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공국을 점령하라(5)
높다란 야산.
그 중턱에 자리한, 작위적인 공터.
화르륵!
유리나의 손 위로 홍염의 불꽃이 타올랐다.
오랜만에 의지가 샘솟는다.
공국 병들을 구분하는 일은 쉬웠다.
피골이 상접한 민중들과 달리, 공국 병들은 그간 얼마나 잘 처먹었는지 얼굴에 개기름마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아마 민중들에게 배당된 음식들까지 죄다 가로챈 모양일 테지.
“으아아아악! 뜨거워! 뜨겁다고!”
“그냥 죽어. 쓰레기 같은 자식들.”
펑! 퍼퍼퍼퍼펑!
유리나의 특기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저써클로 한정하면, 불꽃만큼 위력이 뛰어난 마법도 또 없었으니까.
다만 마나 효율이 좀 떨어진다 뿐이지.
그마저도 이미 5써클을 넘어선 유리나였기에 영향은 미미했지만.
“으아아아아! 속이 다 시원하네.”
지금 막 숯덩이 3개를 더 만들어낸 유리나가 개운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내기에서 이길 자신?
물론 있었다.
상대가 제아무리 또래 최강이라는 괴물들이라도, 이쪽은 확실한 핸디캡을 손에 쥐었으니까.
검을 아무리 휘둘러 봐야 한 번에 불태우는 것만 못할 것인즉.
그 예로,
서걱! 서걱!
“내 팔! 내 파아아아아아아알!”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루나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히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광경이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은빛의 실선은 지극히 효율적인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었다.
은빛 선 하나가 그어지면, 정확히 사지가 한 개씩은 허공으로 떠올랐으니까.
“…나도 질 수 없지.”
유리나가 다시 한번 의지를 다졌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웬 놈들이냐!?”
“…….”
일순 유리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공터 한가운데 지어진 커다란 천막.
그곳에서 제법 강해 보이는 털북숭이가 뛰쳐나오고 있었다.
더하여, 반쯤 헐벗은 몸은 사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예상토록 만들었다.
“저 씹….”
“…저건 내가 처리하지.”
어느새 유리나의 옆으로 다가선 루나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할 거야. 대충 보니까 엑스퍼트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저 정도면 나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방심은 금물이다. 그래도 우두머리는 일반 병들과 차이가 있을 테니까. 더군다나, 너는 저써클이라는 핸디캡까지 짊어지고 있지 않나?”
“…….”
어이가 없네.
이걸 저쪽에서는 오히려 핸디캡으로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럼 내가 저걸 잡으면 한 열 명분으로 쳐주시던가.”
화르르륵!
짤막하게 중얼거린 유리나가 재차 불꽃을 뿜어냈다.
루나 또한 검 위로 마나를 덧씌운다.
공통점이라면, 둘 모두 저 털북숭이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한 여인들이었으니까.
다만…
쐐애애애애액! 푸우욱!
“컥!”
웬 마력의 창이 빗살처럼 날아가 털북숭이의 복부 한복판을 꿰뚫었다.
“……!”
유리나와 루나가 대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여인이 잠시 잊고 있던 것은,
“방금 건 열 명으로 쳐준다고?”
내기 참가자는 비단 자신들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지금 막, 마력 창 하나를 쏘아낸 내가 주변을 둘러봤다.
우려를 나타내던 목소리는 옛적에 쏙 들어갔다.
근래부터.
그러니까, 나를 지휘관으로 인정하고 나서부터 일백의 마법사들은 사사건건 내 결정에 염려부터 드러냈다.
예상과는 정반대의 반응들이었다.
혹여나 존경하는(?)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돌아갈 방법도 요원해질뿐더러 사기가 곤두박질칠 거라나 뭐라나.
일부는 ‘아무리 그래도 배틀 메이지는…’ 따위의 식으로 내 능력을 의심하기도 했다.
물론, 그 모든 게 걱정에서 비롯된 진심이겠지만.
‘…걱정도 과하면 귀찮거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확실하게 능력을 보여주는 수밖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대, 대체 못 하시는 게 있기는 하신 겁니까?”
“글쎄요. 그보다, 공국 병들은 이게 전부일까요?”
“아, 아마도요…?”
젤다 남작이 더듬더듬 답했다.
어느새 내 주변에 무수한 공국 병들이 쓰러져 있었다.
어림잡아 그 수만 일백을 헤아렸다.
“이곳에 있는 공국 병들은 도합 이백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출처는 민중들입니다.”
