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스란에 테라의 깃발을(3)
“…….”
철의 기사.
달리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12인의 검사, 엑스톤 폴 다우니스가 내 앞에 서 있었다.
128개에 이르는 검은 이미 모두 소멸했고, 오히려 상황은 역전돼 내 무수한 마력 검들이 자신을 겨누고 있건만.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진짜는 이 철의 무장(武裝)이니까.”
“물론 그러시겠죠. 괜히 철벽의 기사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계시겠어요?”
“장난은 끝이다.”
이윽고 부동(不動)의 검이 내 쪽을 향했다.
솔직히 저쪽에서 작정하고 덤벼들면 결과는 나라도 예측할 수 없었다.
물론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어디 하나 부러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적진 한복판으로 파고든 내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하나만 여쭙죠.”
“……?”
“작금의 공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무슨 뜻이냐?”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녕 스란은 제국의 속국이 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
“그냥, 줄곧 궁금했습니다. 그간 제국의 영향력에서 그토록 벗어나려고 애썼던 스란이, 스스로 속국을 자처하는 듯한 그 행보가요.”
대답은 없었다.
그는 그저 곧추세운 검에 더욱 제 마나를 불어넣을 뿐이었다.
“검에는 생각이 없다. 나는 기사이고, 단지 폐하의 명만 받들 뿐이다.”
“기사의 충의(忠義)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역사상 수없이 많은 폭군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겁니다.”
“뭐라고…?”
“정신이 미쳤으면 고칠 생각을 해야지요. 당신이 믿고 의지하는 주군이, 실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일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이 이상 폐하를 모욕하지 마라. 참는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하면, 어찌 그리 확신하시는지요? 당장 흑마법만 해도 사람들이 모르는 무수한 효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제가 가진 이동의 이능은, 같은 마법사들도 경악해 마지않는 개념의 능력이고요.”
“네가 아무리 나를 설득하려 해봐야….”
“설득이 아닙니다. 현실이지요. 더하여, 잘못된 길이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휘리릭!
가볍게 손안의 마력 창을 휘돌려 낸 내가, 그 끝을 마주 정면으로 향했다.
“훗날 당신은 이렇게 기억되겠지요. 자랑스러운 공국의 십이월(十二月)이 아니라, 그저 눈앞의 책임에서 회피하려고만 애쓰는 겁쟁이라고.”
“죽여 달라고 노래를 부르는구나.”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결국 국민들이 국가와 정부를 원망하게 되었을 때. 당신은 그저 왕의 명령에만 따랐을 뿐이다. 그리 말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애초에 전제가 틀렸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지랄하네. 정신 좀 차리세요.”
“……!”
마지막 목소리에는 언령(言霊)의 힘을 담았다.
엑스톤이 대번에 움찔 몸을 떨었다.
“공국의 수많은 기사들이 당신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누군가 나서서 이 상황을 바로 잡아주기를 갈망합니다. 작금의 상황에서, 누가 스란의 잘못된 길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
“철의 기사. 바로 당신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당신이야말로 그나마 유일한 희망입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진 이때, 국가를 지켜낼 진정한 ‘검’ 말입니다.”
어느새 상대의 동공이 하염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저렇게 앞뒤 꽉 막힌 기사들은 이리 강하게 말해도 어차피 들은 척도 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머릿속이야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했다.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도, 자신은 그저 왕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주군을 수호하고, 제 신념을 지켜 나가는 것만이 기사로서의 참된 도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지.
허나,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틀렸다.
“엑스톤 폴 다우니스. 왕의 검이 아니라, 이 나라 공국을 위한 검이 되세요.”
“……!”
“진짜 기사라면. 특히나 기사 중의 기사라는 공국 ‘제일’이라는 칭호를 가졌다면,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라는 말입니다.”
“네놈이….”
이내 말을 마친 나는 마력 창을 더욱 강하게 불태웠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당신이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할 일이니까요.”
***
마치 하루와도 같은 5분여가 지났다.
“…감히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이윽고 엑스톤은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공국 제일의 검은 응당 그래야만 한다?
웃기는 소리다.
기사로서 충의를 지키는 일만큼 기사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파르르르르.
어느덧 마나를 한껏 머금은 검이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떨어 울렸다.
