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마스터, 루나 틴 론지에(1)
나는 위풍도 당당하게 전방을 향해 걸어 나갔다.
“…….”
과연 제 입으로 호언했던 대로 헤이즈 후작은 약속을 지켰다.
흑염의 창은 마스터인 그조차 전력을 다해야 간신히 소멸시킬 수 있을 정도였고, 결국 후속타로 이어진 또 하나의 창은 막아내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충실하게 나를 보필하기로 약조했다.
작금의 상황에 대한 전말이었다.
“저는 테라에서 온 이그니스 백작이라고 합니다!”
- 끼이이이이이이이이!
마나가 담긴 내 목소리에 반응하여, 리비아의 창공을 가르던 두 와이번이 괴성을 내질렀다.
직후,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까마득한 하늘 위.
암수로 한 쌍인 녀석들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자못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물론, 이 또한 내 계획의 일부다.
“아, 쟤들은 딱히 걱정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통제하에 있는 마물들이거든요.”
“토, 통제하에 있다니? 설마 저 와이번들이 자네 말을 따른다는 뜻인가?”
“예.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긴 뭣 하지만, 제 제주가 좀 좋습니다. 만약 아군이 된다면, 여기 계신 분들도 결코 실망하지 않으실 정도로요.”
“…….”
고요한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각국의 인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그 수만 일천이 훌쩍 넘었음에도 입을 여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나는 그걸로, 누가 이곳의 실세들인지 대번에 구분 지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테라에서 진심으로 연합 전선에 들어오려고 하는 건가? 그저 구색 맞추기가 아니라?”
어느새 길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10인의 인영들.
그중 선두에 선 아저씨가 이리 물어온다.
키는 채 160이나 될까 싶을 정도로 단신이지만,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는 사내였다.
무엇보다, 주변으로 뿜어지는 아우라가 곁에 선 헤이즈 후작 이상이었다.
그 즉시 입가에 영업용 미소를 베어 문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테라는 아직 한창 내전 중인 것으로 아는데…….”
“내전이라면 이미 완벽하게 종전했습니다. 남 좋은 일만 하다가 나라를 통째로 빼앗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우리 연합군이 리비아로 집결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나?”
“친구에게 들었습니다.”
“친구…?”
나는 말없이 사내의 뒤쪽을 바라봤다.
제 입까지 틀어막은 레베카가 눈을 반짝이며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곧장 한쪽 눈을 깜빡이자,
“세타 님!”
“……!”
레베카는 반갑다는 양 손까지 흔들어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저리 반겨줄 줄은 몰랐는데.
딱히 무안을 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도 곧장 마주 손을 흔들어 줬다.
“좋겠다? 저런 미인이 반겨줘서?”
순간, 유리나가 ‘쿡’ 하고 내 옆구리를 찔렀다.
“별로. 이제는 익숙하거든.”
“재수…….”
“없는 거 잘 알고 있고. 이제 판은 만들어진 것 같지?”
“…뭐. 얼굴만 봤을 땐, 다들 아주 너한테 빠진 것 같기는 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잠시간 유리나와 속닥거리던 내가 이내 주변을 둘러봤다.
뒤늦게 소식을 접했는지, 사람들은 아직도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일반 민중들조차 왕성 주변을 기웃거릴 정도로.
“제 소개는 이만하면 충분한 듯한데… 이제 여쭙겠습니다. 테라도 새로이 출범한 연합 전선의 정식 구성원으로 함께할 수 있을런지요?”
“물론이죠!”
여전한 침묵 속, 오직 길 끝의 레베카만이 망설임 없이 외쳤다.
이런 분위기라면 조금은 주눅이 들 법도 한데 말이지.
내 생각보다 더 당찬 여인이었다.
“…….”
다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미심쩍은 눈빛을 풀지 못했다.
하여, 이즈음에서 나는 승부수를 띄우기로 했다.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대연합 전선의 첫걸음은, 자이툰 왕국으로의 파병 건이라고요.”
