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공국을 점령하라(1)
요 며칠, 실비아는 무척이나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애써 지우려고 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진짜. 그깟 알몸이 뭐라고…!”
국운(國運)이 걸린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건만, 도무지 업무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종이 위로 그 얼굴이 떠올랐고.
업무 보고차 누군가를 마주할 때는 상대와 녀석이 겹쳐 보였다.
하여,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바깥바람이나 쐴까 나왔는데…
“쟤, 쟤가 여기 왜 있어?”
정원 모퉁이를 돌던 실비아가 황급히 몸을 숨겼다.
성 뒤뜰에 자리한 이곳은, 작금에는 실비아만의 개인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기사들이 훈련을 하기에는 턱없이 좁았고, 그렇다고 한가로이 꽃구경이나 하고픈 이는 전쟁통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곧 실비아의 얼굴 위로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녀의 눈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저기에 있는 한 쌍의 남녀는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한데, 갑작스레 여인이 남자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설마…?”
일순, 실비아가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테라의 문화상, 다 큰 성인이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경우는 단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기사가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식.
다른 하나는, 반려를 맞이하기 위한 구혼 행위.
루나는 기사였다.
하니, 전자의 경우도 물론 배제할 수 없었지만…
지금껏 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이가 아랫사람에게 충성 맹세를 했던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나는 이미 유서 깊은 론지에 후작가의 실질적인 가주였고, 세타는 무늬뿐인 백작이 아니던가?
다시 말해…
“…아니겠지?”
“뭐가 아니야?”
“히익!”
털썩!
실비아가 그대로 발라당 뒤로 나자빠졌다.
그 순간 세타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바로 코앞에서 나타났기에.
“너 진짜, 기척 좀 하고 안 나타날래!?”
“헐.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지가 도둑고양이처럼 엿듣고 있어 놓고는…….”
“말은 똑바로 해. 네가 내 사유지를 침범한 거겠지.”
“어이가 없어서. 여기가 왜 네 사유지냐?”
“모르시나본데, 레이브 백작 님은 대대로 우리 가문의 가신이었거든?”
퍽이나 무안했던 실비아가 다다다 쏘아붙였다.
허나,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고, 공주님이 사라지셨다아아아아!”
“……!”
때마침 믿기 힘든 고성이 귀청을 때렸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란 실비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 누가 사라져?”
“이제야 눈치들 챘나 보네.”
“뭐…?”
실비아의 고개가 곧장 홱 하고 돌아갔다.
“신경 쓰지 마. 사라진 건 네가 알던 공주님이 아니니까.”
“대체 무슨 소리야?”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 그보다,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
“별동대를 하나 구성하려고 하거든. 어쩌면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을 중요한 일이니까, 확실한 실력자들만 추리고 싶어.”
“……!”
“인원은 백 명 정도. 대신 최정예들로만 구성되어야 해. 각 가문이 자랑하는 마법 군단으로, 최소 4써클 이상의 실력자들만 모아줬으면 해.”
“미친.”
실비아의 잇새로 대번에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가능하겠냐!? 당장 지금 영지에 4써클 이상 마법사만 싹싹 끌어모아도 일백이 간신히 넘을까 말까인데! 그리고, 각 가문에서 돌았다고 그만한 고급 인력을 쉽게 내놓겠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아주라.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뭣…!”
실비아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만큼 세타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으니까.
이 녀석은 진심이었다.
“해줄 수 있겠어?”
“…됐고, 뭔 일을 하려는 건지 들어나 보자.”
“나중에 다 설명해 줄게. 뭣 하면, 생명을 구해준 대가라고 쳐도 좋아.”
“여,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최근 줄곧 그녀를 괴롭히고 있던 문제였기에, 얼굴까지 붉힌 실비아가 소리쳤다.
“아니 뭐, 그 정도로 급하다는 말이지. 근데 왜 소리를 지르냐?”
“아니,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누,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황당하지 않겠냐? 이, 일단 해볼게. 해보긴 하는데…….”
“좋아. 거기까지.”
직후, 세타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잘 부탁한다.”
“자, 잠깐! 골치 아픈 일은 다 떠넘기고 넌 또 어디로 가게?”
“나도 준비는 해야 할 것 아니야?”
짧게 반문한 세타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7써클에 오르더니, 5써클 단거리 텔레포트 정도는 아주 장난이었다.
“이런 썩을…!”
순식간에 둘만 남게 된 실비아가 이내 와락 인상을 구겼다.
