보여줄 수야 없지 않겠는가?
무엇이든 첫인상이 중요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테라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당장 연합군 내부도 정치라는 이름의 이권 다툼이 한창이니까.
제국은 절대 만만하게 볼 존재가 아니었다.
아차 하는 순간, 그들의 손에 전 대륙이 철저하게 짓밟히리라.
하여, 실비아는 오랜만에 능력을 십분 발휘할 생각이었다.
고작 보여주기식 연합의 인사들만으로는, 이런 어린아이에게도 휘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보여줄 계획이니까.
한데…
“…어? 저건…….”
그런 실비아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윽고 군 선두의 면면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예상과 달리, 그곳에 있는 이들은 무려 각 왕국의 마스터들이었다.
더욱이 열두 마탑주를 제외한 30위권 이내의 마법사들도 군데군데 시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서로 눈치 보느라 전력을 아끼던 것 아니었어?”
사실 이 부분은 레베카의 공이 컸다.
돈 많은 골든 버드 상단에서 아예 금력으로 사람을 움직이기로 작정했으니까.
이리 눈치싸움만 해댈 바에야, 가장 먼저 리비아에서 아낌없이 군자금을 베풀겠노라고.
더욱이 레베카는 세타에게 진 빚도 있었으니, 보다 적극적으로 윗선을 설득했다.
상황이 이리되자 다른 나라들도 뒤늦게 고급 전력을 급파할 수밖에 없었고.
물론 실비아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으음… 좋기는 한데, 이러면 오히려 이쪽에서 곤란해지는데.”
무려 마스터와 최상위 마법사들이다.
그래도 비슷한 급은 맞춰줘야 하지 않겠는가?
최소 3대 공작가의 가주쯤은 되어야 한다는 건데…
실비아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꺼려지는 상황이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카이클 공작이야 북부로 떠났으니 그렇다 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인버스 공작은 레이브 성에 남아 있었으니까.
아무리 세드릭 가문의 가주 대리라지만, 핏덩이에 불과한 자신을 저 고매한 이들이 어찌 대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진짜 미치겠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저만한 위인들이 나 따위에게 끌려 다닐 리가 없잖아.”
직후, 실비아의 얼굴이 대번에 울상이 되었다.
그 순간,
“뭔 걱정이냐? 우리가 있는데.”
“……!”
곧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어느새 등 뒤에서 몇 개나 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그 모두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적을 감춘 언니보다도 더 반가운 이들.
빛의 마탑주 세논.
8월의 검사 에이스 디 파르마.
완전히 상처를 회복한 환상의 마탑주 에반젤린까지.
“다들…….”
“뭐야, 이 싹퉁 바가지 꼬맹이. 그런 얼굴도 할 줄 알았냐?”
실비아가 대번에 제 표정을 정리했다.
평소 으르렁대기 바쁜 에이스에게만큼은 감동한 티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데, 그것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웨에에에에엥!
“……!”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웬 익숙한 소음에, 실비아의 눈이 다시금 크게 뜨여졌다.
잠시 후 허공 위로 생성된 새까만 아가리 사이로,
“우리 왔다.”
이 이상 반가울 수 없는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뭐야. 나 지금, 딱 타이밍 좋게 등장한 건가?”
평소 얄밉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던 얼굴.
여전히 한 대 치고 싶은 능글능글한 미소.
“너, 세타…!”
허나, 지금 이 순간의 실비아만큼은 녀석의 얼굴이 그렇게 또 든든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