이번 한 수로 확실하게 상대를 베리라.
그리 마음먹은 참이었다.
검을 일백 수십으로 나누는 것이 아닌, 한 점에 오롯이.
손안의 검에만 기운을 집중한 채 적의 목을 벤다.
문자 그대로, 일격필살.
우웅! 우우우우웅!
대기를 울리는 공명음도 극에 달했다.
허나, 그럼에도 녀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런 대륙 혼란기에는 힘이 곧 법이다.
설령 상대의 말이 옳다고 치더라도.
그 말을 관철할 힘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전쟁은 승자의 역사니까.
쿠데타가 성공하면 ‘혁명’으로 불리나, 그 반대의 경우 ‘반역’으로 칭해지는 것처럼.
스팟!
상념을 떨친 엑스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죽어라.”
곧이어, 마나가 한데 집약된 은의 실선이 곧장 허공을 수놓았다.
노리는 곳은 명백했다.
베이면 누구도 살 수 없는 치명적인 급소.
목.
그 속도가 가히 섬전과도 같았다.
서걱!
“……!”
찰나, 엑스톤이 전율로 온몸을 떨었다.
벴다.
확실하게 베어냈다.
손안의 감촉이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놈은 역시 멍청이였다.
입만 산 무능한 머저리일 뿐이다.
내심 찝찝했던 마음 한구석이, 그 즉시 송두리째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허나…
푸욱!
“……!”
바로 다음으로 이어진 화끈한 감촉에 엑스톤은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거 저 아니에요.”
“어, 어떻게…?”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세상에는, 초인들도 모르는 능력들이 무수히도 많다고.”
“…쿨럭!”
한 박자 늦게 엑스톤이 피를 토했다.
그런 그의 옆구리를 꿰뚫고 기다란 마력 창이 삐죽이 튀어 나와 있었다.
털썩!
잠시간 버티던 엑스톤의 신형이 곧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
전투가 끝난 직후.
나는 거침없이 왕이 있는 대전으로 향했다.
“누구냐!?”
물론 가는 길에 꽤나 많은 병력들을 마주했다.
이곳은 일국의 왕궁이니까.
당장 왕실 기사단도 상시 경계를 서고 있는 견고한 요새였다.
“흠….”
잠깐 멈춰 선 나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이들 모두를 쓰러뜨려야 하나?
어차피 공국은 장차 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 거라면, 줄일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처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일단은 희망이었던 철의 기사를 포섭하는 데 실패했으니까.
…내가 그런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물… 러서라!”
“……!”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나조차 무척이나 놀랐는데, 다른 이들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다, 단장님?”
내 뒤 복도 반대편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옆구리에서 꿀렁이는 핏물을, 필사적으로 지혈까지 하면서.
“버, 벌써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확실한 치명상이었다.
한데도, 저 ‘철의 기사’는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벌써 몸을 움직이고 있었으니.
“아까 네가 했던 말…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다.”
“무슨…?”
“꼭두각시인지 아닌지, 이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말이다.”
“……!”
“물론… 방법은 있겠지?”
그제야 내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얘기해야 입 아프죠.”
다만, 모두가 그 말에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전면에 자리한 대전의 출입구.
처처처처처척!
그 앞으로 대충 봐도 50은 족히 넘을 듯한 기사들이 복도를 막아섰다.
“단장님, 물러서라니요.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들은 그대로다. 나는 너희들에게 비키라고 명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침입자를 돕다니요! 더군다나, 저 녀석은 우리 공국의 수배자인 세타 쿤 이그니스가 아닙니까? 분명 일전에 폐하의 회복 선물을 털어갔던…….”
“비키라고 말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큭!”
직후, 마스터의 전신으로 뿜어져 나오는 사나운 기세에 기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다시 한번 말하지.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따를 수 없습니다.”
“항명이냐?”
“예.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는 절대로 따를 수 없습니다. 저희는 단장님이 아니라, 폐하를 따르는 기사들이니까요.”
“…하면, 손수 쓰러뜨리는 수밖에.”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는 누구보다 단장님을 존경해 왔습니다. 아니, 지금도요! 그런 단장님이 어찌 저희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선두의 기사가 발작처럼 외쳤다.
그 순간, 엑스톤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 때문이다.”
“예…?”
