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백룡(1)
“크으으으….”
국왕(國王) 직속 기사단의 부단장.
명실상부 왕실의 2인자인 파르테인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육신의 고통과 더불어 정신적 충격도 상당한 그였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그의 상관인 공국의 자랑이, 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
“끝까지… 잘못된 길을 걸으시겠다는 건가…!”
강철의 기사는 여전히 이쪽을 등진 채 고고히 서 있었다.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이다.
적에게 등을 보이다니!
허나, 달리 근거 있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그 무지막지한 돌진에 맞춰 검을 휘둘러 봤지만, 고작 겉면에 흠집을 내는 것이 전부였기에.
철의 무장.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실로 대단한 비기였다.
“끄으으… 괘, 괜찮으십니까, 부단장님?”
그때, 다른 기사들도 분분히 몸을 일으켰다.
파르테인이 애써 목소리에 힘을 담아 외쳤다.
“부상자는?”
“작은 경상자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아마 단장님께서 손속에 사정을….”
“지금은 단장님이 아니다! 폐하와 우리 왕국을 위협하는 변절자일 뿐.”
“하, 하지만 부단장님. 저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지금에 와서 단장님이 이러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직접 물어보면 알 테지.”
파르테인이 손안의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고작 십여 미터.
단련된 기사의 육신이라면,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닿을 거리였다.
마침, 상대는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하니…
‘…가만, 근데 어딜 보고 있는 거지?’
“저, 저길 보십시오!”
직후, 파르테인은 상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등 뒤의 부하가 경악한 표정으로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저, 저기… 다, 단장님 앞에!”
“……?”
부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예의 단단하기 그지없는 무장 너머.
끝없이 펼쳐진 대전의 끝.
“허억! 폐, 폐하!”
그곳에 반드시 지켜내야 할 폐하께서 계셨다.
죽은 듯 쓰러진 기사들의 육신을 즈려 밟으며.
온몸으로는 무지막지한 기운까지 발산하면서.
쿠구구구구구구구!
그 기운에, 대기가 연이어 터져 나갔다.
어둠보다도 더 짙은 흑색(黑色)의 기운은 삽시간에 주변을 잠식했다.
인근에 널브러진 기사들의 시신뿐만이 아니라, 어느새 대전에 자리한 공국의 수배자와 단장님의 신형까지도.
“대체 이게 무슨…!”
의문을 토할 새도 없었다.
부지불식간, 결코 어울리지 않는 둘.
수배자와 그의 우상이 아군이 되었으니까.
파르테인이 보기에도 명백히 정상이 아닌 폐하를 상대로, 둘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맞서 싸웠다.
쩡! 쩌저저정! 콰아아아앙!
기막힌 장관이 펼쳐졌다.
그야말로 공수의 완벽한 조화였다.
철의 무장을 두른 우상이 선봉에 서 예의 새까만 기운들을 막아간다.
고위 마법사임이 분명한 수배자는 뒤에서 확실하게 서포트를 자처했다.
한 손으로는 갖가지 보조 마법을 걸어주는 한편.
남은 손으로는 빠르게 허공에 수인을 맺어가면서.
불, 번개, 바람, 빛.
그 손짓에,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속성을 가진 마법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었다.
“저런 미친…!”
파르테인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처음에는 더블이나 기껏해야 트리플 캐스터인 줄로만 알았건만.
어린 수배자는 쿼드, 그 이상의 신위를 선보이고 있었다.
마치 현 마법 체계의 개념은 자신에게 통용되지 않는다는 양.
“부, 부단장님. 저희는 저런 괴물을 상대하려고 했던 겁니까?”
휘하 단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허나, 파르테인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이미 그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그럼 단장님은 저걸 모두 다 아시고…?”
“저, 저희도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런 괴물을 폐하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런 대화가 오가고 있을 때였다.
“쓸데없는 생각들 하지 말고, 모두 몸을 물려!”
“……!”
일순, 이곳에 모인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이번에는 내 명에 따르겠지? 항명하기만 해봐. 기운들이 넘친다는 뜻으로 알고, 아주 그냥 다 죽여 버릴 테니깐. 몇 달 밤낮으로 휴식 없이 굴릴 거다!”
“하, 하지만 단장님…!”
거력(巨力)이 담긴 촉수들은 연신 우상의 육신을 노려댔다.
그 속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마스터인 단장님조차 완벽히 피해내지 못했다.
강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철의 무장은, 한 번의 타격에 움푹움푹 파여 들어갔다.
어느새 단장님의 입가로 새빨간 핏물까지 내비칠 정도로.