“…분명 그렇긴 하네만…….”
“제가 그 선봉에 서겠습니다. 진심에 대한 증명으로, 자이툰에 주둔하는 제국군을 최선을 다해 박살 내보도록 하지요.”
“뭣…!?”
“곁에 계신 헤이즈 후작님은 이미 직접 겪어 알고 계시겠지만…….”
찰나 말끝을 흐리던 내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저는 대륙에 몇 없는, 7써클 마법사거든요.”
***
한편, 테라의 레이브 영지.
실비아가 리비아발(發)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늦은 오후였다.
우웅! 우우웅!
“……!”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실비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침대 위에 대충 던져 놓은 통신용 수정구.
그곳에서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씨, 아직 껄끄러운데…….”
찰나지만 그녀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다 큰 처자가 나신을 내보였다.
비록 치료를 위한 불가항력이었다고는 하나…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성격상, 실비아는 한편으로 짙은 수치심마저 느끼고 있었으니.
아직 당사자와의 대면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처럼 통신용 수정구라는 비대면 접촉이라면 또 모를까.
“후우…….”
고민은 길지 않았다.
녀석이 동맹을 위해 리비아로 향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분명 그 결과와 관련된 일일 텐데,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몇 차례나 심호흡을 한 실비아가 이내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 …뭐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너처럼 항상 한가한 줄 아니?”
- 한가하기는 개뿔이. 지금 내 모습을 보고도 그런 얘기가 나오냐?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고생은 네가 사서 하고 있는 듯한데.”
- 와, 얘 좀 봐라. 너 말 되게 섭섭하게 한다. 이게 다 누구를 위한 일인데?
“…흐흠.”
직후, 실비아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녀석의 행동이 테라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그, 그래서. 갔던 일은 잘됐고?”
- 야, 듣고 놀라지나 마라. 지금 막 리비아에 도착했는데, 테라도 연합 전선의 정식 구성국으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더러 파병군의 수석 마법사를 맡아 달란다.
“수석 마법사? 그 말은…?”
- 뭐긴 뭐겠어. 자이툰으로 급파하는 병력 10만 중 마법사들만 대략 3천은 된다고 들었는데, 그들을 모두 내게 맡긴다는 의미지.
“…그거, 그리 좋게만 볼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실비아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자리에는 언제나 책임이 뒤따른다.
특히나, 자이툰 파병 건은 연합 전선이 제국군을 상대로 선보이는 최초의 항전이다.
만약 첫 전투에서 패하게 되면, 이후의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 너 또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냐?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 참모로서 응당 해야 할 변수의 계산이야.”
- 그런 걸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하는 거야.
“됐고, 자이툰으로는 언제 출발하는데?”
- 아마 내일쯤?
순간, 실비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렇게나 빨리?”
- 어쩔 수 없지.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병력 구성까지 다 마친 상황이던데.
“아무리 네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마나와 체력이 무한하지는 않을 텐데… 괜찮겠어?”
와이번의 존재에 대해 알 길이 없는 실비아로서는 고작 하루 만에 리비아에 도착한 일을 예의 세타의 전이 능력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 뭐야, 걱정해 주는 거야?
“거, 걱정은 무슨.”
- 이야, 이거 영광인데? 천하의 실비아 스필 세드릭 님에게 걱정을 다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까불지 말고 몸조리나 잘해. 너는 우리 테라의 소중한 전력이니까.”
- 예, 예. 누구의 명이신데… 아 참, 루나랑 공주님은 만났나? 약속까지 하고 갔는데, 급하게 출발하느라 내가 확인을 못 해서.
“공주님?”
실비아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두 사람이 만나는 모습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하긴, 여태 앓아누워만 있었으니…
‘…근데 묘하게 기분 나쁘네.’
다만, 빈정이 상한 포인트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속마음은 그녀도 모르게 ‘툭’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직 여유가 있으신 모양이네?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는 걸 보니.”
- 엥? 그게 뭔…….
