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스란에 테라의 깃발을(1)
하산(下山)하는 길.
도합 일백으로 이루어진 백의의 마법 사단.
나는 그중 1개 조인 열 명을 산 중턱에 남겼다.
어디까지나, 심신이 닳을 대로 닳은 민중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기력이 다한 그들은 먹을 음식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들 테고.
뒤늦게 당도한 공국 병들에게 또다시 해코지를 당할 우려도 없지 않았으니까.
아마 이런 배려 또한, 훗날 대륙 전체로 널리 알려지게 되겠지.
“좋은 일 했더니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 야.”
물론 이런 계산적인 내 속내와는 달리.
옆에서 걷는 유리나는 얼굴 가득 몽실몽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포커페이스의 루나조차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으니…
“얌마.”
그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유리나가 홱, 내 쪽을 돌아봤다.
“엉?”
“너는 전쟁이 끝나면 뭐 할 거냐?”
“갑자기?”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아직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러는 너는?”
“나?”
“응. 여전히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계획이신가?”
“그건 전쟁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고.”
순간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전쟁이 끝나는 것과 가문을 재건하는 일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걸까?
의문은 곧장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왜?”
“왜긴 왜야. 대 전쟁 영웅이 된 유리나 님이 합류하시는데, 우리 가문도 엄청 유명해지지 않겠냐? 아마 여기저기서 서로 받아달라고 몰려들겠지.”
“…뭐, 꿈은 클수록 좋은 법이라니까.”
“이건 꿈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일이라니까 그러네. 내 진짜 꿈은 따로 있거든?”
직후, 유리나가 은근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뭐냐, 그 기분 나쁜 눈빛은?”
“뭐? 기분 나쁜 눈빛? 이게 요즘 좀 봐줬더니, 한번 죽어볼래?”
대번에 도끼눈을 치켜뜬 유리나가 ‘슉슉’ 하고 내게 쉐도우 펀치를 날렸다.
일순,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꿈이 뭔데?”
“결혼.”
“…결혼?”
“응. 애는 한 세 명 정도?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가족들끼리 알콩달콩 살아가는 게 내 꿈이야. 어제 그렇게 정했거든.”
“…….”
이내 내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나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기에.
“…음.”
뒤늦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난 심경의 변화일 테지.
나조차 부질없다고 여겼으니까.
이 전쟁은 무엇을 위한 싸움일까?
황제의 야망 때문에?
꼭 제각기 다른 인종을 하나의 울타리로 묶어둬야만, 인간은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아니.
단언하건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대륙인들은 끊임없이 서로 피를 흘리고 싸워왔다.
아주 오랫동안.
비단 황제의 제국뿐만이 아니다.
지나온 역사가 그리 말해주고 있었다.
그건,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성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뭐, 왜? 표정 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좀 의외라서.”
“의외는 무슨. 그래도 이 얼굴에 앞치마까지 두르면 제법 정숙한 귀족가 영애 태가 나지 않겠냐? 내가 마음만 먹으면, 왕국의 누구라도 단번에 꼬실 수 있거든?”
말을 마친 유리나는 웬 요상한 포즈까지 잡아댔다.
한 손은 허리춤에 척하니 올리고, 다른 한 손은 뒤통수에 가져다 붙이는.
…구태여 대꾸해 줄 가치도 없었기에 나는 곧장 시선을 돌렸다.
“루나는?”
“…나 말인가?”
“응. 전쟁이 끝나고 나면,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어?”
잠시 턱을 괸 채 고민하던 루나가 곧 대답한다.
한데, 그게 내 입장에서는 또 전혀 의외였다.
“나는… 기사단을 만들고 싶다.”
“기사단? 이미 왕실 기사단 부단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책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왕실 기사단 말고,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기사단 말이다.”
그러면서 루나는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
어째 분위기가 더 싸해졌다.
어느새 그 유리나조차 입을 다문 채 나와 루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오우, 쉿.”
조용히 뒤를 따르던 몇몇 일행들은 나직이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좋으시겠습니다.”
“…뭐라시는 거예요, 젤다 경.”
