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염화의 마탑(1)
나는 스실라 씨를 통해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전해 들었다.
“그러니까, 제1마탑주를 따르지 않는 이들은 모두 탑 지하에 구금당했다는 거죠?”
“네. 마탑의 지하는 족히 수천 명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으니까, 물리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어요.”
“인원은요?”
“아마 이백 명쯤…? 정확하진 않지만, 그 정돈 충분히 될 거예요.”
이백이라.
내 예상보다는 훨씬 많았다.
총 열두 개로 이루어진 마탑의 현 조직 구조에서, 탑 하나당 구성원은 오백 정도가 평균이었으니.
도합 육천 명 중에 이백.
다시 말해, 잠정적 아군이 전체의 3퍼센트는 된다는 뜻이 아닌가?
“…절망적이구만.”
물론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달랐지만.
한차례 쓰게 미소 지은 내가 힐끗 스실라 씨의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 금발을 올백으로 말끔하게 넘긴 마흔 전후의 사내가 있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아, 소개가 늦었네요. 이쪽은 저와 같은 마탑주, 정신의 마법사에요.”
스실라 씨의 손짓에, 이내 금발 사내가 내게 손을 내밀어왔다.
“저스틴 브레이너다. 이리 정식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군.”
“세타 쿤 이그니스입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혹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
“네?”
“그 마그릭 협곡 말이다. 정말로 네가 무너뜨린 건가 해서.”
나는 상대의 의중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테니까.
아마 내게서 직접 듣고 싶은 것이겠지.
“…….”
잠시 고민했지만, 숨길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면 내 능력을 보다 적극적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이에요.”
“……!”
이어지는 내 대답에 스실라 씨가 놀라 입을 가렸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된 셈이니까.
직후, 정신의 마탑주 저스틴은 ‘음…’ 하고 무거운 침음을 삼켰다.
“…대단하군. 천재인 줄 알고는 있었지만….”
“칭찬 감사합니다.”
“하면, 한 가지만 더. 너는 7써클의 벽을 넘은 건가?”
언제는 하나만 묻겠다더니.
다만, 이번에도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마그릭 협곡을 무너뜨린 일은, 최소 그 정도 경지가 되지 않고서야 설명이 불가능했으니까.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듣기로 고작 스물 전후라 들었는데 7써클이라니….”
“세타. 부탁이 있어요.”
순간, 스실라 씨가 재빨리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네?”
“우릴 좀 도와주세요.”
“그게 무슨…?”
“탑 지하에 구금된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어요. 세타도 잘 아는 전투의 마탑주. 그러니까, 로마르니도 아직 그곳에 갇혀 있거든요.”
“…그게 정말인가요?”
“네. 마탑과 제국 대부분의 전력이 각지에 퍼져 있는 지금이야말로, 다시없을 기회라고 저는 생각해요.”
잠시 지금까지의 정보들을 종합해 보자면.
다른 자잘한 5써클 이하의 마법사들을 제외하면, 현재 마탑에는 블레어 마탑주 하나만 남아 있었다.
그만큼 제 실력에 대단한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겠지만…
스실라 씨 말대로, 지금이 절호의 기회인 것만은 분명했다.
허나,
“그럼 저도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네?”
이어지는 내 물음에, 스실라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두 마탑주님은 지금 당장 테라 쪽으로 합류해 주세요.”
“그 말은…?”
“지금과 같은 전시상황에서 두 분의 능력은 존재만으로도 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줄 테죠. 어지간히 큰 부상도, 정신적 트라우마도 두 분의 힘이라면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잖아요?”
“하, 하지만 세타. 그렇게 하면….”
“마탑 쪽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초월의 마탑주님이랑 둘이서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
내 확고한 대답에, 이내 스실라 씨가 입을 다물었다.
재차 무어라 말하려는 정신의 마탑주에게 조용히 고개까지 젓고선.
그리곤 곧, 나를 향해 무척이나 따뜻한 미소를 지어줬다.
…문득 든 생각인데.
만약 내게도 ‘엄마’라는 존재가 있었다면, 딱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네, 믿고 있을게요. 혹 다치면 언제든 도망쳐 와요. 제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치료해 드릴 테니까요.”
***
대략 두 시간 뒤.
일단 드래곤 이리나에게 부탁해 테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아타락시아 페라잔을 찾았다.
공국에 남겨둔 일행들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이쪽이 급선무였으니까.
“…즉, 마탑의 마법사들을 구해내고 테라의 전력으로 이용해 먹으시겠다?”
“또, 또 그리 삐딱하게 보신다. 고작 이백 가지고 전력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된다고요?”
“그 이백이 엘리트들만 모인 마탑의 구성원들이라면 충분히 전력이 되고도 남지. 무려 고오급 인력이잖아?”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싱글싱글 웃으며 반문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혹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동료 마탑주님들까지 구해온 마당에 저를 상대로 셈을 하고 계신 건 아니시죠?”
“네 말마따나, 그럴 리가.”
외견만큼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한층 짙어진 미소로 대답했다.
표정만 봐도 알겠다.
정곡이다.
분명 나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이런 식이다.
실제로 내가 스실라 씨들을 데리고 왔을 때, 가장 기뻐했던 것도 그였으니까.
이래서 마법사들이란…….
