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영웅의 길(1)
예로부터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중에서도 딱 12명만이 존재하는 마탑주들은, 서로가 같은 길을 걷는 동반자이자 ‘경쟁자’였다.
하여, 대륙인들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검사들에게 십이월이 있듯,
마법사들에게는 십이지왕이 있다.
더불어 그 십이지왕은 하나같이 마탑주라는 타이틀까지 쥐고 있었으니.
하면, 그들 중 누가 가장 강한가?
첫 번째로 손꼽히는 이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가장 오랫동안 탑주의 자리를 지켜온 인물이자.
달리 마탑의 살아 있는 역사나 다름없는 존재.
염화의 마탑주, 블레어 던 마그마르.
허나, 두 번째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평이 분명하게 갈렸으니까.
누군가는 모든 주력을 사용하여 상성에 특별한 제약이 없는 초월의 마탑주가 염화의 뒤를 잇는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마법이 내포한 위력 면에서 이미 상성의 개념을 초월한 파괴의 마탑주가 진정한 2인자라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그가 지금 내 앞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신은 갈가리 찢겨, 살아 있으되 산 게 아닌 폐인이 된 채로.
“정말로… 파괴의 마탑주 님이십니까?”
내 목울대가 절로 꿀렁였다.
대답은 그가 아닌 옆에서 들려왔다.
“…얼굴을 보니 그가 맞는 것 같군.”
“하지만 느껴지는 마나가…….”
“써클을 파괴당한 게야. 네 말마따나, 마나라고는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내 곁에 선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씁쓸한 눈빛으로 철창 너머를 바라봤다.
분명 우리 둘의 목소리가 들릴 텐데도 인영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잭 디스페로우. 내 말 들리나?”
“…….”
“이런 말이 딱히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블레어 던 마그마르, 그 쓰레기는 이제 죽었네.”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직후, 철창 너머의 인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으니까.
다만 그 얼굴은 온갖 음울함과 절망으로 범벅인 채였다.
“…좀 늦었군.”
“……!”
짧지만 수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비슷한 처지인 전투의 마탑주 로마르니가 보다 못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게 어디 이분들 탓이겠습니까?”
“오해는 말지. 딱히 두 사람을 원망하는 건 아니니까.”
“압니다. 파괴의 마탑주 님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제가 누구보다 더 잘 알지요. 하니 함께 가시지요. 못다 한 복수는 마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수? 이 몸 상태로 말인가?”
“꼭 전투가 아니라도, 아군을 도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나는 갈 수 없네. 이미 살아갈 의미부터 잊은 지 오래니까.”
“……!”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는지 로마느니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가 써클을 잃었다는 것.
그건, 가히 가진바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절망감을 이곳에 있는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었다.
그건 직접 겪어본 이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이니까.
어줍지 않은 위로는, 그저 가진 자의 기만일 뿐이다.
“…가라. 구해내야 할 이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텐데?”
“잠깐만요.”
그럼에도 나는 나서야 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가진 힘을 잃어본 기억은 없지만, 처음부터 힘이라는 걸 가지지 못했던 적은 있으니까.
아카데미 시절의 나는 한낱 낙제생에 불과했고.
힘이 없어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경험도 해봤으며.
이 힘을 가지게 된 것도, 기껏해야 불과 수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만약 써클을 회복할 방법이 있다면요?”
“…뭐?”
“혹 그런 방법이 있더라도, 그리 주저앉아만 계실 건가요?”
“…….”
내 물음에도 잭 디스페로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예의 음울한 눈빛으로 내 동공을 빤히 마주 바라보기만 할 뿐.
물론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대한 신뢰를 담아, 두 눈을 더욱더 크게 떴다.
“…훗. 나도 아직 멀었군. 어린아이의 조롱에 흔들리는 꼴이라니…….”
대번에 내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피해의식에 찌들어서 혼자 망상하는 짓은 이제 그만하시고요.”
“……!”
“그럼 만약 그 상처를 고칠 수 있다면,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 주시겠어요? 참고로 이건 조롱도, 하찮은 위로도 아닙니다. 진짜로 해볼 만할 것 같아서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이에요.”
“…….”
이어지는 내 말에, 잭 디스페로우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여전히 그 표정에 희망 따위의 감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이제는 체념이라도 했는지, 어디 꼴리는 대로 해보라는 듯 제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기까지 한다.
그게 못내 신경에 거슬렸지만…
“만약 그런 방법이 있다면, 부탁 정도가 아니라 네게 충성을 바치겠다.”
“……!”
“허나, 그런 방법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 그러니, 난 두고 이만 가거라. 이 이상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명백한 축객령이었으나, 반대로 내 입가에는 완연한 호선이 그려졌다.
“충성을 바치겠다는 방금 그 말씀, 확실하게 제 머릿속에 각인했습니다.”
***
한편, 무너진 마그릭 협곡 너머 테라의 북부.
“제국군이 완전히 물러갔다고 합니다.”
“…….”
전령의 보고에도 카이클 공작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끌어모은 북부의 병력이 4만.
이걸로 제국군의 십수만 대군을 어찌 막을까 하염없이 고심하고 있었다.
더욱이, 대(大) 전쟁 병기라는 마탑주가 무려 다섯이나 포함된 전력이니까.
대륙 제일이라는 제국 출신의 세 십이월은 또 어떠한가?
한데,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고민이 불필요하게 됐다.
