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공국을 점령하라(4)
한편, 스란의 국경 인근.
“…역시 있군.”
울프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일주일 전, 굴욕적인 패퇴 이후.
그는 곧장 본국으로 연락을 취했다.
솟구치는 분노와는 별개로, 눈까지 썩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 애송이는 강했다.
뒤늦게 정보를 접하고 나서는 마음 한편으로 경외심마저 일 정도였다.
처음에는 마나가 극에 달해 회춘한 노인네인 줄로만 알았건만.
실제로 녀석은 이제 열아홉 먹은 핏덩이였다.
이름은 세타 쿤 이그니스.
근래에 외부 활동도 상당히 하고 다녔다는데, 왜 생소했던 건지 의문이다.
자유 연합, 마법 대전, 마탑, 그리고 이곳 스란의 왕궁까지…….
대륙의 뭇 강자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상당히 익숙한 꼬맹이라고 한다.
추정되는 경지만 무려 6써클이라고 했던가?
놀랍게도, 녀석은 고작 10대에 이미 하위 마탑주 급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하여, 울프는 곧장 원군을 요청했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대로였고.
“먼 걸음 하게 하여 송구스럽습니다, 르반 경.”
“…….”
보랏빛 머리칼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미남자였다.
외형만 보면 3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나, 실제 그는 이미 쉰을 넘긴 노장이었다.
안개의 기사 르반 공작.
또 다른 이명은, 10월의 검사.
허나, 놀라운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먼 거리를 걸어서 올 수는 없었으니까.
“송구하면 부르지를 마셔야죠.”
…라고 차갑게 중얼거리는 여인은 빙결의 마탑주 에르사 아인하르트였고.
“뭐 어때? 마탑에서 인질들이나 가지고 노는 것도 슬슬 질리던 참인데.”
옆의 삐죽 머리는 뇌전의 마탑주 엑스토나 제우스였다.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사람들 중 무려 3인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고작 애송이 하나를 사로잡기 위해서.
“근데 울프. 옆에서 시종일관 고개 숙이고 있는 그 남자는 누구죠?”
“아, 스란의 귀족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에르사 아인하르트가 묻자, 찰나 울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였더라?”
“…….”
그 굴욕감에, 고개 숙이고 있던 예의 사내가 잠시 전신을 떨었다.
“…빈센트 탈 아스트로입니다.”
“…아스트로?”
한데, 그 순간 안개의 검사 르반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일격(一擊)의 검사와는 무슨 관계지?”
“제 조부님 되십니다.”
“호오?”
순간, 르반이 나지막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훌륭한 조부를 뒀군.”
“……!”
빈센트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극찬은 처음이었기에.
그것도 상대는 십이월로 유명한 안개의 검사였다.
저도 모르게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
“범 아래에 강아지 나지 않는다고 했지.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겠네.”
“가, 감사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부탁… 말씀이십니까?”
“음, 표현이 잘못됐군. 부탁이라기보다는, 공국인으로서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네.”
“…….”
그제야 빈센트는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보다시피, 자국의 영토가 외세에 유린당하고 있네. 한데, 정작 당사자인 그대는 가만히 두고만 볼 생각인가?”
“그 말씀은…?”
“원래 제 나라는 자신의 손으로 지켜내야 하는 법일세. 나나 여기 있는 이들처럼, 외부인의 손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
“하니, 가서 그대가 직접 쟁취하게. 그대의 조국, 스란의 영토를.”
“……!”
빈센트는 이제 상대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물론, 그 안에 숨은 속뜻도.
저곳에는, 예의 그 미친 신위를 선보이던 어린 대마법사가 있었다.
한데도 선봉에 서라 함은…
좋게 쳐줘도 사전 탐색을 위한, ‘실험용 쥐’였다.
“풋.”
빌어먹을 울프가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여태 얼이 빠져 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뭣 하고 있나? 가서 그대의 기개를 보여보라니까.”
“…….”
“설마하니, 조부의 명예에 흠집을 낼 생각은 아니겠지?”
으드득.
빈센트가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콱 깨물었다.
비로소 그는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울프뿐만이 아니었다.
제국과 관련된 모든 이들은, 이미 악마나 다름없었다.
***
같은 시각.
그 안개의 검사나 마탑주들조차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
스란의 장벽 위에서, 밀려오는 군(軍)을 바라보는 두 쌍의 시선이 있었다.