“거기, 단장님은 제가 확실하게 책임질 테니까, 부탁 하나만 합시다!”
“……!”
“이거!”
순간, 눈앞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쏘아져 왔다.
타악!
그걸 낚아챈 파르테인은 곧,
“……!”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란 철제 막대기 위에 걸려 있는 널따란 천.
그 위로 꽤나 익숙한 왕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기에.
“이건… 테라의 국기?”
“지금 당장 성 위쪽에 그걸 걸어줘요. 제 동료들이 당신네 공국 병들에게 공격받고 있거든요.”
“……!”
“아예 밖으로 나가서 싸움을 말려주면 더 고맙겠고요!”
어린 수배자가 재차 외쳤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전 내에 자리한 저 시신들이 그 증거다.
“아, 알겠다!”
하여, 짧게 대꾸한 파르테인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분위기가 상당히 이상해졌다.
일생의 우상인 직속상관에게도 항명했건만, 일개 수배자의 명에는 따르는 셈이었으니까.
다만,
“다들 이곳을 탈출한다! 우리 가족들이 있는 삶의 터전이, 전쟁의 중심지가 되는 일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할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끝나게 되면, 저 아이는 더 이상 수배자가 아닌 공국의 ‘영웅’이 되어 있을 터였다.
***
“옆에! 옆에 촉수 날아오잖아요! 빨리 막아요!”
투-쾅!
목소리와 동시에 한줄기 흑색 선이 날아들었다.
“뒤에 촉수! 촉수우우우우! 뭐 하는 거야!? 정신 제대로 안 차려요?”
꽈아아아앙!
뒤이어, 빠르게 몸을 띄우자 또 다른 흑선이 지면을 할퀸다.
허나, 그 즉시 무수한 흑선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이런…!”
화르륵! 쩌저저저저적!
그 즉시, 다색(多色)의 마법들이 예의 흑선들을 막아냈다.
“아니, 거 참 답답하네! 몸을 띄우면 빈틈투성이가 되잖아!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익…!”
순간, 엑스톤의 이마 위로 선명한 힘줄이 도드라졌다.
상황이 급박하다지만, 어린놈이 자꾸만 반말이다.
혼자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괴물이라는 사실은 통감했기에, 마지못해 듣고는 있다만…
엑스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홱,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러는 넌 뭐 하냐? 자꾸 실속 없는 견제성 마법들만 날리지 말고, 확실한 한 방을 쏴보라고! 저 인간, 간지러워하지도 않잖냐?”
“아니 뭐, 기회라도 주고 그런 말을 하시던가요.”
“뭐가? 앞에서 열심히 막아주고 있잖냐!”
그 와중에도, 촉수들은 두 사람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름드리 고목만 한 흑선이 주변을 할퀼 때마다 대리석이며 벽면들이 움푹움푹 파여 들어갔다.
그 힘이 얼마나 엄청난지, 몇 번 더 지면을 내리치면 바닥 전체가 무너질 기세였다.
“…설마 그걸 노리는 건가?”
직후, 엑스톤이 떨리는 시선으로 왕좌를 바라봤다.
폐하…
아니지, 악마임이 분명한 놈은 입가 가득 여유로운 미소를 베어 물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을 완전히 즐기는 모양새였다.
“머리 위에 저 검은 기둥 보이시죠? 천장을 뚫고 하늘까지 이어진 빛무리 말이에요.”
“그게 왜?”
“저게 사라지기 전에 놈을 처리해야 해요. 저 검은 기둥이, ‘현현화’를 위한 준비 과정이니까.”
“혀, 현현화?”
“쉽게 말해서, 마계에 있는 육신을 이쪽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드래곤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이만한 마족이 중간계에 강림하려 하면, 이미 옛적에 나서서 처리해 주곤 했는데….”
“그, 그러니까. 저게 진짜 마족이라는 뜻이냐?”
“네. 그것도 상위 1퍼센트라는 상급 마족이요.”
“이런 미친…!”
엑스톤은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이 어떤 존재던가?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오랜 옛날.
지금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인마(人魔) 전쟁 당시의 마스터들조차 하급 마족 하나를 제대로 상대하기 힘들었다고 들었다.
극소수인 중급 마족은 열에 열, 마스터조차 손도 쓰지 못하고 당했다고.
인간 중 가장 강하다는 마스터가 그러할진대,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드래곤들이 직접 개입했고.
결국 용마(龍魔)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대륙 전체 인구의 30퍼센트가 소멸한 그때의 상처는, 지금까지도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이제 어쩌냐?”
“뭘 어째요. 죽을힘을 다해 막아내야지.”