“그렇군요. 국경 인근의 야산마다 이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 테지요?”
“…그렇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하면, 뒷수습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젤다 경.”
“옛. 맡겨만 주시지요.”
우두머리.
다시 말해, 방금 내가 복부를 꿰뚫은 털북숭이를 잡아낸 순간, 게임은 이미 끝났다.
후다닥!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유리나와 루나도 빠르게 내게 다가서고 있었다.
“끝이야? 이게 다라고?”
“어. 그런 것 같네.”
“내기는? 분명 내가 이겼을 테지?”
힐끗 주변을 둘러보며 유리나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곧장 목청에서 솟아오르려던 내 육성은,
“…아니. 내기라면 내가 이겼다.”
예의 고저가 없는 루나의 목소리에 금세 파묻히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둘 다 틀렸다.
“…그럼, 오늘 저녁은 잘 부탁할게.”
“엥? 야! 어디가!?”
“내기는 내가 이겼으니까. 둘이서 같이 저녁 준비하라고.”
“뭣…!?”
이미 두 사람이 오기 전부터 눈대중으로 정확히 새어본 나였다.
결과는 98대 105.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
곧 두 여인이 빠르게 쓰러진 공국 병들을 세어갔다.
당연하게도, 그 98이란 숫자는 루나와 유리나 두 사람이 때려잡은 쓰레기들의 합이었다.
***
산중에 평화가 찾아왔다.
남은 잔당들.
그러니까, 사지를 하나씩 잃은 공국 병들은 공터 한가운데 모여졌다.
“사, 살려주십시오!”
이들에 대한 처리는 당사자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다름 아닌…
“개자식들!”
이 머나먼 이국까지 잡혀 온 민중들에게.
그들은 돌을 던졌다.
아니, 칼까지 빼어 들곤 성큼성큼 다가서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추악했다.
전쟁 통에 죽은 인원들보다, 이곳으로 잡혀 와 목숨을 잃은 인원이 더 많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저들은 반드시 민중들의 몫이어야 한다.
푹! 푸푸푸푹!
“크아아아아아아!”
마침내 죽창이며 날이 선 검들을 쥔 민중들이 공국 병들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 끔찍한 광경에 유리나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그것이 전쟁이라는 괴물의 무서움이었다.
다만…
“저… 이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이처럼 실이 아닌 득도 있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민중들의 대표를 맡고 있는 노인의 말에, 나는 가볍게 손사래 치며 답했다.
“혹, 어디에서 오신 분들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공국 분들 같지는 않아서….”
“…저희는….”
곧바로 대답하려던 내가 잠시 망설였다.
순간적으로 알려줘도 되나? 하는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여기서 정보라도 새어 나간다면, 향후 행보도 상당히 꼬일 것이기에.
“아, 그냥 지나가던 나그네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순간, 유리나가 잽싸게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그 말씀은…?”
“당장 알려드리기 곤란한 사정이 있어서요.”
“…아무리 그래도 은인이신데, 나중이라도 식사 정도는 대접할 수 있게 이름만이라도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음, 그럼….”
잠시 고민하던 유리나가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손뼉을 쳤다.
“여기 있는 마법사들이 정확히 백 명이니까, 백의의 마법사들? 마법사단?”
“…뭐냐, 그 오글거리는 이름은?”
“그, 그래도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좋잖냐.”
“임팩트가 목적이라면, 그보다 나은 이름도 없기는 하겠네.”
티격대는 우리와 달리, 노인은 만족한 미소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물론 이때의 우리는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일명 백의(百義)의 마법 사단.
설마하니, 훗날 전설로 기록될 이름이 고작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게 될 줄은.
“형아.”
“……?”
“고맙습니다.”
그때, 웬 아이가 내게 다가와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괜스레 머쓱해진 내가 손가락으로 볼 끝을 긁적였다.
유리나가 툭, 내 어깨를 쳤다.
“뭐 해? 애가 인사하잖아.”
“아니 뭐, 여기서 내가 뭘 해줘야 하는 건가?”
“아이참,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지. 이렇게.”
유리나가 곧장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행색은 비루하지만 갈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상당히 귀여운 외모를 가진 아이였다.
“헤헤.”
“이름이 뭐니?”
“테루라고 해요.”
“그래, 테루.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도 형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순간, 테루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완전 영웅이 다 되셨는데?”
“크흠.”
유리나의 묘한 눈빛이 이쪽을 향하자, 내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더 나아가, 이번에는 ‘찌리리’ 표정으로 의지까지 전해오신다.
