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75화 (175/251)

175화. 공국을 점령하라(3)

타닥, 타다닥.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 속.

채 꺼지지 못한 불똥이 여기저기서 튀어 오른다.

예의 색욕의 이능을 통해 마법은 모두 쏟아져 나왔다.

내 몸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던 전류들도.

대해(大海)와도 같던 내 마나가 결국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허나…

“괴, 괴물…….”

목적은 이루었다.

스란의 국경을 지키는 인원은 약 5만 남짓.

한데, 그런 이들이 이용하는 식량 창고를 모조리 불태웠으니.

짧으면 하루.

길어야 이틀이다.

그 후면, 적병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필수 병력은 남겨둔다는 전략도 불가능했다.

그 필수 병력이 먹을 음식조차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이제 돌아가 볼까?”

기운은 잃었지만, 기세는 유지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니까.

달리 말하면, 일종의 허세다.

언제든 너희들을 처치할 수 있다는 자신감.

오만의 병력 앞에서, 나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비켜라!”

바로 그때, 웬 턱수염이 수북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입이 뾰족한 것이, 생긴 게 꼭 늑대를 연상케 하는 놈이었다.

“너 이 새끼, 마나를 다 쓴 거겠지?”

“…아닌데?”

“아니긴, 씨펄. 그 떨려대는 어깨부터 어떻게 하고 구라를 쳐대라. 내 눈은 못 속여.”

“…….”

의외로 눈썰미가 괜찮은 사내였다.

그는 여태 시선만 하늘로 고정한 병력들을 헤치고 대번에 전면으로 나섰다.

“나는 제국의… 아니, 스란의 울프 백작이다.”

“…….”

사내의 목적은 명확했다.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줄 한마디.

그런 대답을 내게 바라는 거겠지.

물론, 나는 거기에 응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대답을 안 하시겠다? 근데 이제 어쩌냐. 그리 무턱대고 적진 한복판으로 파고들어서, 뒷일 생각하지 않고 마나를 다 써버렸으니.”

“다 안 썼다니깐 그러네. 뭣하면 시험해 보던가.”

“애새끼가 입이 걸레군. 안 그래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이 씹새야.”

채앵!

직후, 스스로를 울프 백작이라 소개한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날 전체가 톱니로 이루어진, 숫제 대형 톱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기였다.

중요한 것은,

“하늘에 떠 있는 날 잡을 방법은 있으시고?”

“거기 마법사! 내 몸을 띄워라. 병사들은 뭣들 하는 게야? 화살이라도 쏘란 말이야! 언제부터 마법사 하나에 5만이 이리 속수무책이었나!?”

그럼에도 움직이는 이들은 없었다.

인간 본연의 두려움이다.

고작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그만한 신위를 선보였는데, 어느 누가 내게 쉬이 덤빌 수 있을까.

“이 배알도 없는 것들이…! 야, 당장 안 내려오냐?”

“응~ 안 내려갈 거야.”

“저 씹…!”

“잘~ 놀다 갑니다.”

나는 손까지 흔들어주곤 유유히 스란의 국경지대를 빠져나갔다.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

실제로 플라이 마법 또한 마나를 무지막지하게 잡아먹었으니까.

“으아아아아악! 마스터에만 올랐어도 저딴 건 단칼에 베어버리는 건데!”

한 박자 늦게, 고막을 때리는 괴성은 가볍게 무시해 줬다.

***

약 10여 분 뒤.

나는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는 평지로 돌아왔다.

멀리서 내가 하는 양을 모두 지켜본 일백의 인원들은 입까지 ‘헤’ 벌리고 있었다.

“고,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

“7써클 마법사는… 역시 대단하군요.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는 건 처음 봅니다.”

능력이 곧 신분이라는 전장답게.

은연중 나를 무시하는 시선을 보내오던 이들조차, 이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데, 그 광경에 왜인지 나보다 더 으쓱하는 이가 있었다.