“설마 네 녀석과 합을 맞추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감입니다.”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한다며? 듣기로, 내 제자 놈과도 견줄 정도라던데?”
“아카데미 시절에는 제가 더 강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이야, 이 새끼 자신감 보소? 그럼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냐?”
직후, 에이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만큼은 자신에게도 뒤지지 않는 멀끔한 녀석이 그곳에 있었다.
아니, 자신은 지는 해였고, 이 녀석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었으니…
“…고놈, 여자 여럿 울리겠구먼.”
에이스가 저도 모르게 ‘쩝쩝’ 입맛을 다셨다.
둘뿐인 제자 놈들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인물들은 어찌 이리들 출중한지.
능력 있는 놈들이 외모까지 다 가진 모양이다.
마치 자신처럼.
“…상대는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뭘?”
“저들 사이에, 10월의 검사와 두 마탑주가 끼어 있다고 합니다.”
“……!”
이게 뭔 소리다냐.
“10월의 검사면, 르반 폴 아카이브, 그 능구렁이 할방구?”
“네.”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저쪽에 제국의 인사라도 있었던 모양이지요. 자신 없으십니까?”
“자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 할방구는 나와 같은 십이월이거든? 나조차 섣불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야.”
“그렇습니까? 저와는 다르시네요.”
“…뭐?”
“저는 두 마탑주도 능히 상대할 자신이 있습니다.”
움찔.
찰나 에이스의 동공이 요동쳤다.
이놈 봐라?
“자신 없으시다면 지금이라도 원군을 부르시지요. 아마 초월의 마탑주나 빛의 마녀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사람 신경 긁어대는 재능까지 타고난 놈이었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제 금발을, 녀석이 가볍게 쓸어 넘겼다.
그리곤,
“저는 이 나라 테라의 자랑, 제노스 델 카이클이니까요.”
“…….”
이런 밥맛 떨어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여 댄다.
에이스는 속으로 다짐했다.
세타와 함께, 나중에 이 녀석을 상대로도 꼭 특단의 교육을 시키겠노라고.
***
스란의 이름 모를 야산 초입부.
“실비아가 뭐래?”
이제는 제법 심신의 안정을 되찾은 유리나가 내게 접근해 왔다.
“스승님이랑 제노스 녀석. 그리고 병력 2만을 국경으로 보낼 거라더라.”
“…좀 과하지 않나? 그 정도면 단순히 보여주기가 아니라, 작정을 하고 적군을 막으려는 것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니야. 2만으로 수성을 한다면, 지휘관의 능력에 따라 6만도 능히 막아낼 수 있지만. 전술 외로 구분되는 ‘초인’들은 또 별개니까.”
“제국에서 원군을 보낼 거라는 뜻이야?”
“어. 그렇게 판단했으니까 실비아도 굳이 두 사람을 같이 보냈겠지.”
그제야 유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
여기서는 나도 말문이 막혔다.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나무 등지 곳곳에, 빈민을 방불케 하는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예상대로, 저들의 정체는 ‘전쟁 포로’들이었다.
조금 대화를 나눠보니, 제국은 승전하는 족족 민간인들을 잡아들였다고.
그리고 잡아들인 이들을 이런 오지에 방치했다.
정복 전쟁이 시작된 지도 근 3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점.
그사이, 도망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산 중턱에 공국의 병사들이 가족을 인질로 삼고 있다면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속국의 서러움을 다른 이들에게 풀려고 하는지, 공국의 병력들은 힘없는 민초들을 상대로 폭정을 부렸다.
강간은 기본이고, 유흥을 위한 ‘인간 사냥’까지.
“방금 멜사 씨와 대화를 좀 해 봤거든?”
“멜사 씨?”
“저기 있는 세 살배기 애 엄마 말이야.”
“아아….”
유리나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 뼈를 앙상하게 드러낸 여인이 있었다.
그 손을 꼬옥 잡고 있는 사내아이도.
“제국군이 전쟁 포로들을 호송해 오는 건, 딱 국경 인근까지래. 그래서 원래는 산 중턱에서 대기하고 있는 공국병들이 아래로 마중 나가 인계를 받아야 하는데….”
“하는데?”
“그조차 워낙 인원이 많으니까, 이제는 귀찮아서 저기 있는 사람들에게 시킨다더라.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이 사람들은 명을 따를 수밖에 없고.”