“진심입니다. 가문 휘하에 그런 기사단이라면 저도 대폭 투자하고 싶군요. 루나 경 같은 왕국 제일의 미녀가… 크흠, 아니. 검사가 이끄는 기사단이라….”
…이 아저씨, 방금 진심이 나왔다.
그 모습에 이제는 대놓고 ‘쿵, 쿵’ 바닥까지 찍어대는 남정네들이었다.
하여간 다리가 셋 달린 동물들은 다 똑같다더니.
“…에휴, 그만하죠. 그보다, 산을 완전히 내려온 것 같으니 여기서부터는 이동 수단을 바꿉시다.”
“예? 그 말씀은…?”
젤다 남작의 반문에, 나는 대꾸 없이 써클을 휘돌렸다.
마나가 향할 곳은 머리 위의 천공(天空).
그곳으로 의지를 담아 힘차게 기운을 쏘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 끼이이이이이이이!
두 마리의 와이번이 거친 파공음을 흩뿌리며 지상으로 하강했다.
이미 얘기를 들은 일행들조차 움찔 몸을 떨 정도로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지, 진짜 와이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젤다 남작이 놀라 기함했다.
괜스레 우쭐해진 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이거면, 공국의 수도 정도는 반나절도 되지 않아 당도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지금껏 저희는 왜 이 고생을…?”
“그거야….”
어느새 내 입으로 모여진 무수한 시선들을 일별한 내가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보다 큰 거물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우리 움직임이 들켜서는 곤란했거든요.”
***
테라의 레이브 성도.
“국경의 소식은 아직인가요?”
실비아가 초조한 낯빛으로 물었다.
수십 평 넓이의 회의실이었다.
20석이나 되는 자리를 사람들이 모두 차지한 가운데, 전령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아직은….”
실비아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분위기가 마치 깨지기 직전의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었다.
“거, 그냥 내가 간다니까 그러네.”
그때, 우측 2번째 자리에 앉은 세논이 입을 열었다.
“아님, 내 옆에 초월의 마탑주라도 보내던가. 둘 중 하나만 가도 십이월 한둘은 수월하게 막아낼 거다. 수성(守城)에 있어 우리쯤 되는 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일일이 설명 안 해줘도 알지 않나?”
“그러다 암살이라도 당하면요?”
“우리가 그딴 걸 당할 위인처럼 보이나 봐?”
“군의 참모로서 사소한 변수까지 계산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말씀하셨다시피, 마법사는 수성에 강하지만 암살에는 취약하죠. 더하여, 그만큼 테라의 방어도 약해질 거고요.”
전(前) 반란군의 수괴였던 카이클 공작은 이미 수도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물론 제 측근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당장 이런 외곽보다 수도 왕성(王城)이 훨씬 중요했으니까.
자이툰이라는 선례가 있었기에,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선택과 집중. 현재 우리 군이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일이에요. 빈집털이의 무서움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으니까요.”
차이점이라면, 이전에는 빈집털이를 하는 행위자가 아군이라는 점이었지만.
부르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녀석을 생각하며 실비아가 가볍게 전신을 떨었다.
생각해 보니 기가 막혔다.
저쪽은 병력이 만(萬) 단위라지만, 녀석은 고작 극소수의 인원으로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던 건지.
“뭐 어쩌자는 건데?”
“…일단은 국경 발 전보를 기다려 보죠. 판단은 그 이후에 하자고요.”
“결국 또 이렇게 가만히 죽치고 앉아 있자는 거잖아?”
와락 인상을 구긴 세논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바로 그때,
“저, 전보입니다!”
“……!”
또 한 명의 전령이 쏜살같이 회의실 내부로 들어왔다.
실비아가 당장에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국경인가요?”
“예? 아, 국경은 맞습니다만… 기다리시던 스란 쪽은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반대쪽, 북부 전선에서 온 소식입니다. 최소 10만 이상의 병력이 테라의 영토로 남하(南下)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 북부?”
직후, 모두가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실비아는 물론이고, 인버스 공작을 포함한 테라의 다른 최고위 귀족들까지 모두.
저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으니까.
‘제국군’이 움직였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
다만, 이곳에서 단 두 사람만큼은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이미 예견된 일이었잖아? 안 그래도 가만있으려니 몸이 찌뿌둥했는데, 잘됐네.”