“네 일이나 잘하라고. 끊는다.”
- 야, 야, 잠깐…!
세타가 채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실비아는 곧장 마나를 거두어들였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방 내부.
“…내가 왜 이러지?”
이윽고, 한껏 미간을 찌푸린 실비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같은 시각.
“…오늘에야말로 꼭.”
루나는 실제로 공주님을 만나러 가고 있었다.
폐하와 공주님이 구출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오래전에 접했다.
그럼에도 당신을 찾아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대게 기사들은 목숨보다 명예를 중요시한다.
그들이 배워온 기사도란 그런 것이었기에.
팔을 내줄지언정, 검을 놓치지 않는다.
적에게 생(生)을 구걸하느니, 끝까지 싸우다 전장에서 스러진다.
같은 의미로, 제 주군을 지키는 데 실패한 기사는 죽어 마땅하다.
아직 정식 기사의 서약을 맺은 것은 아니지만, 루나는 장장 10년 동안 한 사람만을 모셔왔다.
루나에게 있어 공주님은 이미 주군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후우.”
마침내 도착한 4층의 가장 구석진 방.
그 바로 앞에서 루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안에, 꿈에서라도 무사하길 바라던 공주님이 계신다.
이미 수백, 수천 번이나 마인드 컨트롤을 했지만, 막상 오니 감정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우선 무릎을 꿇고 사죄부터 드려야겠지?
죽여 달라느니… 따위의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공주님에게 또 한 번 대못을 박는 일이니까.
…라고 ‘그 아이’가 말했다.
그따위 나약한 소리를 지껄일 시간에, 다시는 공주님을 빼앗기지 않을 궁리나 하라고.
이번에야말로, 이 손으로 직접 지켜내라고.
“…고맙다.”
예의 연녹의 부드러운 미소를 떠올리자 점차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잠시간 가슴을 쓰다듬은 루나가 이내 방문 앞으로 다가서자.
“흥~ 흥~ 흥~”
“……!”
방 안에서 상당히 귀에 익은 콧노래가 들려왔다.
자연스레 루나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한데…
“…시. 그래서 언제 오겠다는 건데? 나 너무너무 심심해. 우린 오래전부터 최고의 파트너였잖아?”
- 늦어도 일주일. 물론, 이전처럼 단독 행동은 금지야. 그리하면, 이번에야말로 너랑은 절대로 협업하지 않을 테니까.
“에이. 또 그 얘기야? 너도 인정했잖아. 설마하니 ‘그’ 핏덩이가 그만한 실력자인 줄 알았겠냐고?”
-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함께라면 분명 이길 테니까.
“그건 인정. 아무튼 좀 궁금하기는 해. 항상 남의 빈집만 털어대던 녀석이, 이번엔 역으로 털리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말이야.”
이즈음하여, 루나의 표정은 한껏 굳어져 있었다.
‘대체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거지?’
잠시 눈을 감고 기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역시나 인기척은 하나였다.
하면, 통신용 수정구일까?
‘…잠깐. 이 음침한 기운은 분명…….’
찰나 루나가 눈을 크게 떴다.
감각을 확장하자, 비로소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기운의 정체가 문제였다.
‘마기?’
루나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 순간.
투-콰아아아아아앙!
“…쿨럭!”
루나가 피를 흩뿌리며 장장 10여 미터나 뒤로 나가떨어졌다.
빠르게 검기를 ‘막’ 형태로 둘러쳤음에도 기습을 완벽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산산이 부수어진 출입문의 파편이, 루나의 신체 곳곳으로 박혀 들었다.
- 뭐야. 무슨 일이지?
“잠시만 기다려 봐~ 웬 쥐새끼가 있어서.”
예의 두 개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린 직후.
마침내 희뿌연 먼지를 해치며 눈앞으로 나타난 인영은…
“응? 안면이 있는 아이였네?”
“공… 주님.”
예상대로 루나가 간절히 바라마지 않던 여인.
테라의 공주, 레이지 칸 테레이라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