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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189화 (189/251)

189화. 염화의 마탑(2)

결국, 나는 끝까지 따라나서겠다는 유리나를 말리지 못했다.

복수.

그 두 글자가 주는 감정의 격동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이 사단을 만든 원흉만큼은 그냥 둘 수 없었으니.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슬며시 미간을 찌푸린 내가 연신 주변을 둘러봤다.

레이브 영지는 남부에서도 상당히 넓은 지역에 속했다.

허나, 일일이 뒤지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눈을 감고 기운에 집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가 기감에 걸렸으니까.

“…나 참.”

순간, 내 표정 위로 어처구니없음이 떠올랐다.

그녀는 보란 듯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절대적인 힘 앞에서 ‘겸손’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양.

무엇보다,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건데?”

곧 내 시선이 영주 성 꼭대기로 향했다.

그 고고한 자존심답게.

이리나는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지붕 위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한 손에는 일전에 내가 건넨 목걸이를 쥔 채로.

하여, 나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이동했다.

웨에엥!

“저기요?”

“햑!”

일순 퍼질러 있던 이리나가 화들짝 놀랐다.

곧이어 동그랗게 뜨여진 백안이 나를 올려다봤다.

한데, 그 동공이 왜인지 하염없이 떨려대고 있었다.

“너, 너…?”

“뭐죠, 이 반응은? 꼭 귀신이라도 보신 듯한 얼굴이신데?”

“…….”

무언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의 그녀였다.

아니, 온몸으로 이미 말하고 있었다.

당장 손가락부터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연신 꼼지락꼼지락.

“그, 그게…….”

“그게?”

“…바, 방금 그 능력은 뭐지? 테, 텔레포트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

그게 아닐 텐데.

…하는 눈빛으로 내가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 보내자,

“…너 자꾸 그딴 눈알로 나 쳐다보지 말라고 했지? 어지간하면 대답해라? 나 성질 더러운 거 알면.”

“…….”

이제는 아예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한다.

쩝, 어쩌겠어.

약한 게 죄지.

가볍게 입맛을 다신 내가 이내 이리나 옆으로 털퍼덕 주저앉았다.

“마왕의 이능이에요.”

“…뭣!?”

“정확히는 7대 죄악 중 하나, 색욕이 가진 능력이죠. 아, 7대 죄악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죠?”

“뭐, 뭔 헛소리를…!”

마기가 아닌 마나를 대체 기운으로 사용한다지만, 드래곤쯤 되는 존재가 상대라면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었다.

기운에 무척이나 민감한 존재들이니까.

비록 지금은 상태가 영 이상해(?)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알게 될 사실이었다.

하니, 차라리 자진 납세하는 편이 더 나았다.

킁, 킁, 킁.

직후, 이리나의 오밀조밀한 코가 연이어 벌름거려졌다.

“희미하지만 불쾌한 이 냄새… 설마 진짜 죄악이라고?”

“네.”

“어떻게 인간이…?”

찰나, 말을 이어가던 이리나가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아니, 너라면 가능할지도….”

“네? 혼자 계속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 아니야.”

내 미간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허나, 이리나는 곧장 화제를 전환하기 바빴다.

“크흠. 그, 그보다 여긴 왜 왔지? 분명 약속 시간은 내일까지일 텐데….”

그리곤 손안의 목걸이를 슬며시 제 등 뒤로 감추기까지.

가만 보니 의심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보다, 누가 보면 내가 자기 물건을 뺏으려는 줄 알겠네.

“…부탁 하나만 드리려고요.”

“부탁?”

“중부의 대평야 아시죠? 인간들이 세운 마탑이 있는 곳이요. 거기에 볼일이 좀 있는데, 혹시 이동시켜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

일순, 이리나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 노려봐야 소용없는데.

본의가 아니었다곤 해도, 귀찮은 일을 떠넘긴 이상 지금부터는 철저하게 부려 먹을 생각이니까.

“…인간. 무언가 착각하나 본데, 부탁만 하면 내가 그걸 들어줘야 하는 한가한 존재가….”