“너, 너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
“진짜요?”
“…그럼, 진짜지.”
그제야 내 손끝도 아이의 머리 위를 향했다.
그 상태로, 괜히 머쓱해진 내가 몇 번이나 머리칼을 헝클어줬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이조차 지켜내지 못한, 무능한 머저리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만약 이런 나라도 이 아이에게 의지가 될 수 있다면…
“…열심히 해라.”
“네!”
아이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내 입가에도 씨익 호선이 그려졌다.
잠시 후, 이내 내가 고개를 돌리자,
“…뭐야,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유리나가 새삼 따뜻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새로운 모습을 여러 번 보는 것 같아서?”
“칭찬이야?”
“그럼, 칭찬이지. 더 …졌다는 뜻이니까.”
“…응?”
뒷말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에잇!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 저녁은 이 누나가 제대로 만들어 줄라니까.”
척하니 내 어깨에 팔을 걸친 유리나가 ‘앞으로, 앞으로’를 외쳤다.
“근데 잊은 건 아니지?”
“엉?”
“저녁 받고, 소원권도 추가였다.”
“…….”
곧바로 입을 다무는 그녀를 일별한 내가 힐끗,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나, 너도 마찬가지야. 알지?”
“…….”
직후, 그제야 슬며시 내 시선을 피하고 마는 두 여인이었다.
***
어딘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짙은 어둠 속.
그곳에서, 오직 하나의 수정구만이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황자 전하.”
순간, 한줄기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레이지. 정말로 살아 있었나?
“그럼~ 내가 누군데. 뭐, 죄악의 힘은 완전히 빼앗겼지만….”
- 그 몸은?
“공주의 몸이야. 내가 오래전부터 상당히 공을 들여왔지. 십수 년도 더 전에, 얘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말이야. 이름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가지?”
- …레이지 칸 테레이라인가. 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그럴 리가. 내가 신은 아니잖아. 다 만약을 대비했을 뿐이지.”
직후, 여인의 목소리에 일견 서늘한 한기가 어렸다.
“그보다,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겠지?”
- 뭘?
“뭘 모르는 표정이야. 스란의 국경이 예상외로 선전하고 있다는 소식 말이야.”
- …….
“안개의 검사와 마탑주 두 명을 딸려 보냈다며? 그걸로도 부족한가 봐?”
- …세타 쿤 이그니스 하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 녀석이 아니라 다른 6써클 마법사 하나와 8월의 검사가 수성에 나섰다고 하더군.
“그래? 그 둘뿐이라면 결과는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을 듯한데….”
- 6써클 마법사가 다 같은 6써클이 아니니까. 꽤나 상당한 실력자라고 해.
연이어 울리는 스노비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들었다.
“그럼, 세타 쿤 이그니스는 어디로 갔는데?”
- 나도 몰라.
“그게 제일 심각한 것 같은데. 행방조차 파악되지 않는다는 거잖아.”
- …….
“이제 어쩔 거야? 대공이 지금은 가만히 있지만, 그렇다고 오래 두고 볼 녀석은 아니지 않나?”
- 레이지,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네가 살아 돌아오지만 않았어도, 대공은 네 복수를 최우선으로 뒀을 것이다.
“…으흠. 그건 나도 할 말이 없네.”
말과는 달리, 왜인지 썩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는 그녀였다.
그 말대로, 요즈음 대공과 레이지는 부쩍 시시콜콜한 연락을 주고받았으니까.
힘의 태반을 잃었지만, 그래도 그 근본은 그대로였으니까.
대공은 레이지의 진심을 확인했다.
마치 전쟁 통에 만개한 한 떨기 꽃이랄까?
물론 그 꽃말은 ‘사랑’이고.
덕분에, 대공의 불안정한 정신이 상당히 정상화된 일은 긍정적이지만,
- …내가 그쪽으로 가지.
“응? 황자 전하가 직접 이쪽으로 온다고?”
- 그래. 곧 스노비와도 합류할 예정이라며?
“그건 맞는데, 그럼 자이툰의 잔당들은?”
- 이쪽은 이제 내가 없어도 돼. 너도 말했다시피, 진짜 큰 변수는 세타 쿤 이그니스. 그 녀석이니까.
말을 마친 스노비가 홱 몸을 돌렸다.
- 나머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 조금 쉬워야겠어.
“아, 응~ 푹 쉬어.”
직후, 수정구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일이 재밌어지네?”
진심으로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