벌써부터 그 꼬장꼬장한 노인네들 앞에 갈 생각을 하니 가슴마저 답답해질 정도였다.
어지간하면 그곳에는 더 가고 싶지 않았는데…
홱!
그 불똥은 곧 애꿎은 곳으로 튀었다.
“루나.”
“……?”
“대체 둘이서 무슨 얘길 하고 있던 거야? 무릎은 또 왜 꿇은 거고?”
“…….”
잠시간, 루나가 말없이 실비아를 바라만 봤다.
상황이 그리되자 묘하게 긴장감이 흘렀다.
실비아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의 생각을 이어서 하자면.
둘 중 어느 쪽이든, 왕국 전체를 뒤집어 놓을 ‘빅 뉴스’였으니까.
허나…
“…비밀이다.”
“뭣!?”
실비아가 대번에 도끼눈을 떴다.
뿐만 아니라, 몸을 일으킨 루나는 미련 없이 성 내부로 향했기에.
“아, 진짜! 다들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오오오오!”
이윽고, 절규로 가득한 실비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
다음날.
본격적인 임무 시작에 앞서, 나는 일전의 약속을 이행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순간, 내 손 위로 불꽃 두 개가 만들어졌다.
잠시간 서로 얽히고설키던 그것은 점차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광경은 그다음이었다.
본래 두 불꽃이 하나가 되면 크기 정도만 비대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나.
내 불꽃은 크기는 그대로인데 색깔만 더 진홍색으로 변했다.
압축의 묘리.
크기는 유지한 상태로, 온도만 더 뜨겁게 만든 것이다.
“자, 한 번 더 보여줬으니까 이제 해봐.”
“아니, 아무리 해도 안 된다니까 그러네.”
“그럼 뭐, 여기서 더 어쩌라고?”
“조금 더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을 해 달라는 말이야! 가령 화염의 술식에는 어떤 방정식을 써라. 이런 게 아니라, 그 방정식이라는 것부터 설명을 해달라고!”
“아니, 그거는 기본 아니냐? 언제는 이론 1등이라더니 이리 멍청해서야…….”
“이이익! 아, 몰라. 오늘 교육은 이걸로 끝내. 벌써 힘 다 빠졌으니까.”
털썩 주저앉은 유리나가 그대로 뒤로 누워 버렸다.
잠시 혀를 차며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나는,
“…어?”
곧 눈 위로 이채를 떠올렸다.
꽤나 익숙한 인영이 우리가 있는 뒤뜰의 정원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부탁한 인원 구성, 끝났어.”
“이렇게 빨리?”
“뭐,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이야! 거봐. 실비아 스필 세드릭, 역시 하면 되잖아!”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실비아의 어깨를, 나는 치하의 의미로 몇 번이나 두드려 줬다.
“이리 쉬운 일인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할 걸 그랬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어.”
“엉?”
“네가 무슨 수를 써도 된다고 허락했으니 가능한 일이었지.”
“…잠깐만. 어째 그거 어감이 좀 불안한데?”
순간적으로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런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한 실비아가 말을 잇는다.
“사람들. 특히 마법사들이 궁금해 하더라고. 말은 안 하지만, 어떻게 네 나이에 7써클에 오르는 것이 가능한지. 메테오 같은 희귀 마법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
불안감은 점차 현실이 되어갔다.
“…그래서?”
“일단은 고대 시대 마법서를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되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노라, 그렇게 약을 좀 쳐놨는데…….”
“쳐놨는데?”
“이번 일의 동업자들에 한해서, 네가 아는 마법 몇 가지를 공유해 줄 거라고 약속했어. 그러니까 다들 서로 가겠다고 난리던데?”
“…….”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
꼭 고대 시대 마법이 아니라도, 사람들이 모르면서 쓸 만한 마법들을 나는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으니까.
“…고생했네.”
“별말씀을.”
다만, 묘하게 휘어져 있는 실비아의 눈꼬리는 퍽이나 신경 쓰였다.
독한 계집애.
이 일에 제 감정을 실었구만.
백 프로다.
“…킥. 킥킥킥킥.”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던 유리나가 고소를 터뜨렸다.
나름 천재라는 얘 하나 가르치는 일도 벅찼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교육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근데 넌 필요 없냐?”
“엉? 나, 나도 가르쳐 주게?”
“고대 시대에 이름을 날리던 보조 마법도 제법 알고 있기는 하거든.”
“지, 진짜?”
“물론. 내가 뭣 하러 유리나를 가르치고 있겠냐? 아군의 힘이 곧 내 힘 아니겠냐?”