…아니, ‘이들’이.

“내 친구가 좀 대단하기는 하죠?”

“제 주군입니다.”

“…뭣!?”

순간 유리나가 화들짝 놀랐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루, 루나 경. 방금 뭐라고…?”

“무엇이 말입니까?”

“아니,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주군이 어쩌고 하셨던 것 같아서…….”

“…아, 그렇군요. 하긴, 아직 다른 이들에게 알린 기억은 없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나의 입으로 모아졌다.

몇몇 이들은 마른침까지 꿀꺽 삼켰다.

이때에는 다들 왜 이러는지 몰랐는데,

“들으신 대로입니다. 이그니스 백작님은 이제 제 주군이십니다. 얼마 전 기사의 서약을 맺었으니까요.”

“허억! 어, 어찌…!”

대번에 사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특히 젤다 남작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테라 내에서 루나의 팬층이 상당히 두텁다고 한다.

기실 20대 중반을 바라보는 그녀는 지닌바 능력이나 배경이 이미 최고의 혼처이기도 했고.

속된 말로, 이때 젤다 남작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데, 또 한 명.

덥석!

“……?”

루나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리나가 있었다.

“바, 방금 그 말. 진짜야?”

“…물론이다.”

“대체 왜!? 아니,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쟤냐고? 듣기로, 기사의 서약을 맺게 되면 남은 일평생을 모시는 사람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며?”

“사실이다.”

“겨, 결혼도 안 할 거야…?”

“글쎄. 다만, 결혼은 아예 금지된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소위 얘기하는 기사 명문가들도 씨가 말랐겠지. 단지 필요에 의해 하지 않을 뿐…….”

“그 말이 그 말이잖아. 네 성격에 잘도 주군은 뒷전으로 하고 다른 놈이랑 놀아나겠다!”

이마에 손까지 올린 유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그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어차피 기사라면, 언젠가는 주군을 선택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개 기사들은 동성(同性)의 주군을 선택한다고 한다.

법률로 정해진 것은 아니고, 선입견이 뒤섞인 일종의 문화였다.

실제로 그 반대의 경우인 이성(異性)간 주종관계는, 소위 ‘그렇고 그런’ 사이가 대다수라고.

“크, 크흠. 그보다 일단 자리를 옮겨야 하지 않을까요? 혹, 장벽에서 병력이라도 넘어온다면 무척이나 곤란해질 겁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의 눈빛과 더불어 또 하나 변한 것이 있다면.

젤다 남작을 포함한 팀장급 귀족들이 이제는 진심으로 나를 대한다는 사실이었다.

원래는 벼락출세의 표본.

무늬뿐인 백작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나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이득을 얻은 듯싶다.

“이미 제 실력을 봤으니까요. 괜히 인원을 분산시켜 소중한 병력을 잃게 되면, 지휘관의 입장에서 상당히 곤란해지겠죠? 함정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구요.”

“…분명.”

“그뿐만이 아니에요. 순전히 제 느낌이지만, 상대 지휘관은 제국 쪽 사람이었어요.”

“제국… 말씀이십니까?”

“네. 그러니까, 아마 공국 내부에서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예요.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이니까요. 어제까지 아무 관련도 없는 타국인이 무작정 충성을 요구하면, 스란의 귀족들이라고 가만히 있겠어요? 한낱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인데요.”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조금 자세히 알아볼 가치가 있을 듯합니다.”

그제야 내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면, 일단 제가 실비아에게 따로 연락을 해둘게요. 은밀하게 스란의 내부 동향을 알아보는 한편, 의심을 사지 않게 일부 병력을 국경지대에 박아두죠. 애써 빼앗은 요충지니까요.”

“다른 귀족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군요. 어찌 보면 외부 전쟁의 첫 승리나 다름없으니…….”

“그건 저희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네요. 생색내기 딱 좋잖아요?”

이윽고 젤다 남작의 얼굴에도 짙은 미소가 맺혔다.

