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스왈로우 제국(2)
테라의 국경 인근.
더 정확히는, 레이브 영지와 스란의 경계.
“황자께서 북부를 통해 테라로 남하하고 계시답니다.”
“…….”
전령의 보고였다.
세간에서는 안개의 기사로 더 잘 알려진 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럽군. 분명 우리가 쉬이 국경을 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꼭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는… 테라는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가 아닙니까? 아마 2황자 전하께서도 그걸 아시기에 직접 움직이신 듯합니다.”
“만약 우리가 계획대로 테라의 수도를 함락시켰다면, 구태여 직접 움직이지도 않으셨겠지.”
“…….”
“아닌가?”
전령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르반이 이내 방 한구석을 돌아봤다.
그곳에,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둔 한 쌍의 남녀가 자리해 있다.
“세븐 포카드야.”
“억! 에르사! 사기 치는 것 아니야? 1,000판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패를 어찌 그리 쉽게 쥐는 거누?”
“난 운이 좋은 편이니까.”
“제길. 분하다! 이번에는 내 패도 괜찮았는데!”
그러면서 테이블 위로 ‘촤르륵!’ 제 패를 집어 던지는 삐죽 머리는, 뇌전의 마탑주 엑스토나 제우스.
그가 공개한 카드 5장은 ‘8’ 트리플에 ‘5’ 투 페어였다.
합쳐서 소위 풀 하우스라 불리는 제법 높은 패였지만, 포카드한테는 어림도 없었다.
“…여유들이 넘치시는군.”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르반이 이내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저들 둘에 자신까지.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24인 중 무려 셋이 모였는데도, 약소국의 국경 하나 뚫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두 사내가 있었다.
물론 르반은 이제 둘의 정체를 확실하게 인지했다.
“에이스 디 파르마. 그리고… 제노스 델 카이클.”
전자(前者)는 예상 범위 내였으나, 후자(後者)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고작 스물도 채 되지 않은 애송이.
허나, 녀석은 테라의 어지간한 마법사들보다 훨씬 강했다.
저 혼자서 빙결의 마탑주와 뇌전의 마탑주 둘을 무리 없이 상대할 정도였으니까.
한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들은 아직도 카드 게임 따위에나 열중이다.
“이제 그만들 하지.”
“안개 아저씨, 잠깐만 기다려 봐. 이번에는 꼭 이 아줌마의 주머니를 털어먹을 수 있을 것 같거든?”
“방금 얘기 못 들었나? 황자 전하께서 친히 남하하고 계신다.”
“그거 잘됐네. 이제 이쪽에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길 것 아냐?”
콰앙!
성큼 다가선 르반이 더는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후려쳤다.
후두둑!
쌓여 있던 카드들이 펄럭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 속, 르반이 차가운 목소리로 되묻는다.
“전쟁이 장난 같나?”
“…씨부럴, 괜히 우리한테 화풀이여. 자기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하는걸.”
“뭐라?”
“막말로, 지금 이게 우리 탓이야? 공간을 만들어줘야 큰 거 한 방을 준비하든 말든 할 텐데, 당장 아저씨부터가 그 바람난 변태 하나를 확실하게 꺾지 못하고 있잖아.”
“이놈이 뚫린 입이라고 감히…!”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이 정도면 세간의 평도 잘못된 거 아닌가? 듣기로, 에이스 디 파르마는 십이월 중에서도 하위권이라던데. 르반, 당신은 못 해도 중위권으로 평가받고 있잖아?”
순간, 지면에서 ‘뭉클’ 희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방 내부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기현상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원인은 명확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입을 놀리면… 베겠다.”
파지지직!
르반의 험악한 기세에, 벌떡 자리를 박찬 엑스토나 제우스가 하얗게 미소 지었다.
양손으로는 무시무시한 스파크까지 튀겨대면서.
“한번 해보시던가.”
“끝까지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구나!”
쩌저저저저저적!
허나, 결과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다.
“……!”
웬 거대한 빙벽(氷壁)이 순식간에 둘 사이를 가로막았기에.
“뭣들 하는 거예요? 지금이 아군끼리 싸울 땐가요?”
“가만있어 봐, 얼음 아줌마. 저 안개 칼잡이 놈이 자꾸 사람 성질 건드리잖아.”
“너도 그만해. 자꾸 그러면, 블레어 마탑주님에게 따로 보고드릴 테니까.”
움찔.
그 십이월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던 엑스토나 제우스가, 거짓말처럼 표정을 굳혔다.
“르반 경, 당신도 이쯤 하세요. 최선은 아니라도 최악은 피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하지.”
