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염화의 마탑(4)
“음…….”
로마르니의 열린 잇새로 묵직한 침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곧 가만히 내부를 관조했다.
마나의 맹세.
그것으로 인한 제약은 단 하나였다.
상대의 명에 따르지 않으면, 심장의 고리는 유리처럼 터져 나갈 것이라는 점.
다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좀 어때요?”
바로 눈앞에 있는, 한 아이 덕분에.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제 마나를 운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실 텐데요? 내부에서 뭔가 깨져 나가는 듯한 느낌, 못 받으셨나요?”
“…분명 그런 느낌은 있었지만, 아직 시도해 보지는 않았다.”
“그럼, 지금 한번 시도해 보세요.”
“하지만…….”
“괜찮다니까요.”
그제야 로마르니가 입을 다물었다.
내심은 아직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만에 하나, 혹시의 혹시라도 금제가 풀리지 않았다면…
그는 마나를 일으키는 즉시, 폐인이 되고 말 테니까.
우우웅!
그럼에도 로마르니는 써클을 운용했다.
믿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는 망설이지 않을 작정이니까.
눈을 질끈 감고 이내 심장의 마나를 전신으로 퍼뜨려 갔다.
파지지직!
“……!”
미세한 스파크와 동시에, 곧 로마르니의 전신으로 옅은 빛이 스며들었다.
배틀 메이지인 그의 주특기.
신체의 무장화(武裝化)였다.
“금제가… 발동되지 않았다?”
“그러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
“확실하게 서포트해 드릴게요. 그 팔에 대한 복수는 제대로 해줘야죠?”
“너…….”
“무엇보다, 약속했거든요. 전투의 마탑주 님을 무사히 모시고 돌아가기로.”
“약속이라니…?”
“스실라 씨가 전투의 마탑주 님 걱정을 많이 하고 계셔서요.”
“…….”
그제야 로마르니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직접 보니 걱정하실 만도 하네요. 예전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으시고, 완전히 풀이 죽은 게 꼭… 병든 쥐를 보는 것 같달까?”
“이놈이?”
순간, 무어라 말하려던 로마르니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비록 헛웃음이라 할지라도 얼마 만에 이리 웃어보는 것인지.
“같이 돌아가죠. 지하의 사람들을 구해내고, 다 같이 동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무사 귀환하자고요.”
“…….”
어둡기 그지없던 로마느니의 얼굴에 점차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자신과 눈앞의 대단하기 그지없는 꼬맹이, 거기에 초월의 마탑주 아타락시아 페르잔까지.
이 전력이라면,
“…할 수 있어.”
일순, 로마르니가 불끈 주먹을 틀어쥐었다.
어쩌면, 하늘 위의 저 괴물을 쓰러뜨리는 일도 가능할지 몰랐다.
***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암흑 필드로 일천의 마법사들은 손발이 완전히 묶였고.
잠시나마 적이었던 로마느니 또한 아군으로 합류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태 블레어 마탑주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을 건드렸지만…
‘여기서 저 혼자 뭘 더 할 수 있겠어? 설령 8써클 마법사라 가정해도 여기는 7써클 마법사 둘에, 6써클 마스터도 있는데.’
무려 대륙 제일의 마법사를 상대할 예정이면서도 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부분은,
“죽여 버리겠어!!!!”
“……!”
분노로 가득 찬 고성과 동시에, 하늘 위로 새빨간 불줄기가 ‘화르륵!’ 뿜어져 나간다.
유리나였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마침내 그녀가 노기를 폭발시킨 것이다.
퍼석!
“……!”
허나, 하늘마저 잿더미로 만들 듯 거칠게 뿜어지던 불꽃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갑작스레 생성된 또 하나의 화염으로 인해서.
짙붉은 홍염(紅炎)이 유리나의 분노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하하하하하하하하!”
그 원인은 명확했다.
직후, 블레어 마탑주가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으니까.
아니, 그보다 쟤는 어떻게 암흑 필드 내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어라?”
그 의문은 의외로 금세 풀 수 있었다.
탑의 출입구 바로 앞에, 필드의 범위에 들지 않은 1평 남짓한 공간이 남아 있었으니까.
어쩐지 여태 조용하다 싶더니, 저 쥐똥만 한 공간을 찾고 있었던 건가.