다만, 아직 아리송한 표정의 유리나만은 제 손을 번쩍 들고 있다.

“왜?”

“선생님. 슬슬 이 다음의 계획도 알려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힐끗, 주변을 둘러본 내가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을 잇는다.

“지금부터 이쪽의 진짜 목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부는 의아하실 겁니다. 적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 우리가 직접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가 아군에게 넘겨주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하고요.”

움찔.

정곡이었는지 몇몇 이들이 눈에 띌 정도로 몸을 들썩였다.

“물론 생색내기로는 그편이 더 나을지 몰라도… 이건 계획의 아주 일부일 뿐입니다. 진짜 목표는 공왕의 생포. 그리고, 그로 인한 공국의 내부 분열이니까요.”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애당초 제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이 취급되던 공국입니다. 민족성 자체에, 제국인에 대한 뼛속 깊은 원한이 있을 테지요.”

“…옳습니다. 그 부분은 저희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지요. 식민지와 속국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였으니.”

젤다 남작이 곧장 내 말에 동조해 왔다.

“하면 얘기는 다 끝난 것 같고, 우리는 잠시 거리를 벌렸다가 느긋하게 빈 국경이나 통과해 볼까요?”

“따르겠습니다.”

“이런 걸 동대륙 언어로 뭐라고 하더라…….”

내 중얼거림에, 나름 동대륙에 식견이 있는 루나가 짤막하게 반응한다.

“무혈입성(無血入城).”

***

이틀 뒤.

예상대로 스란군은 끝내 국경을 비웠다.

덕분에 우리는 공국의 수도까지 직선으로 가로지를 수 있었다.

한데, 그렇게 공국을 종단하는 길에 실로 경악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웬 이름 모를 산 인근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저들은 뭐죠?”

“…화전민들인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런 외곽의 산에 왜 화전민들이 있냐구요. 보통 화전민들은 먹을 게 존재하는 산 중턱에나 살지 않나요? 국경 근처에 자리한 이런 외곽의 민둥산에는 왜…….”

내 시선이 향하는 곳에 일단의 무리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곧, 가까이 접근한 우리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 시선을 내리깔았다.

예상컨대, 우리를 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들… 자세히 보니, 공국인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죠?”

“입고 있는 옷을 자세히 보면, 모두가 자이툰 왕국에서나 사용하는 청단(靑緞) 소재의 의류를 입고 있습니다.”

“청단이요…?”

“네. 여기저기가 해지고 닳았지만, 저 특유의 푸른 색감은 청단이 분명합니다.”

특이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산 위를 올려다보자, 실로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누가 봐도 한 국가 사람들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행색이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결국 깨닫게 되었다.

“…아무래도, 전쟁 포로들인 것 같습니다.”

“……!”

“입이 많으면 나눠야 할 음식도 많아지는 법이죠. 귀족들처럼 소위 쓸 만한 사람들은 본국으로 호송할 테지만, 군의 입장에서 가치가 없는 일반 백성들은 저렇게…….”

“…방치하거나 노예로 삼는다?”

“예. 혹여나 그대로 남겨두고 왔는데, 폭도로 변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같은 사람으로서 어찌…….”

전쟁의 참상은 이곳에 다 모여 있는 것일까?

실로 참혹했다.

곳곳에 자리한 나무들은 껍질이 다 벗겨져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것도 한계였는지, 세 살배기로 보이는 아이는 뼈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보다 더 갓난아기는, 젖도 나오지 않는 어미의 가슴을 쥐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

기력이 다했는지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심각하군.”

일순, 루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주변 곳곳을 둘러보던 유리나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가볍게 어깨까지 들썩이는 것이, 꽤나 충격을 받은 듯싶다.

그리고 나는…

“…이 새끼들, 진짜로 안 되겠네?”

다시금 확신했다.

지금의 제국이야말로, 현 대륙의 절대 ‘악(惡)’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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