“나도 동감이다.”
“역시 친구라 이거지? 근데 페르, 너는 마탑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냐? 동료들 구하러.”
“그거라면 이미 텄다. 원래는 네 제자 녀석을 빌리려고 했거든. 나 혼자서는 개죽음이야. 아직 블레어 마탑주에게는 이길 자신 없으니까.”
“뭐야, 답지 않게 웬 약한 소리?”
“자신과 자만은 종이 한 장 차이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너를 도와 확실하게 빚을 지우고 마탑으로 끌고 가야겠다.”
“내 제자가 테라를 구해주는 걸 빚이라고 생각이나 할까?”
“걘 이제 여기 귀족이잖냐.”
“…아, 그랬었지?”
초월의 마탑주의 말에, 그제야 세논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
그리고 이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멍하니 지켜만 보던 실비아는…
“…진짜, 누가 들으면 제국이고 마탑이고 다 동네 똥개쯤 되는 줄 알겠네요. 그래서, 적군의 선봉은 확인되었나요?”
물론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던진 물음이었다.
이제야 국경 인근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면, 아직 세부 동선을 파악하는 일도 채 이루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한데…
“그게, 조금 믿기 힘든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네?”
“출처는 북부 인근인데, 그 내용이 좀….”
“괜찮아요. 거짓 정보라도 상관없으니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세요.”
잠시 망설이던 전령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 이곳에 있는 모두가 대경할 만한 대답을 내어놓는다.
“스노비 2황자가… 직접 십이월과 마탑주 일부를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
***
와이번이라는 최고의 이동수단은 고작 사흘 만에 우리를 공국의 수도로 이동시켜 줬다.
최초 예상과 달리 시간이 조금 더 걸린 이유는 간단했다.
와이번 하나가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하여, 계획이 조금 지체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내 계산 범위 내였다.
“슬슬 작전 내용부터 말하지? 당장 저~기. 수도의 성문을 어떻게 통과할지부터 말이야.”
저 멀리, 공국의 수도가 보였다.
당연하게도 와이번을 타고 왕성을 가로지를 수는 없었다.
민간인들이 놀랄 것은 물론이고, 대번에 격추 마법들이 퍼부어질 테니까.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가진 신분 패는 곧, 감옥으로 가는 직행 워프가 될 거야.”
“그렇겠지. 근데, 특별히 작전 내용이랄 것도 없어.”
“…뭐?”
짧게 반문하는 유리나를 일별하며, 나는 주변을 향해 설명을 이어갔다.
“제가 신호를 주면, 이곳에 있는 90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저 성문에 마나를 쏟아내야 할 겁니다. 물론, 각자가 가진 최고의 마법으로요.”
“그 말씀은…?”
“일종의 양동작전입니다. 그리되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게 되겠죠? 제 예상대로라면, 필수 병력을 제외하고 모두 이곳 동문(東門)에 집결할 겁니다.”
“하, 하지만 그 말씀인즉, 성문의 방어는 지금보다 훨씬 강화될 텐데….”
“상관없어요. 어차피 잠입하는 건 저를 포함한 극소수니까. 무엇보다, 이미 저들도 만약의 침입에 경계하고 있고요.”
“예…?”
“국경지대에서 이미 저희의 존재를 들켰잖아요. 통신용 수정구라는 매개체가 있는 이상, 아마 칼이라도 갈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 분명 수도까지 잠입하는 건 예상하지 못할 거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물론, 저들도 ‘설마’ 하는 심정이기는 할 거예요.”
스란의 왕성은 이미 내가 한 번 털어먹었던 곳이다.
바보들만 모인 것이 아닌 이상,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할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니까, 조금 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우우웅!
직후, 나는 내 웅혼한 마나를 아주 일부만 주변으로 퍼뜨렸다.
“……!”
기운에 민감한 마법사들이 대번에 움찔 몸을 떨었다.
일종의 사기 진작 차원이다.
그 상태로, 나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마쳤다.
“걱정하지 말고 저만 믿어요. 장담하건대, 제 말씀대로만 해주시면 충분히 공왕만 훔쳐서 달아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