“고작 이 정도로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묻겠어. 당신이 내 할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거지?”
차마 제 입으로 살해니 하는 말은 할 수 없었던지, 유리나가 이리 에둘러 물었다.
“할아버지라… 그래,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나는군. 네가 크루노의 손녀인가?”
“내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오냐, 네 할애비라면 내가 죽였다.”
“……!”
블레어 마탑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평소 호탕한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게,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말아 올린 채로.
“불사조의 정수가 탐이 났다. 그래서 죽였다. 나 혼자 독차지하고 싶었으니까.”
“이 개새끼…!”
유리나의 커다란 두 눈망울에 습기가 차올랐다.
진실을 간접적으로 접하는 것과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하는 것은 충격의 정도가 달랐으니까.
“죽여 버리겠어어어어어!”
펑! 퍼퍼퍼퍼퍼펑!
찰나,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불꽃을 저런 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니.
유리나는 양손을 바닥으로 향한 채 연이어 폭발계 화염 마법을 쏘아내고 있었다.
플라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그녀만의 차선책이었다.
“뒈져!”
순식간에 블레어 마탑주의 맞은편까지 떠오른 유리나가 곧장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했다.
“저 바보…!”
허나, 반대로 내 얼굴은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시도는 좋았지만, 저리되면…
푸슈우우우우!
“……?”
일순, 유리나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암흑 필드의 범위는 허공을 포함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하게도, 마나가 ‘0’인 그 안에서 유리나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신체 내부에 마나를 축적할 수 있는, 블레어 마탑주 수준의 괴물이 아니라면.
“진심으로 우습군.”
블레어 마탑주는 더 이상 사태를 관망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이, 곧 유리나를 향해 활짝 펼쳐졌다.
그리곤 눈으로도 확연히 보일 정도의 아지랑이를 주변으로 퍼뜨린다.
“이대로 네 할애비 곁으로 가거라.”
“……!”
유리나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직후, 내 두 다리가 곧장 땅을 박찼다.
푸-확!
그와 동시에, 홍염의 불꽃이 유리나를 향해 폭사했다.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비정한 한 수였다.
이대로면 늦는다.
하여, 나는 곧장 색욕의 이능을 일으켰다.
웨에에엥!
“세, 세타…?”
멍하니 입을 벌린 유리나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퍼어엉!
한 박자 늦게, 예의 홍염이 내 등판에 작렬했다.
전신으로 들이닥치는 불꽃의 열기는 고통스러웠고.
하염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화풍(火風)은 이내 고통마저 앗아간다.
정도를 넘어선 충격으로, 통증조차 느낄 수 없는 무감(無感)의 상태.
“너, 너…!”
유리나가 곧장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물기 진 두 눈에는 죄책감과 뒤늦은 후회만이 가득했다.
그런 유리나에게…
“괜찮아.”
“……!”
나는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녀의 눈가로 투명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곧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빠르게 유리나를 지상으로 이동시킨 나는,
화르르르르륵!
“…죽여주마.”
여전히 블레어 마탑주를 등진 채 전신으로 흑염(黑炎)을 피워 올렸다.
***
“검은 불꽃?”
찰나, 크게 뜨여진 블레어의 두 눈이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불꽃을 타고난 마법사들 중에서도, 재능이 신의 영역에 이르러야만 사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힘.
흑염.
그걸 주력이 불꽃도 아닌 아이가 생성해 냈다는 사실은 적잖이 놀라웠지만…
‘…크루노. 보고 있는가? 네 손녀가 나를 찾아왔다네.’
블레어는 지금, 그보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 아이마저 내 손으로 죽이게 된다면, 저승에서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직후, 블레어의 입가로 왜인지 씁쓸한 미소가 번져갔다.
또다시 ‘그날’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불의 정수.
그것에 대한 일화는,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
그날, 크루노는 이 힘을 기꺼이 자신에게 ‘양보’했다.
놀랍게도 이게 진짜 진실이었다.
우정이란 이런 것일까?
그때의 감정은, 고맙다는 표현으로도 감히 부족할 정도였다.