“상급 마족이라며! 우리 둘이서 되겠냐고.”
“아, 진짜 이미지 깨네. 그럼 뭐, 이대로 국민들이 다 죽도록 내버려 둘 거예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부딪혀 봐야죠.”
“이런 제길!”
엑스톤이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주변 가득 휘몰아치는 마기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아버지, 정녕 이토록이나 저를 빨리 곁으로 부르시는 건지요.
저는 아직 환갑도 살지 못했건만…!
“조금만 버텨주세요.”
“…응?”
“말씀대로, 큰 거 한 방 준비할 테니까요.”
“……!”
그 순간, 주변의 마기에도 꿀리지 않는 농도 짙은 마나가 느껴졌다.
다름 아닌, 눈앞에 있는 녀석에게서.
적일 때는 그렇게나 골치 아프더니, 아군이 되자 이 이상 든든할 수가 없었다.
“딱 1분. 그 정돈 버틸 수 있으시겠죠?”
“음…….”
잠시 침음을 삼키던 엑스톤이 이내 제 가슴을 탕탕 두들겼다.
그래도 십이월 존심이 있지.
자신보다 3분의 1도 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온 핏덩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야 없지 않겠나?
“나, 나한테 맡겨라.”
엑스톤이 짐짓 호기롭게 외쳤다.
물론, 그럼에도 더듬거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
우웅! 우우웅!
“후우…….”
내면에서 들려오는 공명음 속,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이어갔다.
알게 모르게 긴장도 됐다.
본체 대부분의 힘을 끌어온 마족을 상대하는 건, 마기에 익숙한 나조차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그러니까,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내 몸 안에 있는 것은 색욕과 식탐… 이 두 가지 힘을, 반 헬리오스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려 마왕이 가진 힘의 근원일진데.
더욱이, 색욕의 이능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까지 하지 않았던가.
단순 추측으로는, 아마 마기가 아닌 마나를 기본으로 힘을 사용했기 때문인 듯한데.
식탐이나 색욕의 ‘진짜’ 힘을 끌어내면 대번에 눈치챌 것이다.
물론 내게는 반드시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직 본체는 마계에 있는 놈이니까.
죄악의 일부가 내게 있다는 소문이 마계에 퍼지기라도 하면.
아마 당장에 무수한 마족들이 목숨을 걸고 이쪽으로 넘어오려 들 테니까.
이 힘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본체가 완전히 현현하기 전에 7써클 마법을 정통으로 맞으면, 제아무리 상급 마족이라도 무사할 리가 없어.’
그중에서도 극 상성인 빛.
그걸로 단숨에 소멸시킬 작정이었다.
우웅! 우우우웅!
대해와도 같은 마나가 꿈틀거린다.
써클이 요동친다.
거대한 기운을 느꼈는지, 반 헬리오스의 시선도 곧장 이쪽으로 향했다.
쾅! 투콰아아아앙!
“……!”
그 순간, 강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철의 기사가 저만치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쿨럭!”
…1분은 무슨.
고작 10초도 버티지 못 하는구만.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 와중에도 내 마나는 점차 크기를 불려가고 있었다.
두둥실.
“제법 재미있는 짓을 하려는가 보구나.”
마침내 왕좌에서 몸을 띄운 반 헬리오스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새빨간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으며.
그 모양새가 꼭, 아주 맛있는 음식이라도 보는 느낌이다.
“아주 속이 타들어가고 있을 테지? 계획은 실패했고, 이제 내 손에 심장이 꺼내어질 일만 남았으니.”
반 헬리오스가 참지 못하고 ‘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허나, 이미 캐스팅을 시전한 이상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불완전한 상태로 마법을 쏘아 보내야 할까?
그도 아니면…
“너는 내 친히 통째로 삼켜주겠….”
퍼엉!
“……?”
퍼엉?
순간, 내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갑작스레 다가오던 반 헬리오스의 머리통이 잘 익은 수박처럼 터져 나갔기에.
“뭔…?”
내 얼굴이 순간적으로 멍청하게 변했다.
어느새 예의 흑색의 기둥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지만, 어디서 마계의 쓰레기가 중간계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는 거야?”
“……!”
직후, 뻥 뚫린 천장 사이로 웬 인영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새하얀 머리칼에 백안(白眼)을 가진, 무척이나 아름다운 절세의 미녀였다.
한데, 왜일까?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나는 그녀를 알 것만 같은가?
“…가만, 너는…?”
바로 그때, 예의 현기로 가득한 두 눈이 내 쪽을 향했다.
곧, 그 동공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