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염화의 마탑(5)
‘표정 한번 볼만하네.’
블레어 마탑주의 당혹스러움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등의 고통은 금세 잊혀졌다.
일시적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보조계 마법을 사용했기에.
그보다, 이번 일을 위해 준비한 호구…
아니지, 대 화이트 드래곤 이리나와의 거래가 제대로 주효했다.
마탑으로 이동하기 직전,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를 더 제안했다.
잠시 그때의 상황을 되짚어보자면,
‘혹시 레드 드래곤 하트 좀 가지고 계세요? 하다못해 조각이라도.’
‘뜬금없이 뭔 헛소리야? 세상에, 드래곤한테 하트를 찾는 미친놈을 다 보겠네?’
‘그게 바로 접니다. 왜인지 이리나 님은 가지고 계실 것 같아서요. 작금의 드래곤들은 대부분 소울 이스케이프를 시전했다면서요? 혼은 떠나가고 육신은 그대로 레어에 남았을 텐데. 그걸 보고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았을 듯해서요.’
‘왜지?’
‘그야, 워낙 연구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신 분이시니까요?’
‘너 지금 목걸이 가지고 돌려 까는 거지? 그래서, 하트는 뭣 하려고?’
‘지금부터 제가 상대해야 할 적이, 불사조의 정수를 취한 인간 제일의 마법사거든요. 그와 관련해서 미리 대비를 좀 해두고 싶어서요.’
‘…불사조의 정수? 인간치고는 꽤 대단한 물건을 구했네. 뭐, 그래 봐야 한낱 미물일 뿐이지만. 근데, 그리 말해 봐야 나한테는 없어.’
‘그 목걸이. 넉넉하게 한 일주일 정도 더 빌려 드릴게요. 솔직히, 텔레포트로 번 하루 가지곤 부족하시잖아요?’
‘…….’
내 반문에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곧, ‘받고 일주 더!’를 외쳤다.
사실, 지고한 존재라 불리는 드래곤들에게도 아이리스의 목걸이는 무척이나 신비로운 물건일 테니까.
제작자 본인이 같은 일족일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망룡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결국 오늘날에는 일종의 ‘선구자’가 된 셈이니까.
그런 존재가 제 모든 지식을 쏟아부어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이다.
하니, 그녀 스스로도 고작 며칠 가지고 무언가를 알아낼 가능성은 희박하다 판단한 거겠지.
결과적으로, 나는 이리나에게서 손가락 마디 크기의 하트 조각을 뜯어낼 수 있었고.
직후, 망설임 없이 그것을 ‘섭취’했다.
이론상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검은 불꽃이라지만… 대체 어떻게 불사조의 힘을 품은 홍염까지 집어삼킬 수 있는 거지?”
“참 아이러니하죠? 얼음마저 순식간에 증발시킨다고 알려져, 그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홍염이 대륙사에 다시없을 극 상성을 만났으니.”
“…기고만장하지 말거라.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화르르르륵! 푸-화아아아아아악!
순간, 넘실거리며 피어오른 홍염이 거칠게 흑염을 몰아붙였다.
그리곤, 이내 그 불꽃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이 내 쪽을 향했다.
“내가 바로 대륙 제일의 마법사, 블레어 던 마그마르다.”
“아니요. 이번에도 틀리셨습니다.”
“…뭐라고?”
“이제 대륙 제일의 마법사는 여기 있는 저, 세타 쿤 이그니스니까요.”
“이 시건방진 놈이…!”
귀를 닫았다.
이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으니까.
전신의 혈류를 타고 녹아든 레드 드래곤의 일부가, 내게 하염없이 외치고 있었다.
아직 부족하다고.
당장 저 불꽃을 취하라고.
번-쩍!
일순, 내 두 동공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샛노랗게 변했다.
“이걸로 끝을 내죠, 블레어 마탑주.”
“……!”
전신의 마나를 흑염 하나에 오롯이 집중했다.
더 뜨겁게.
더 강렬하게.
채 홍염이 재점화할 틈조차 주지 않고, 일시에 대상을 말소시킬 수 있도록.
투- 화아아아아아악!
“이 무슨…!”
