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백룡(3)
한편, 공국의 왕성 2층 테라스.
수백 평 크기의 연무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두 여인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거 같아?”
시작은 유리나였다.
“뭐가?”
“저 여자, 세타랑 무슨 사이 같냐고.”
“무슨 사이 같냐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척 보기에도 보통 분위기가 아니었잖냐. 그게 어디 처음 보는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기류냐고. 그 인간 같지 않은 외모는 또 어떻고?”
“…글쎄.”
잠시 턱을 괸 채 고민하던 루나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답답했다.
저 이리나라는 여인의 존재는 그만큼이나 루나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짐작컨대, 그건 비단 여인으로서의 감정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떠나기 전에 한번 캐볼까?”
“뭐?”
“스란과의 협정을 마무리 짓는 대로 떠날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제법 걸릴 거 아냐? 나라 간의 약속이 그리 간단한 문제도 아니고, 당장 사라진 공왕을 대신해서 대표부터 선출해야 하는 상황인데. 아마 빨라도 며칠은 더 걸리겠지.”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니까 함 캐보자고.”
순간 유리나가 저 멀리, 새하얀 머리통을 노려봤다.
루나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보면 볼수록 묘한 여인이었다.
극상의 미(美)를 자랑하는 외모는 별론으로 하고서라도.
지금껏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극도의 이질감이란…
“……!”
일순 루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너무 빤히 쳐다봤기 때문일까?
직후, 예의 새하얀 두 동공이 귀신같이 이쪽을 향했다.
“음…….”
한차례 침음을 삼킨 루나가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회피했다.
역시 저 여인은 이상하다.
부르르.
…아니, 위험했다.
***
“……?”
찰나, 고개를 갸웃한 여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두 인간 암컷들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허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지금은 저런 것들에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화이트 드래곤(White Dragon).
더 정확히는, 당대에 이르러 딱 두 개체만 살아남은 백의 일족 중 하나인 이리나는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냄새도, 외모도, 심지어 하는 행동까지도.
모두 그녀가 기억하는 그대로인 한 존재를 만났다.
아니, 딱 하나 다른 점은 있었다.
육신만큼은 일족이 아닌 ‘인간’임이 분명한 최초의 망룡.
여기서 최초란, 일족의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된 ‘유체 탈출’ 사태 전후 시점을 말했다.
“…….”
예의 연녹의 뒷통수를, 이리나는 다시금 ‘찌리리’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와의 첫 만남은 아마 2천 년도 훨씬 더 전이었을 것이다.
정확히는, 그녀가 해츨링에서 막 성룡으로 탈피하려던 무렵.
당시에는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미친 족속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버러지들.
결국 그들은 모두 일족의 손에 나라가 멸망하는 운명을 맞이했지만.
아무리 대응이 빨랐어도 약간의 피해는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자기밖에 모르는 드래곤들은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으니까.
예의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타겟이 된 해츨링은 도합 셋.
둘은 죽었고, 오직 이리나 자신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랜드 마스터니, 8써클 아크메이지니…
성룡만 되어도 아무것도 아닐 별별 같잖은 인간들이 다 모여들었다.
물론 그때의 이리나에게는 힘이 없었고.
그 버러지들의 같잖은 손에 목숨을 잃는 치욕을 당하려는 순간, 어느 ‘바람’의 일족에게 구해졌다.
“…….”
그때의 생각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졌다.
마치 인간이나 느낄 법한, 그런 감정이었다.
대체 눈앞에 있는 저것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할까?
‘인간? 그도 아님…….’
생각을 멈췄다.
분명한 것은, 바람의 일족 ‘아이리스’는 그녀에게도 무척이나 특별한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
흠칫.
덮쳐 오는 과거의 향수(鄕愁) 속, 이리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때마침 ‘그’와 시선이 마주쳤기에.
“뭐, 뭐지?”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만 말고, 와서 이 사람들 마법이나 한번 봐주시죠?”
“…….”
상대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리나가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잠시 후 ‘어이없음’이란 네 글자를 얼굴 가득 떠올리곤 앞으로 나아갔다.
“아까부터 뭘 하는 거냐?”
“보면 몰라요? 마법 가르치고 있잖아요.”
수백 평에 이르는 널따란 연무장이었다.
그 중심으로 일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만 이리나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이 버러지들에게?”
“……!”
그녀의 조소에, 대번에 선두의 사내가 발끈한 표정을 짓는다.
“세타 님. 대체 저 입버릇 고약한 여인은 누구입니까?”
“음… 아직 누구라고 설명해 드리긴 애매한데, 암튼 저따위보다는 훨씬 뛰어난 마법사요?”
“예? 말씀해 주기 싫으시면 그냥 그리하실 것이지… 그런 질 나쁜 농담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세타 님은 제가 본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마법사시니까요.”
“뭐, 젤다 경 말대로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예?”
“한 가지 분명한 건, 경들은 지금 인생에 다시없을 행운을 맞닥뜨렸다는 사실이에요. 부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대체 그게 무슨…….”
“단적인 예로, 어제 철의 기사라 불리는 엑스톤 경이 여기 여성 분을 대하는 태도는 다들 이미 보셨지 않나요?”
“아, 그건 진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마치 뱀 앞에 놓인 개구리라고 해야 할까요? 십이월의 그런 약한 모습은 단언컨대 처음 봤습니다.”
“사람이 하는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죠.”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이리나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보시오! 세타 님이 하신 말씀도 있고 하여 그냥 참으려고 했습니다만, 입조심 좀 해주시오. 나는 이 나라 국민도 아닐뿐더러, 윗사람의 눈치 따위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니까.”
“하?”