직후, 나는 자못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비아가 덥썩,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곤 아예 눈까지 반짝이기 시작한다.
“그럼 나도 부탁 좀…….”
“대신 조건이 있어.”
움찔.
대번에 실비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럼 그렇지.”
“너한테 딱히 나쁜 조건은 아닐걸?”
“응?”
“사람들한테 약속한 그 고대의 마법들. 너한테 전부 다 가르쳐 줄게.”
“……!”
실비아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 뜨여졌다.
곁의 유리나는, 아예 입까지 쩌억 벌렸다.
물론 내게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속에서 지어지는 회심의 미소를 애써 숨긴 채 나는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내가 시간에 쫓기고 있어서. 동업자들을 가르치는 건, 나한테 배워서 네가 좀 하라고.”
“그, 그 정도쯤이야…….”
아주 얼굴에 탐욕이 한 가득이다.
역시 마법사들은 다 똑같은 속물인 모양이다.
눈앞의 실비아도 마찬가지다.
입가에 흐르는 저 침 좀 보라지.
“흠흠, 그럼 나한테 가르쳐 줘. 내가 확실하게 전달할 테니까.”
어차피 주력이 아니라면 직접 사용하지도 못할 테지만.
단순히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쁜 모양이다.
물론, 저 표정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유리나 하나만 가르친 나도 절절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 많은 사람들을 홀로 가르치는 일은…
“…그럼, 거래 성립이다.”
아마 어림잡아 수명이 10년쯤은 줄어들지 않을까.
***
별동대는 금세 성 앞으로 모였다.
역시 일 처리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래서 실비아에게 맡겼던 것이기는 하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 아닌가?
“…말씀들은 대충 다 들으셨을 테고, 바로 출발해 볼까요?”
하여, 나 또한 지체 없이 스란의 국경지대로 향했다.
물론 목적지는 이들에게도 미리 설명해 뒀다.
어차피 가는 방향을 보면 알게 될 사실이기도 하고.
이런 일이라는 게, 사전 신뢰가 가장 중요했으니까.
의외인 것은 내 말의 취지에 대부분이 공감했다는 점이다.
공국의 길을 빌렸던 반란군조차 제국에 맞서려면 가장 먼저 공국부터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전쟁을 하러 가는 마당에, 등 뒤를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참고로 이곳 레이브 영지에서 공국까지는 딱히 전이 능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약 하루 뒤, 마침내 테라와 스란을 구분 짓는 경계에서,
“준비들 되셨나요?”
“하, 한데…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 인원으로 국경을 정면 돌파한다니…….”
내가 자체적으로 임명한, 별동대 1팀장 젤다 남작이 의문을 토했다.
참고로 팀장급은 총 열 명으로 구성됐다.
열 명이 한 조씩, 총 일백의 별동대다.
“그럼요?”
“…저는 소문의 워프 마법이라도 사용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단번에 공국의 심장을 치는 거라면, 이만한 소수정예도 충분히 이해가 가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그리 생각했습니다.”
나는 힐끗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들의 눈빛에 여러 감정들이 깃들어 있었다.
불신, 두려움, 고뇌와 갈등…….
이 감정들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기 위해서라도, 큰 거 한 방이 필요했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저들도 이제 속지 않을 겁니다. ‘허풍선이 메테오’에 대한 얘기는, 이미 저들의 귀에도 들어갔을 테니까요.”
“허풍선이… 쩝. 아무튼, 이번에는 그걸 쓸 생각이 없는데요.”
“예?”
“그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명백한 차이가 있거든요.”
옅게 미소 지어준 내가 이내 머릿속으로 몇 가지 마법을 떠올렸다.
전쟁 마법.
그중에서도 공성전에서 수위를 다투는 극상의 파괴적인 힘.
역시 그게 좋겠다.
“라그뇌르의 뇌전이여…….”
우르릉!
내 시전어에 맞춰 잿빛 하늘에 새하얀 번개가 내리쳤다.
꽈릉! 꽈르르르르릉!
얼마 지나지 않아 최초의 뇌전은 금세 수십 개로 불어났고.
어느새 저 하늘 위를 연신 시리도록 하얗게 물들였다.
‘자, 준비는 끝났고.’
지휘관은 배짱이 생명이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조금 더 허리를 곧게 편 내가 정면을 주시했다.
저 멀리, 스란의 장벽이 보인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아마 오늘이 지나고 나면, 이들 모두가 테라의 영웅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럼, 진군(進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