블레어 마탑주의 경악으로 가득한 목소리는 금세 폭음에 파묻혔다.
어마어마한 흑염에, 순식간에 전신이 휩싸였기에.
“말도… 안 돼…!”
“이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세요, 염화의 마탑주.”
퍼석!
그는 채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문자 그대로, 타오르는 홍염과 함께 한순간 스러졌기에.
“…….”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가 곧장 몸을 돌렸다.
아직 새하얀 뼈가 드러난 등의 상처는 그대로 드러낸 채였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곧 내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무수한 마법사들이 시야로 들어왔다.
“전투는 끝났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마나를 담아 있는 힘껏 고함쳤다.
***
마그릭 협곡에서 대략 일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어느 대군(大軍)이 터덜터덜 한곳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데, 그 모양새가 꼭 패잔병의 걸음을 보는 듯했다.
“스노비 황자 전하. 계속 이런 속도로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군의 선두, 세간에서는 파랑의 검사로 더 유명한 웨이브로 공작의 물음이었다.
“걱정되십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만약 원래 계획대로 마그릭 협곡을 통과했다면, 불과 일주일 만에 테라의 수도도 당도할 수 있겠지만…….”
“그곳이 무너지는 덕분에 여정은 한 달로 늘어났고, 군량미마저 충분치 않으니 중간에 도시까지 들려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더해졌지요. 그만큼 시간도 훨씬 더 지체될 게구요.”
“…말씀대로입니다.”
승마한 채 상념에 빠져 있던 스노비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웨이브로 공작님.”
“예, 전하.”
“뜬금없지만, 여기서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공작께서는 형님의 편이십니까, 그도 아니면 제 편이십니까?”
“예? 그, 그건…….”
순간, 웨이브로는 무척이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도적인 질문은 예의에도 어긋날뿐더러, 상당히 민감한 주제였으니까.
“공작님께서는 아마 이리 생각하고 계시는 거겠지요? ‘이번 패전으로 2황자는 실각할 가능성이 커졌다. 고작 무너져 가는 테라조차 함락에 실패했으니까’라고.”
“오해십니다. 그런 생각까지는…….”
“괜찮습니다. 저는 입에 발린 말보다 직언을 더 선호하는 편이니까요. 아, 참고로 이곳에 있는 분들은 모두 제 사람들입니다.”
“예에!?”
이어지는 스노비의 말에, 웨이브로 공작이 화들짝 놀랐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 누구던가?
제국 전체 전력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장 그와 같은 제국 출신의 십이월만 봐도 무려 두 사람이 더 있었고.
거기에, 마탑주는 나머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 이 순간 그들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니…
…무언이 곧 긍정이라고 했다.
“…설마 진짜…?”
“이분들이 괜히 테라 쪽을 지원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향후 공적을 생각하면, 웨이브로 공작님 말씀대로 다 무너져 가는 테라 쪽보다 응당 다른 나라를 공략하는 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 그 말씀은…?”
“폐하께서 형님과 저에게 전쟁 전에 하신 말씀이 있지요. 이번 전쟁에서, 그간 쌓아온 정치와 인맥을 모두 활용해 보이라고. 그 결과로 후계를 정하시겠다고.”
“……!”
“그분은 각자 공략할 거점과 나라만을 지정해 주셨을 뿐, 전력을 꾸리는 일은 전적으로 황자 개인에게 맡기셨습니다. 저희는 각기 10만의 군사를 손에 쥔 채,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나머지 카드를 뽑아야 했지요.”
“…….”
“다만, 아시다시피 최초의 저는 제 사람들을 분산시켰습니다. 처음부터 한 뭉텅이로 몰려다니면 이쪽의 사람들이 누가 있는지 대번에 노출될뿐더러, 전쟁에서도 효율적이지도 않으니까요. 폐하께서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으셨겠지요.”
어느새 무수한 초인들이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직후, 웨이브로의 등 뒤로 ‘주르륵’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웨이브로 공작님.”
“하, 하문하십시오.”
“이제 그만 결정을 내리시지요. 중립이라는 이름의 눈치보기는, 이만하면 충분하셨지 않습니까?”