“세타 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마도 스란에서 제법 위치가 대단한 레이디이신 모양이지요? 허나, 마법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분 같은데…….”
빠직.
다시 한번 이리나의 이마 위로 선명한 십자 마크가 아로새겨졌다.
“자, 잠깐만요, 젤다 경.”
“아니요. 세타 님이야말로 잠시만 물러서 계시지요.”
“아니, 후회할 짓 하지 마시고…….”
기어이 성큼 나선 젤다가 턱을 치켜들었다.
이리나가 애써 웃는 낯으로 그 시선을 받아낸다.
“계속 지껄여 봐. 내가 왜 마법을 쥐뿔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흥. 그야 간단한 얘기지. 마법사들은 써클에서 뿜어져 나오는 특유의 기운이 있는데, 레이디에게서는 그것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기사처럼 보이지도 않고.”
“네 알량한 지식으로 나를 평가하지 말아줄래? 진심으로 기분 나쁘니까.”
“누가 할 소리를! 결과적으로, ‘아는 척’ 좀 하고 싶은 스란의 공주님쯤 되시는 것 같은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란 뜻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듣자 듣자 하니까 이 버러지 놈이…!”
더는 참지 못하고 이라나가 기세를 내뿜었다.
아니, 내뿜으려고 했다.
- 잠깐잠깐. 뭘 버러지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그리 발끈하시는 건데요? 지고한 존재답지 않게.
- 저놈은 나를 모욕했다. 혹시나 말릴 생각이라면…….
- 그럼 저와의 약속은요? 혹시 잊으신 건 아니죠? 따라오는 대신, 절대로 제 주변을 포함한 인간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으시기로.
- …….
그제야 이리나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드래곤은 자신이 내뱉은 말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했으니까.
더군다나, 저런 버러지들 때문에 신뢰를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이 세타라는 인간의 존재를 낱낱이 분석하기 전까지는.
- 그리 억울하시면, 당신의 위대함을 아주 조금만 드러내도 충분하잖아요.
- …뭐?
- 저게 다들 이리나 님의 진짜 실력을 몰라서 하는 소리니까요. 인간의 미개함을 일깨워 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데요.
-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짓을…….
-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따위 무능한 취급이나 당하고 계시던가요. 평소 무시해 마지않던 ‘버러지’들에게.
- ……!
재차 들려오는 메시지 마법에 이리나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인간.”
“허 참, 아무리 높으신 분이라지만, 고작 딸뻘밖에 안 되는 아가씨가 호칭이…….”
“지금부터 내 위대함을 보여주겠다. 잘 보고 느끼도록.”
우우우웅!
찰나, 대기가 급격하게 떨어 울렸다.
이리나의 마나에 주변이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뭣…!?”
그 현상에, 인간들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음은 당연했다.
마나에 환경이 반응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내면에서 솟구치는 묘한 쾌감 속, 이리나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작 이만한 마나에도 놀라 나자빠지는 버러지들 주제에…
“흥.”
이라나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허나, 그녀는 감히 짐작이나 할까?
“쉽네, 쉬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그녀는 누군가의 완벽한 호구가 되었음을.
***
상황을 지켜만 보던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나와 함께해 준 마법사들을 상대로, 약속을 이행하는 첫 번째 날이었다.
사지로 동행하는 대가로, 마법을 가르쳐 주는 예의 실비아가 멋대로 한 그 약속 말이다.
“7, 7써클… 아, 아니. 이 정도면 최소 8써클…!”
젤다의 경악 가득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뒤늦게 헛숨을 들이켜기 바빴다.
‘내가 아무리 천재로 알려졌어도, 7써클 마법사와 최소 8써클로 추정되는 마법사를 두고 스승을 고르라고 하면… 열에 열 후자를 택하겠지.’
그야말로 완벽한 큰 그림이었다.
나조차 절로 감탄이 새어 나올 정도로.
“왜? 계속 한번 지껄여 보시지, 버러지야.”
“그, 그, 그런…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호호호! 표정 한번 볼만하구나. 아까 뭐라고 했더라?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그리 말했던가?”
“죄, 죄, 죄송합니다! 설마하니 이만한 대마법사셨을 줄은…!”
아예 제자리에 무릎까지 꿇는 젤다였다.
그보다, 이후에 있을 상황도 모르고 으스대는 저 표정이란.
지금부터 사람들이 마법 좀 가르쳐 달라고 줄기차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텐데 말이지.
물론, 나와의 약속 때문에라도 그녀는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테고.
암, 내 곁에 머물려면 그 정도 수고는 감수해 줘야지.
‘…그보다…….’
일순, 눈앞의 연무장을 시야에서 지워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정비를 마치고 곧장 자이툰으로 합류해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우선 연합으로 돌아가 스란의 상황부터 알려야 하는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세, 세타 군! 큰일 났네!”
“……?”
만약 지금 막 철의 기사가 내게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어떤 쪽으로든 결론을 내렸을 터인데.
“엑스톤 경, 협정 얘기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그, 그게 문제가 아니네. 혹, 소식 못 들었는가?”
“예?”
“지금 막, 테라의 북부 국경이 뚫렸다고 하네. 아직 우리 상황을 모르는 제국에서 직접 알려온 소식이야.”
“……!”
대번에 내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방금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하, 하면 제국군이 테라부터 치고 들어오고 있다는 뜻인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한데, 그 면면이 좀 믿기지가 않아서…….”
“가감 없이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판을 더 냉철하게 분석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내 물음에 엑스톤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한데, 다음으로 이어진 말이 내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내용이었다.
“병력은 약 20만. 무려 2황자가 직접 십이월 셋과 마탑주 다섯을 이끌고, 테라를 함락시킬 것이라는 전언(傳言)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