“…….”
“…말이 호송이지, 제국군도 대충 국경 근처에 버려두고 돌아가는 모양이야. 황제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폭도화만 막으면 그만이니까.”
말을 마친 유리나가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아마 제 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겠지.
“그래서 말인데, 이들을 구해주면….”
“안 돼.”
“……!”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마. 우리는 공왕을 잡아야 해. 이들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이런 뭣 같은 일들이 대륙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을 거야.”
“그럼… 나라도 여기 남을게.”
“…뭐?”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자,
“에이 뭐, 솔직히 나 하나 없어도 문제 없잖냐?”
유리나가 가볍게 내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애써 웃음 짓고 있지만, 그 미소가 상당히 아파 보인다.
끝내 이들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하아. 일단 기다려 봐. 방법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지, 진짜…?”
“어. 그리고, 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나도 공감하거든.”
“잘 생각했어!”
순간, 유리나가 덥석 내 손을 붙잡았다.
“역시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뒀다니까? 그래, 인간으로서 도리는 지켜가면서 목적도 이뤄야지.”
“…대신 우리가 직접 구하는 건 안 돼. 아까도 말했다시피, 시간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유리나는 내 행동을 오해한 듯싶다.
나는 이들을 구해, 빚을 지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전쟁 포로들은 대부분 자이툰과 게르힘에서 잡혀온 사람들이다.
양국을 중간에 끼고 있는 스란이니, 북부인 제국보다 이곳에 버리는 게 동선상 나았을 테지.
각설하고, 나는 곧장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 어머?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위로 레베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별일 없지?”
- 아직까지는요. 그쪽은요?
“여기도 아직까지는? 그보다, 제법 반가워할 만한 선물을 준비했거든?”
- 저한테요?
“아니, 연합에 말이야.”
레베카가 대번에 삐죽 입술을 내민다.
- 그게 뭔데요?
“자이툰과 게르힘의 국민들.”
- 넷!?
일순, 수정구 속 레베카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리나도, 그제야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연합의 첫걸음이 사로잡힌 민중들을 구하는 일이라면.
훗날, 그 민중들을 한데 규합하는 것도 훨씬 쉬워질 테니까.
“위치 찍어줄 테니, 해당 국가에서 알아서 데리고들 가라고 해. 쓰레기들은 우리가 정리해 놓고 갈게.”
***
수 시간 뒤, 야산 중턱.
과연, 들었던 대로 상황은 심각했다.
아니, 오히려 소문이 사실만 못했다.
“낄낄낄.”
가장 먼저 시야로 들어온 것은, 나무 곳곳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체 곳곳에 박힌 화살들은 그들이 어떤 짓을 당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일은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내가 하지.”
루나가 대번에 전방으로 나섰다.
다만, 이번에는 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뭐, 나도 마법으로 한 방에 처리하고 싶지는 않아.”
멈칫.
찰나 루나의 신형이 멈춰 섰다.
내 말에 숨은 속뜻을 단번에 이해한 모양이다.
“…같이할 건가?”
“물론. 이왕이면 내기도 하자. 누가 더 많이 쓰레기를 치우는지. 지는 사람이 오늘 저녁거리를 구해오는 걸로.”
“…좋군. 하면, 오늘은 배틀 메이지인가?”
“그게 낫겠지?”
남들이 들으면 기도 차지 않을 얘기지만.
적어도 내 일행들만큼은 이제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현 초월의 마탑주만이 할 수 있는 올 클래스의 재능을 타고났고.
일반 병사들 정도는 근접전으로도 가볍게 찜쪄먹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해!”
그때 유리나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넌 쟤들 두드려 팰 힘도 없잖냐.”
“너네 같은 괴물들이 상대라면, 작은 핸디 정도는 줘도 되잖아? 3써클 이하의 마법만 사용할게. 저녁거리 받고 소원권 하나까지. 어때?”
유리나의 제안에 루나가 곧장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상관없다.”
“접수. 그럼, 시작!”
허나,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방으로 뛰쳐나가는 그녀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입가에 만연한 미소까지 떠올리고서.
“누, 누구냐!?”
대경한 공국병들이 새된 괴성을 터뜨렸다.
찰나 시선이 마주친 나와 루나는…
스팟!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쪽으로 쏘아져 갔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평소보다 날이 꽤나 길어질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