“그저 팩트는 집고 넘어가자는 거지. 솔직히 테라에도 중하위 마법사들은 이미 충분하지 않나? 객관적으로 말이야. 괜히 마법 왕국이라 불리는 곳이 아니니까.”
“다시 말해, 중요한 건 소수의 고급 인력이다?”
“그래. 스실라와 저스틴이 합류하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제국의 드러난 전력만 봐도, 스물네 명의 초인 중 절반 이상이 그쪽이니까. 만약 우리 쪽에도 로마느니나, 특히 파괴의 마탑주 잭 디스페로우가 합류해 준다면 일전도 불사해 볼만할 테지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결국 모두를 위한 싸움이니, 탑의 마법사들을 구한 일로 나중에 생색내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역시 똑똑해. 음, 세논이 제자 하나는 기똥차게 잘 뒀다니깐?”
이윽고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대견하다는 얼굴로 내 머리로 손을 뻗어왔다.
스윽.
물론, 나는 그 손길을 슬며시 피해냈다.
“아쭈?”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
맹수는 끝까지 발톱을 숨기는 법이니까.
“큭큭… 그리 기분 나빠 하지는 말고. 네가 자꾸 우리를 상대로 기브 앤 테이크를 시도한다기에, 나도 네 흉내를 한번 내본 것이니까. 이건 진심인데, 나는 네게 기브만 해주고 싶다니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시긴.”
“믿기 싫음 말고. 본론으로 돌아가서, 만약 우리 둘이서 구금된 애들을 구해내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그 영감탱이…….”
순간, 내 신형이 움찔했다.
때마침 바깥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졌기에.
“잠깐. 잠깐만요. 초월의 마탑주님.”
제법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나는 곧장 상대를 말리려고 했는데…
“…블레어 던 마그마르를 죽일 수만 있다면, 전쟁에서의 승산은 훨씬 더 올라갈 테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더 따져 봐야…….”
콰당!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한순간 활짝 열어젖혀졌다.
찰나, 고개를 갸웃한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방금 누가 누굴 죽인다고요?”
주홍빛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예쁘장한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인기척이 낯이 익다 싶더라니,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너는…?”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얘가 어떻게 벌써 이곳에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으, 머리야….”
나는 벌써부터 골머리가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
한편, 세타가 맞닥뜨린 일의 원흉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흥흥흥~”
화이트 드래곤 이리나.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손안의 목걸이를 관찰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대체 아이리스는 어떻게 이런 물건을 만들어낸 건지.
무엇보다, 그의 채취가 짙게 베인 물건이라는 점에서 이리나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다.
너무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평소 무시해 마지않는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서비스까지 해줄 정도였으니까.
아직 공국에 남아 있던 녀석의 일행들을 단번에 귀국시켜 준 것이다.
“이리 자애로운 드래곤이 또 어디에 있을까?”
자화자찬한 이리나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드래곤이 괜히 이기적인 생명체라 불리는 게 아니니까.
적어도 그녀가 아는 일족들은, 다들 자기 자신밖에 몰랐다.
그 선입관을 처음으로 깨뜨렸던 게 바람의 일족인 아이리스였고.
“자, 그럼…….”
육각형의 목걸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리나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분해해서 연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녀석은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일족의 맹약(盟約)까지 요구했다.
과연 아이리스의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고 있다더니…
“…생각하니 괘씸하네.”
물론 꼭 분해를 하지 않더라도, 내부를 들여다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허나, 이리나가 원하는 건 단순히 목걸이의 내부 구조가 아니었다.
그런 껍데기가 아니라 더 깊은 내면.
즉, 이 안에 있는 아이리스의 기억이 진짜 목적이었다.
하여, 이리나는 줄곧 고민을 거듭해 왔다.
목걸이의 주인이 이미 내면의 지식을 취했다지만, 그 무형의 가치는 한낱 일회용품이 아니니까.
하니, 제3자인 자신도 엿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녀는 드래곤이니까.
생각을 거듭하던 중, 이리나는 전혀 의외의 곳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라그하일이 고안하고, 아이리스가 재해석한 규격 외의 마법.
소울 이스케이프(Soul escape).
그것의 원리대로, 이리나는 혼의 파편을 아주 일부만 때어낼 생각이었다.
딱 눈앞의 목걸이 내부로 집어넣을 정도로만.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해.’
우우우우웅!
이리나는 지체 없이 하트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열 번 고민할 시간에, 한 번의 행동으로.
그것이 지금껏 살아온 그녀의 신조였으니까.
쩌적, 쩌저적!
“……!”
얼마 지나지도 않아 기현상은 금세 찾아왔다.
목걸이의 한 면에 미세한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학!”
그 순간, 이리나가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온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혼을 분리하고 목걸이와의 접촉을 시도하자, 곧장 알 수 없는 지식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혼은 본체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경험과 감각을 공유한다는 의미다.
물밀듯 쏟아지는 지식의 파도 속에서, 이리나는 무척이나 놀라운 기억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이건…?”
그건 이리나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태껏 믿어 의심치 않던 진리를 송두리째 뒤집어엎게 만드는.
진실일까?
아니, 거짓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지금 보고 있는 광경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아이리스와 라그하일이… 살아 있다고?”
어느새 새하얗게 반개한 눈의 이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