“더 이상 너희들에게 부끄러운 상관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그 무슨…!”
“눈에 보이는 현실조차 외면하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엑스톤은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서 있었다.
“가라. 내 부하들은 내가 책임지고 막지.”
“…말씀은 고마운데, 저리 막고 있으면 저라도 방법이 없는데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이미 방법이 있는 것 다 아니까. 그도 아니면, 나를 떠보기라도 하는 건가?”
“에이, 설마요. 잘 알겠습니다.”
하여튼 마스터 아니랄까 봐, 눈치는 빨라 가지고.
우우웅!
직후, 곧바로 투시 마법을 시전해 낸 내가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목적지는 시선이 향하는 곳.
전면의 대전 내부를 향해 곧장 색욕의 이능을 발동시킨다.
“그럼, 뒤는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엑스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웨에에에엥!
그 즉시, 나는 허공에 생성된 새까만 아가리 안으로 몸을 집어 던졌다.
***
“…….”
공왕은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깥의 소란은 진즉에 눈치챘다.
하여, 필수 경력인 근접 호위 열을 제외하면 지금 대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머지는 의문의 침입자를 잡기 위해 모두 뛰쳐나갔으니까.
한데…
웨에에에에엥!
그런 상황에서 웬 새까만 공간이 허공에 생성되었다.
그것은 이내 하나의 인영을 내부로 토해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왕 전하.”
“…….”
얼굴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생긴 아이였다.
이제는 소년의 허물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제법 성인의 태가 나는.
“최소한의 기회는 드리겠습니다.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을 일말의 자비 말입니다.”
“무엄하다!”
촤아아아아앙!
경계하고 있던 기사 열이 당장에 검을 뽑아 들었다.
지켜보던 공왕은 가만히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목적이 무엇이냐?”
“공국의 정상화. 그것을 위한 당신의 납치입니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내가 바로 공국 그 자체이거늘… 하면, 그로 인해 네가 얻게 되는 이익은 또 무엇이냐?”
“이미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테라에서 왔습니다. 이만하면 설명이 됐을까요?”
“…충분하군.”
과연 최근 테라가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더니, 소문대로였던가.
“이미 알겠지만, 내 뒤에는 제국이 있다.”
“예. 말씀대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테라는 제국을 완전히 적으로 돌릴 생각인가?”
“황제가 정복 전쟁까지 벌인 마당에 새삼스럽네요. 결국 테라 또한 그들의 야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은 어린아이도 다 아는 사실인데요.”
“과연.”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그런 와중에도 바깥의 소란은 점차 커져만 갔다.
이제는 쇳소리가 확연히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시간을 끄실 생각이시라면, 지금부터 강제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훗. 할 수 있다면 그리해 보게.”
“못할 것 같습니까?”
“글쎄. 다만, 쉽지는 않을 걸세.”
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대번에 열의 기사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일국의 왕을 수호하는 호위들답게 수준 하나하나가 이미 옛적에 엑스퍼트에 든 실력자들이었다.
다만,
“…너희들은 나설 필요가 없느니라.”
“예?”
그런 이들조차 제물일 뿐이다.
‘각성’을 위한 ‘피의 제물’ 말이다.
콰드드드드득!
직후, 공왕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일견 끈적이면서도, 세상 그 어떤 기운보다 만족스러운 권능.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왕(王)의 힘이 아닐까?
“…뭣!?”
눈앞의 애송이가 대번에 경악하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놀랄 만도 하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힘의 정체는…
“마, 마기!?”
쩌저적! 푸우우욱!
그 순간, 지면을 뚫고 튀어나온 열 개의 새까만 촉수가 동시다발적으로 호위 기사들을 꿰뚫었다.
“…컥!”
단말마 비명과 함께, 열은 유언조차 채 남기지 못하고 절명했다.
“뭔 씹…!”
당장에 욕지거리를 내뱉는 녀석을 보며 공왕이 새빨갛게 미소 지었다.
“세타 쿤 이그니스. 무려 상위 마족의 힘을 얻은 나를 상대로, 네가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진정으로 궁금해지는구나.”
전신으로 흡수되는 열의 생기(生氣)를 만끽하며 공왕이 쾌락으로 몸을 떨었다.
마족과의 계약.
그것이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던 공왕이 회복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