“그 목걸이, 하루 더 빌려드릴게요.”

움찔.

거짓말처럼 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어때요, 콜?”

곧 그녀가 어색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코, 콜….”

이리 수줍게 중얼거리는, 대화이트 드래곤님이셨다.

***

제1마탑.

번-쩍!

무려 드래곤의 능력으로 단숨에 이곳으로 도착한 나와 아타락시아 페르잔, 그리고 유리나는 잠시간 서로를 바라봤다.

솔직히 유리나 같은 경우에는 몰래 떼어놓을까 고민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입장만 바꿔 생각해서.

내게 학장 할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잡으려 할 테니까.

다른 무엇보다, 괜한 원망은 듣고 싶지도 않았고.

“…말도 안 돼. 이만 한 수준의 매스 텔레포트라니, 정말로 그 여자가 드래곤이라고?”

그때, 탑을 올려다보던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연하겠지만, 이건 비밀이에요. 말 안 해도 알고 계시죠?”

“그, 그게 아니라 이리 네 말을 잘 들어줄 정도라면, 그냥 드래곤더러 다 쓸어달라고 부탁하면 안 되냐? 마탑이고 제국군이고.”

“책도 안 보셨어요? 하나를 주면 열을 가져가려고 하는 생명체에요. 이것도 제 나름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부탁한 거고요.”

“그야 그렇겠지만… 세상에, 내 인생사 드래곤을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혹, 내가 말실수를 했던가?”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연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자연스레 두 존재의 첫 만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을 부릅뜨게 만드는 미녀를 향해,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짓는 꼬맹이의 작태란.

‘…그보다…….’

힐끗, 내 동공이 유리나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는 말없이 탑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열두 마탑 중에서도 단연 첫 번째로 손꼽히는 제1마탑.

그 첫 번째란, 과거부터 이어져 온 드높은 권위와 현재의 위명을 모두 포함했다.

그만큼이나 눈앞에 있는 염화의 마탑은 열두 탑의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였으니까.

“…혹 위험해지면 언제든 뒤로 빠져라. 너네 둘 다.”

“지켜주시게요?”

“계집아이는 말할 것도 없고, 갓 7써클에 오른 애송이는 이미 10년도 더 전에 그 경지에 오른 이 천재 마법사님께서 지켜줘야 하지 않겠느냐?”

“아하, 그거 참 든든하네요. 부디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

순간 내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답지 않게,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진중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너희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이 남지 않았느냐? 그에 비해 나는 기껏해야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고.”

“…풋.”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물론, 이번에는 내 쪽이 아니었다.

“뭐냐?”

“아, 죄송해요. 그게, 초월의 마탑주님 입에서 ‘얼마 남지도 않았다느니…’ 하는 말씀이 나오니, 저도 모르게 그만…….”

“…….”

이어지는 유리나의 말에,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의외인 것은.

평소였다면 노발대발했을 텐데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줬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세타. 네가 잘못되면 세논이 나를 아주 죽이려 들게야.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거든.”

“스승님이요?”

“그래. 아직은 어린애라면서, 나더러 잘 챙겨주란다.”

“…….”

그 스승님이 나를 챙겨주라고 하셨다라…….

맨날 강하게 커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데.

“…….”

다만, 한순간 마음만큼은 뭉클해졌다.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나를 챙기고 계신다는 뜻이니까.

이게 제자를 향한 스승의 마음인가.

최근 들어 부쩍 희노애락의 감정을 더 세밀하게 경험하는 느낌이다.

“들어가자.”

“옛!”

힘차게 대답한 우리는 이내 마탑 안으로 첫발을 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안에서, 지금부터 우리 셋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

마침내 제1마탑으로 들어선 직후.

“이게 무슨…?”

가장 먼저, 선두에 선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다.”

“함정?”

그제야 내 동공이 아타락시아 페르잔 너머를 향했다.

참고로 마탑 내부 구조는 어느 ‘투기장’을 연상케 했다.

탑 중심을 기준으로 넓은 로비가 자리해 있었고.