곧 르반도 순순히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짤막하게 한숨을 내쉰 에르사가 가볍게 손짓하자,
파창창!
그제야 빙벽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차라리 이대로 장기전을 준비하죠.”
“…장기전?”
“황자 전하의 남하 소식은 우리보다 저들이 더 당황스러울 거예요. 그걸 이용해 시간차를 두고 천천히 국경 양쪽에서 몰아치면, 어떤 방식으로든 빈틈을 드러내겠죠. 필연적으로 병력의 분산도 있을 수밖에 없구요.”
“저들이 이곳을 포기하고 북부로 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20만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상, 이 상황을 유지하고 있을 수도 없을 거예요. 왕성이 함락당하면 모든 게 끝이니까.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뜻이죠.”
일리가 있었다.
테라 왕국의 추정 병력은 다 해도 20만을 넘기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이곳을 포기하고, 왕성을 중심으로 병력을 재편성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선택과 집중.
그걸 적들이라고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여기 세 사람조차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르, 르반 공작 각하!”
“……?”
지금 막 내부로 들어선 또 다른 전령의 존재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급변했다.
“바, 방금 본 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만….”
“본 군? 황자 전하의 군대 말이냐?”
“예. 조금… 아니, 상당히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라니?”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전령이 이내 힘겹게 말을 잇는다.
“기, 길이 막혔답니다.”
“길이 막혔다니?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겠느냐?”
“그게 그러니까, 테라의 북부를 관통하는 마그릭 협곡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답니다.”
“……!”
직후, 르반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엑스토나 제우스가 잽싸게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만. 전령 아저씨, 협곡이 사라졌다니? 그게 뭔 소리야? 즉,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났다. 이 말이야?”
마그릭 협곡은 테라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도 유명했다.
직경 수백 미터의 깎아 내지르는 듯한 절벽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그곳은, 평화기에는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관광지로까지 여겨졌으니까.
특히나 일몰 때의 절경은 자존심 드높기로 유명한 제국인들도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울 정도였다.
한데, 그런 마그릭 협곡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오랜 기간, 온갖 지진 등의 대재해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곳이?
“…진짜로 대지진이라도 발생했다는 말이냐?”
멍하니 굳어 있던 르반이 물었다.
“지, 지진은 아닙니다.”
“하면?”
“지금 본 군에서도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자연재해 쪽보다는, 인위적인 흔적이 짙다고 합니다.”
“인위적? 사람의 짓이란 말이냐?”
“네. ‘마법’입니다.”
“……!”
이번만큼은 냉철하기로 소문난 에르사조차 두 눈을 부릅떴다.
그만한 역사적 산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 마법이라고?
그게 사실이라면…
“…미친.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에르사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마법 한 방으로 마그릭 협곡을 무너뜨릴 수 있냐고 묻는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저을 테니까.
그건 블레어 마탑주님 정도는 되어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다.
즉,
“…최소 7써클 이상의 마법사!”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다시 조금의 과거로 돌아가, 테라의 북부.
“테라에서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지?”
“그 카이클 공작이 직접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적의 사나이인가.”
새하얀 백마 위에 탄 스노비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봤자, 인간.
기적이니 뭐니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황자 전하. 한데, 정말로 이만한 전력까지 필요가 있겠습니까?”
“…….”
그제야 스노비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핵심 전력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면면 하나하나가 역대급으로 화려한.
선두의 사내는 파랑의 검사 웨이브로 공작이었고.
그 바로 뒤로, 최초 게르힘으로 향했던 폭발의 검사 파르만 공작과 광휘의 검사 라포르테 공작까지.
그뿐인가?
소환의 마탑주 레이나 더글린.
조합의 마탑주 간다르 테이들러.
바쁜 블레어 마탑주를 대신해, 그의 직계 제자인 프레이 던 마그마르까지 함께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치유의 마탑주 스실라. 정신의 마탑주 저스틴 브레이너.”
최후미, 한껏 표정을 굳히고 있는 두 남녀를 보며 스노비가 활짝 미소 지었다.
불가항력으로 이번 전쟁에 참여한 둘이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저들 휘하 마법사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겁박했으니까.
다만, 당근과 채찍은 확실히 했다.
만약 테라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다면, 절대로 그들은 건드리지 않기로.
“스실라, 참으로 든든하오. 혹 내가 다치더라도 그대가 치료해 줄 테니 말이오.”
“…….”
명백한 조롱에 스실라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스노비는 이런 반응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촤아아아악!
순간, 작은 비수 하나를 꺼내든 스노비가 제 손가락 끝을 베어냈다.