“…….”
그럼에도 웨이브로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오늘의 선택이, 훗날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기에.
“…제가 황자 전하의 고견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고견?”
“계획보다 일정이 최소 한 달은 더 지체되었는데… 여기서 테라를 빠르게 함락시킬 방법이 달리 있을지,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그제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스노비가 미소 지었다.
“아껴둔 무기를 사용해야겠지요.”
“무기라면…?”
“지금 테라에 누가 있습니까? 자유 연합은 물론이고, 마탑의 핵심 인사들까지 모두 모여 있습니다. 그 연결고리를 파고들면, 의외로 수도는 쉽게 함락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송구하오나, 소인은 일평생 검만 닦아 전하의 깊은 뜻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냥 터놓고 말씀해 주신다면…….”
“인질을 이용하는 겝니다. 그 ‘전투의 마탑주’처럼 말입니다.”
“……!”
“마탑의 지하에는, 아직도 우리가 사로잡은 인질들이 대거 갇혀 있지 않습니까?”
“아…!”
그제야 웨이브로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질들의 존재를, 저들은 그저 무시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특히, 전쟁 이후까지 생각해야 하는 반(反) 제국파 마탑주들은 더더욱.
눈앞에서 제 동료의 위기조차 외면하는 수장을 어느 누가 따르려 할까?
그리고, 이미 손까지 잡은 마당에 테라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까?
그럴 리가!
혹여나 테라가 인질들을 포기하려 해도 문제없었다.
그리되면, 대번에 마탑의 인사들과의 관계가 틀어질 테니까.
전쟁에서 마탑주라는 어마어마한 병기의 존재만 사라져도 승산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이건, 완벽한 외통수였다.
“…과연. 소인은 진심으로 전하의 계책에 탄복했습니다.”
“하면?”
털썩!
“늦어서 죄송합니다. 신 웨이브로 또한 2황자 전하를 따르겠나이다.”
무릎 꿇는 웨이브로를 보며 스노비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저야말로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서 일어나시지요.”
“예, 전하.”
웨이브로의 얼굴 위로 마주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이제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테라의 함락 문제는, 다만 조금의 시간이 지체됐을 뿐이라고.
…허나, 둘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 계획은, 이미 처음부터 완전히 틀려먹은 종류의 것임을.
***
제1마탑의 지하.
“이곳이네.”
로마르니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아래로 이동하고 있었다.
지상의 잔여 마법사들은 잠시 방치해둔 채였다.
입구는 완전히 봉쇄됐고.
어차피 암흑 필드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타, 탑주님…?”
지하 초입에 들어서는 즉시, 경악으로 가득한 쇳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오랫동안 물을 접하지 못해 쩍쩍 갈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반가움이라는 감정은 여실히 전해졌다.
“어, 어찌 된 일이십니까? 왜 탑주님 혼자 이곳에…?”
“블레어 던 마그마그가 죽었다.”
“뭔… 예에에에에!?”
최초의 경악성이 사방으로 울렸다.
웅성거림은 빠르게 지하 전체로 번져 갔다.
“하, 하면 설마 탑주님이…?”
“그럴 리가. 내가 아니라, 여기 세타 군이 꺾었네. 그것도 완벽한 일대일로 말이야.”
“……!”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사람들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하 더 깊숙한 곳으로 움직이기 바빴다.
찾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이곳에 있어야 하니까.
그래야만 계획에 차질이 없을 테니까.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새로운 영웅이다! 영웅이 탄생했다아아아!”
뒤늦게, 우렁한 고함이 귀청을 때린다.
잠시 움찔한 내 얼굴 위로 자연히 미소가 번져 갔다.
저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아마 각국의 고위 인사들은 지하 2층에 있을 거네.”
“…그렇군요.”
어느새 로마르니가 내 바로 옆까지 따라붙으며 설명을 마쳤다.
한데…
멈칫.
2층으로 내려가는 그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나는 기어이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1층에서도 가장 습하고 어두운 안쪽.
“그는…….”
“…맙소사.”
로마르니의 목소리는 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곳에, 문자 그대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인영이 손발이 구금된 채 묶여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