허나, 결론적으로 크루노는 이 손에 명을 달리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친우의 양보를 기꺼이 받들어, 정수를 집어삼키려는 순간…
웬, 붉디붉은 불꽃이 그대로 그를 집어삼켰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블레어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한데, 정수는 온데간데없었고.
오직 반듯하게 몸을 누인 크루노만이, 제 곁에 자리해 있었으니…
고마움이 분노로 뒤바뀌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우정은 개뿔.
아, 나는 마지막 순간 이따위 배신이나 당하고 말았구나.
결국 힘을 탐낸 이 녀석이, 나를 기습하고 정수를 취했구나.
그게 아니고서야,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까.
하여, 블레어는 쓰러져 있는 크루노의 심장에 비수를 쑤셔 박았다.
다만, 뒤늦게 내면에서 느껴지는 힘의 격동으로 그는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 불꽃은, 불사조가 남긴 최후의 몸부림이었음을.
오히려 정수에 정신이 팔려 있던 자신을, 크루노는 구하려 했음을.
그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희미하게 숨이 붙어 있던 크루노는 자신의 한 수로 즉사하고 말았으니까.
아마 곧장 치료를 해줬다면,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절망에 빠져 있던 블레어는, 그 이후로 철저하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랜 친우를 죽이고.
크루노의 죽음에 의구심을 갖고, 진상 조사단을 꾸리려던 이들.
달리 탑의 영원의 동반자라고까지 불렸던 빛의 일족, 아락사스들마저 몰살시켰다.
그리고, 이제는 나고 자란 제국마저 무너뜨리려 한다.
그렇게 쟁취해 온 정상이니까.
그렇게 해야만 지킬 수 있는 자리니까.
꿈꿔온 목표 하나만 보고, 지금껏 달려왔으니까.
‘한낱 조직에 불과한 마탑을 넘어선, 대(大) 마도 제국의 건설.’
투-화아아악!
마침내 흑염이 블레어를 집어삼켰다.
뼈가 훤히 보이는 등의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은 제 이빨을 드러냈다.
그게 블레어는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큭… 이깟 잔재주쯤!”
퍼석!
일순, 흑염이 사그라들었다.
세상의 모든 불꽃은 오로지 그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거기에는 흑염이니 청염이니 하는 염의 구분도 무의미했다.
그저 모두가 똑같은 불꽃일 뿐.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저 녀석은 오직 불꽃으로만 마주 뻗어오고 있었으니…
“우둔한 놈.”
블레어의 한쪽 입꼬리가 다시금 치솟았다.
한데 그 순간,
화르륵!
“……!”
꺼져 가던 흑염이 다시 피어올랐다.
블레어의 강한 의지조차 거스르면서.
그러고도 모자라, 점차 제 크기를 부풀려 가기까지 했다.
“무슨…?”
“대륙의 오랜 전설 중에는 그런 것도 있다죠? 불사조의 정수를 취하는 자, 대륙의 모든 불꽃을 지배하리라.”
“……!”
새까만 불꽃에 휩싸인 채 녀석은 재차 제 할 말만 이어갔다.
“한데 아세요? 그거, 틀린 말이에요.”
“뭐…?”
“이 세상에는, 한낱 마물에 불과한 불사조보다 더 어마어마한 생명체가 다수 존재하거든요.”
“…우습군. 이 상황에서 허세더냐?”
“저도 하나 알고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아마 마탑주 님도 잘 아시는 존재일 텐데.”
녀석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드래곤이요.”
“……!”
“그중에서도 불꽃하면 레드 드래곤이 제일이죠.”
“…….”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블레어는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걸 몰라서 가만히 있을까?
드래곤은 규격 외의 존재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생명체라는 말이다.
과한 욕심의 끝은 파멸만이 존재할 뿐.
결국, 그들의 분노로 인류는 한차례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고대 시대의 몰락.
역사가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한데도 저 녀석은…
“……?”
순간, 블레어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완전히 피어오른 흑염은 이제 전신이 아니라 공간 전체로 퍼져 가고 있었기에.
놀라운 것은, 종래의 그것이 결국 블레어의 홍염마저 집어삼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진정한 화신(火神)은 그쪽에 있다는 양.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놀라 중얼거리는 그를 향해, 곧 눈앞의 애송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다.
“이거 어쩌죠? 친우까지 배신해 가며 취한 힘인데… 제 앞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