“화, 황자 전하. 무슨 짓을…!”
“이리 와서 치료 좀 해주시오, 치유의 마탑주.”
“……!”
대경해 다가서려던 일부 호위 기사들이 멈칫했다.
“내 명에 따르지 않겠다면, 지금이라도 그대 휘하 마법사들을 몰살시키라 명하겠소.”
“…….”
콰득, 입술을 깨문 스실라가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새 스노비의 코앞까지.
싱글거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향해 마나를 끌어올리려는 순간,
“뭘 이만한 일에 마나까지 쓰려고 그러시는지? 침만 발라도 나을 상처인데.”
“무슨…?”
“그냥 혀로 핥아나 달라는 뜻이오.”
“……!”
스실라가 굴욕감에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신분과는 별개로, 적어도 표면상 나이가 곱절은 더 차이 나는 둘이었으니까.
아들 뻘도 되지 않은 사내의 손가락을 빨라니.
“왜, 못하겠소?”
“…하겠어요.”
스노비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입술 사이로 내밀어지는 새빨간 혀를 본 직후였다.
마그릭 협곡이라는 절경을 코앞에 두고 만끽하는 미녀의 애무.
기분이 가히 나쁘지 않았다.
한데…
쿠구구구구구구!
“……?”
바로 그때, 지면에서 웬 땅울림이 느껴졌다.
그것은 점차 전체로 번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의 모두가 동요할 정도로.
“지, 지진?”
“혀, 협곡이 흔들린다아아아!”
“뭣…!?”
움찔 몸을 떤 스노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잘 있던 협곡이 갑자기 흔들린다니?
“이게 대체 뭔…?”
그 순간, 스노비는 웬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이 기운은…….”
곧 스노비의 두 시선이 빠르게 하늘 위를 향했다.
저 멀리, 까마득한 상공 위.
햇빛 탓에 눈이 부셨지만, 적어도 그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꿈에서라도 찾기를 바라마지 않던, 연녹의 머리통.
그 녀석이었다.
“세타 쿤 이그니스…!”
콰콰콰콰콰쾅!
중얼거림과 동시에, 협곡이 천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온갖 대지진에도 수천 년 간 자리를 지켜온, 그 천혜의 절경이.
이리되면 단기간에 북부 돌파는 요원해진다.
“이놈… 당장 멈추지 못하겠느냐?”
스노비는 당장이라도 본신의 힘을 풀어 녀석에게 쏘아져 가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았으니까.
그렇기에…
“저, 전하!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네이노오오오오오오옴!”
지금으로서는 이리 윽박지르는 것이 전부였다.
***
한편, 고도 수백 미터 위의 상공.
“깔끔하네요.”
희뿌연 흙먼지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두 절벽을 보며, 내가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어느새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다만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은, 금세 그 열기를 식혀줬다.
“…네 녀석은 보면 볼수록 흥미롭군. 대체 그런 마법 조합은 어디서 배운 거지?”
“말씀드렸잖아요. 제 머릿속에 아이리스의 지식이 들어 있다고.”
“…아이리스…….”
찰나 멈칫한 순백의 여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의 지식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래서, 제 제안은 받아들이시는 거죠?”
“…….”
이리나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겨갔다.
희뿌연 흙먼지 속, 사람들 틈에서 발 빠르게 물러나는 두 인영이 용케 시야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저 둘만 옮겨주면 된다는 뜻이지?”
“네.”
“…약속은 지켜야 할 거다.”
“뭐, 빌려주는 것 정도라면야. 대신, 분해하거나 특별한 조작을 가하는 건 절대로 안 돼요.”
“그야 물론이지.”
직후, 이리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번 일에 대한 대가로, 나는 그녀에게 내 목걸이를 하루 동안 빌려주기로 했다.
사실 나도 목걸이의 비밀이 궁금하기도 했고.
특히 내 정체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었으니까.
나는 인간 세타 쿤 이그니스인가?
그도 아니면 드래곤 아이리스인가?
만약 동일한 혼에 육신만 다른 것이라면, 앞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최소한 목걸이의 비밀을 완전히 알게 된다면, 약간의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것보다…….”
힐끗, 다시금 내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어느새 시선이 미친 두 인영이 새하얀 빛에 휩싸이고 있었다.
저만한 위인들조차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양새가 일견 우습기도 했다.
‘…아니, 당연한 건가?’
일단은 드래곤의 힘이니까.
각설하고, 덕분에 나는 일인군단이라고 해도 부족할 귀중한 전력.
무려 두 ‘마탑주’를, 아군으로 합류시킬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