계단을 통해서도 올라갈 수 있는 2층과 3층은 위에서도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사방이 뻥하니 뚫려 있었다.

일전의 마법 대전에서 단기간에 대규모 관중석을 마련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아마 완전히 폐쇄된 일반적인 탑의 구조였다면, 또 내부 공사니 뭐니 부산을 떨어대야 그만한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겠지.

중요한 것은, 지금 그 2층과 3층에…

“…아무래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요?”

무수한 마법사들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수만 최소 수백.

마치 우리의 기습 방문에 미리 대비라도 하고 있던 모양새였다.

그르릉, 쿵!

“……!”

타이밍 좋게 등 뒤의 출입구까지 빠르게 닫혔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덫이었다.

“역시 왔는가? 24시간 경계를 서게 한 보람이 있구먼.”

“……!”

직후, 하늘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의 꼭대기가 보이는 허공에서, 한 적발의 미남자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빈 허공에 계단이라도 있는 듯이.

“블레어 마탑주…!”

“듣자 하니, 여기저기 빈 집만 골라 들쑤시고 다녔더구먼. 나라고 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

자세히 보니, 탑 내 마법사들의 눈 밑으로 다크써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설마 밤새 이들을 상주시킨 겁니까?”

“아, 그리 불편하게 볼 필요는 없네. 나도 인간인데, 직원 복지도 신경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

“2교대로, 12시간에 한 번씩은 근무자들이 바뀐다네.”

…참 퍽이나 신경 쓰시는구만.

일견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위를 올려다보자, 적발의 사내가 시원스레 미소 지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

“이만한 인원이, 뒤쪽에서도 더 대기하고 있다는 뜻이네.”

“……!”

말을 마친 블레어 마탑주가 힐끗, 내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페르.”

“그딴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 할방구.”

“…훗.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할방구라니, 너무하는구만.”

“적어도 난 겉모습은 동안이거든?”

…순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평소에는 콤플렉스처럼 반응하는 외형을, 동안이니 뭐니.

“자네까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당연하지. 조직의 배신자를 처단해야 하는 일인데, 남 손에만 맡겨서야 쓰나?”

“근데, 둘만으로 이들을 감당할 수 있겠나? 이곳에 모인 마법사들은 정확히 천 명이네. 그마저도 2써클 이하의 마법사는 없지. 최소 3써클짜리 마법이 동시에 일천. 그건, 대륙 제일의 천재라는 자네들 둘로도 힘들 듯한데?”

유리나는 안중에도 없는 발언이었다.

당장에 발끈하려는 그녀였으나, 내가 재빨리 그 소매를 잡아끌었다.

“뭐, 당장 첫 번째 관문부터 통과하기 힘들 듯하다만.”

“…뭣이?”

“어서 이리 나오게.”

블레어 마탑주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였다.

순간, 1층의 음영 진 구석에서 한 인영이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이전과 달리, 한쪽 팔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그는…

“……!”

나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로, 로마르니…?”

“동료였던 그를 한번 꺾어보게. 아니, 죽여보게.”

“……!”

블레어 마탑주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찰나,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건 나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었다.

“제1마탑의 첫 번째 관문은 바로 그네. 두 번째는 천 명의 마법사들이고.”

“이 비겁한 새끼!”

유리나가 더는 참지 못하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아타락시아 페르잔은 얼마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언뜻 잇새로 핏물까지 내비쳤다.

여기서 나는,

“…꼭 당신이 정해둔 순서를 우리가 지킬 필요는 없죠.”

“…응?”

“일단 그 두 번째 관문이라는 것부터, 통과하겠다고요.”

“무슨…….”

콰콰콰콰콰콰콰콰!

나는 대답 대신 아낌없이 써클을 해방했다.

내 농도 짙은 기운으로 단숨에 공간을 ‘지배’하기 위해서.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건… 마기?”

블레어 마탑주가 ‘흡’ 눈을 치켜떴다.

죄악이라면 색욕만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오늘을 위해 나는 숨겨둔 또 하나의 죄악을 과감히 드러냈다.

지금부터는, 쇼 타임이다.

“…식탐(食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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