“마그릭 협곡이 무너진 덕분입니다. 테라를 포기한 것은 아니겠지만, 길이 막혔으니 어쩔 수 없이 우회해야겠지요.”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인가? 다른 곳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으로 수천 년 명맥을 이어온 마그릭 협곡이 무너질 줄이야…….”
“한데, 조금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소문…?”
“마그릭 협곡이 무너진 것은, 천재지변 따위가 아니라 한 ‘마법사’로 인한 일이라는 조금… 아니, 많이 믿기 힘든 정보였습니다.”
“……!”
찰나, 카이클 공작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출처가 어디지?”
“공작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국군은 협곡으로 향하는 동안 인근 대부분의 마을을 그냥 무시하고 통과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쪽 사람들에게서 나온 정보입니다.”
“…….”
출처가 협곡 인근 마을주민들이라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산증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인 셈이니까.
제국군은 최단거리로 테라의 수도를 점령하기 위해 행군을 서둘렀으니.
그들이 무사한 것 또한 여러모로 믿을 만했고.
“…정황상 확실하다는 건가? 고작 일개 마법사의 힘이, 역사적인 대 산물조차 무너뜨릴 정도라고?”
“각하께서는 그 소문을 믿으시는 겁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겠지. 솔직히, 때 아닌 대지진으로 마그릭 협곡이 무너졌다는 일도 믿기 힘든 얘기니까. 다만…….”
순간, 말끝을 흐리던 카이클 공작이 눈을 빛냈다.
“소문의 그 마법사라는 건, 과연 누구일까? 분명 하는 짓만 보면 우리를 도우려는 것 같기는 한데…….”
“아군이라면 이 이상 든든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아군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그와 손을 잡아야 한다. 설령 테라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하면, 혹여나 만나게 되면 제안이라도 해봐야겠군요. 각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내어주실 생각이십니까?”
“무엇이든.”
카이클 공작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돈을 원한다 말하면, 최소 왕궁 비고의 절반은 털어줘야겠지. 권력을 원한다 하면, 셋뿐인 공작가를 넷으로 늘려야 할 테고.”
“그, 그렇게까지야…….”
“아니. 소문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로잡는다면… 그는 테라에 훨씬 더 큰 선물을 가지고 올 게야.”
그리 말하는 카이클 공작의 목소리에는, 아주 약간의 의심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
염화의 마탑 지하 2층.
예상대로, 그곳에는 다시 무수한 사람들이 구금되어 있었다.
1층에 있는 것이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었다면,
2층은 각 왕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가 마법 대전 당시 강제로 억류된 귀족들이었는데…
“사, 살려주게! 돈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주겠네!”
“나는 아예 성을 바치겠네! 제발 좀 풀어주게. 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
“거기, 가지 말고 원하는 걸 말이라도 해보라고!”
오랜만에 외부인을 접하는 것이었을까?
1층과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그쪽이 병든 닭장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쪽은 아직 힘이 팔팔한 가축들이 있는 목장이랄까.
‘…가만, 이거 어쩌면…?’
순간, 내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이들 모두를 풀어준다.
그건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다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나는 이들을 이용해, 또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을까?
“표정만 봐도 알겠다. 또 뭔가를 얻으려고 뇌 즙을 쥐어짜고 있는 모양이지?”
“그래도 나름 생명의 은인인데, 빚 정도는 지워둬서 나쁠 건 없잖아요?”
“능구렁이 같은 놈. 그래 봐야, 테라는 이미 연합에 속해 있을 텐데? 아군이 위기에 처한 광경을 목격한 이상, 구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냐?”
“누가 안 구해준대요?”
“즉, 이 일로 무언가를 얻기도 힘들 거라고. 더욱이, 연합군도 벌써 테라를 지원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면서?”
“그래 봤자 10만이에요. 제국군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죠.”
“그거야 연합 내부의 정치 싸움 때문이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으신 걸까?
이리 말씀이 많은 성격은 분명 아닐 텐데…
“…잠깐, 정치?”
또다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과연.
역시 백 년 역사의 마탑에서 닳고 닳은 탑주라 그런지, 나보다 두뇌 회전이 한발 앞서간다.
“연합에게 무언가를 얻을 게 아니라, 이 사람들을 테라 편으로 만들라는 뜻이시죠? 전(全) 연합군은 아니라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테라를 위해 움직일 수 있도록.”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남 좋은 일을 왜 네가 굳이 나서서 하냐?”
“예?”
“테라도 남이라고. 말이 고국이지, 넌 딱히 그곳에 특별한 정도 없잖냐? 테라에서 너보다 훨씬 더 오래 산 나도 정이 없는데.”
“그야…….”
“더군다나, 특정 국가에 힘이 너무 편중되면 연합 내부의 정치 싸움이 더 격화될 우려가 있지 않겠냐?”
“…설마 여기서 더요? 제국군에게 대륙의 모든 국가가 짓밟힐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원래 보이지 않는 위기보다 눈앞의 이권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니까. 그렇게 무수한 나라들이 멸망의 길을 걸었다고, 역사가 그리 말해주고 있다.”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이내 내 두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니까, 테라가 아닌 ‘너’를 중심으로 사람을 모으라고.”
“네?”
“테라의 영웅이 아니라, 연합의 영웅이 되라는 의미다.”
“……!”
찰나 눈을 크게 뜨는 나를 향해,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쐐기를 박았다.
“확실한 인맥을 쌓아서 권력도 명예도, 아예 너 혼자 다 먹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