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70화 (170/251)

170화. 연합 전선(2)

“물러들 서게.”

“……!”

병사들 사이로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중앙의 가장 커다란 천막.

그곳에서 한 중년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당신은?”

“소개가 늦었군. 부족하지만 이곳 진영의 임시 사령관을 맡고 있는 헤이즈 후작이라고 하네.”

“앗. 그 유명한 리비아의 초목검?”

유리나의 눈이 대번에 동그랗게 뜨여졌다.

물론 내게도 일견식 정도는 있는 이름이었다.

리비아의 헤이즈 후작.

기실, 그는 왕국의 셋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비록 왕국의 검사들이 제국보다 두세 수 아래로 평가받는다더라도 명실상부 초인의 경지인, 마스터의 위명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살수들이었지만, 나 또한 먼젓번에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러면 급이 맞겠지? 이제 그만 내려오시게. 나이가 들어 그런지, 고개가 심히 아프니.”

“…그러죠.”

나는 순순히 상대의 말에 따랐다.

와이번이 곧장 제 고개를 수그린다.

직후, 가볍게 지면으로 내려서는 나를 헤이즈 후작이 마치 원숭이라도 보듯이 바라봤다.

“…내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그 마물은 분명 와이번처럼 보이네만.”

“제대로 보셨네요.”

“하면, 그대는 마법사인가?”

“일단은요?”

“그렇다면 더더욱 놀랍군. 나는 지금 전설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니까. 비록 다른 분야지만, ‘테이밍’이라는 주력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네.”

“…….”

여기서 나는 구태여 반응하지 않았다.

침묵이 곧 긍정이라.

상대가 나를 높게 평가해 준다면, 그것대로 좋을 일이니까.

적어도, 첫인상을 보다 강렬하게 심어줘야 할 이런 자리에서라면 말이다.

“그보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테라의 이그니스 백작이라고 했나?”

“네.”

“이상하군. 이만한 실력자라면 귀동냥으로라도 들어는 봤을 법한데, 완전히 생소한 이름이야. 한데도 백작, 백작이라…….”

순간, 말끝을 흐리던 헤이즈 후작이 제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겠지. 적어도 이 나라 리비아에서라면.”

“무슨 뜻입니까?”

“들어봤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리비아에는 특별한 인사법이 있다네.”

“인사법이요?”

“달리 대(大) 초원의 왕국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강자를 숭상한다네. 강한 사자가 초원을 차지하는 것처럼 힘을 가진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그 존재 자체로 대우받지.”

“그 말씀은…?”

“해서 말인데, 나와 한번 겨뤄보겠나?”

어쩐지 서론이 길다 싶더라니.

역시 예상대로의 흐름이었다.

“그저 실력이면 되네. 그거면 그대가 테라인이라는 사실도, 귀족이라는 신분도 달리 증명할 필요가 없지.”

“…요즘 몸 깨나 쓰시는 분들이 부쩍 저를 많이 찾네요. 일단은 저도 마법사인데 말이지요.”

“아, 물론 핸디캡 정도는 줄 수 있네. 선공은 양보하지. 마법사이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법으로 먼저 나를 공격해보게.”

“진심이세요?”

“그래. 만약 진짜 테이밍을 주력으로 삼는 마법사라면, 와이번이랑 함께 덤벼도 좋네. 그 또한 실력으로 봐야 할 테니.”

실제로 마법사에게 선공을 양보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핸디캡이었다.

일대일에서 마법사가 검사에게 패하는 이유의 열에 아홉은, ‘속도’에 있었으니까.

당연하게도 검사는 마법사가 캐스팅을 끝마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마법이 채 시전되기 전에 베이고, 찔려 만신창이가 될 뿐.

“…후회하실 텐데.”

“후회? 훗. 내가 바로 초목(草木)의 검사 헤이즈 드렌 아이슬란이네. 내 사전에 후회 따위의 단어는 없어.”

마스터답게, 이름 앞에 단독 명칭까지 붙었다.

다만,

“하면, 오늘 그 초목 다 태워 드시겠네요.”

“후후후. 패기는 좋군.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지?”

“예. 호의는 기꺼이 받들겠으니, 무르지나 마십쇼.”

화륵! 화르르르륵!

직후, 내 주변으로 무수한 불덩이들이 생성되었다.

“호오? 사실은 불꽃까지 다룰 줄 아는 더블 캐스터였나?”

헤이즈 후작의 얼굴 위로 흥미가 깃들었다.

아직도 여유로우시네.

곧 그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사뭇 기대가 됐다.

화르르르르르르륵!

예의 불덩이들이 순식간에 형상을 갖추어간다.

최초 손가락 마디 크기에 불과하던 그것은, 이윽고 일반 검보다 더 긴 ‘홍염의 창’이 되었다.

그 시점에서, 나는 힐끗 유리나 쪽을 돌아봤다.

“보고 배워. 이걸로 하나니까.”

“엥?”

이제는 익숙한지 유유자적 구경만 하던 유리나가 화들짝 놀랐다.

“뭔 소리여? 이게 하나라니?”

“이거라면 지금 네 경지로도 충분할 테니까. 첫째로 생성의 술식에는 다중 가산식에 점화의 식을 섞어. 칠 대 삼의 비율로. 개념이라면 이미 수업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겠지? 여기서부터가 중요한데…….”

“자, 잠깐만. 너무 빠르거든?”

“귀 활짝 열고 들어. 두 번은 설명 안 할 테니까.”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헤이즈 후작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뭐하긴요. 보시는 대로 얘 교육하고 있죠.”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서 여유 따위를…….”

나는 곧장 그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여유라면 그쪽에서 먼저 부리셨잖아요?”

“……!”

찰나, 그의 얼굴 위로 싸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후회하지나 말거라.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니, 건방을 떤 대가로 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뜨려 놓을 생각이니까. 그 불꽃의 창들 중 하나라도 내 신체에 닿는 순간, 핸디캡은 끝이다.”

“그러시던지요.”

그럼에도 내 시선은 여전히 유리나에게 고정된 채였다.

“지금부터 내가 설명하려는 건, 저 써클의 마법들로 몇 수 위의 마법과 비등한 위력을 내는 방법이야.”

“그, 그런 방법이 있다고?”

“영업 비밀이니까 이다음은 머릿속으로 직접 불러줄게. 귀는 열고, 두 눈은 내게 집중해.”

화륵! 화르르르르륵!

직후, 불꽃의 창 수백 개가 하나로 뭉쳐졌다.

다른 마법사들이 본다면 가히 기겁을 할 만한 광경이었다.

백 단위의 무수한 마법들을 동시에 의지대로 다루는 일만 해도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데, 그것들을 소멸시키지 않고 한데 뭉치는 건…

푸-화아아아아아아악!

…당대 대륙의 마법사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영역일 테니까.

합치고 보니 불꽃의 세기가 엄청났다.

주변의 풀 더미가 절로 지글지글 타버릴 정도였으니.

“허어억! 무, 물러나라!”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주춤주춤 걸음을 물렸다.

어느새 헤이즈 후작조차 멍하니 입만 벌린 채 이쪽을 바라만 봤다.

“기본 개념은 다 불러줬는데. 어때, 쉽지?”

“웃기고 있네! 세상 사람들이 너처럼 다 괴물인 줄 아냐?”

“지금 네 경지면, 논리만 깨우쳐도 금세 해낼 수 있다니까 그러네.”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한 내 시선이 그제야 헤이즈 후작에게 향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호의를 받들어 볼까요? 파이어 스피어는 고작 4써클에 불과하지만, 이건 제법 아플 겁니다.”

순간, 불꽃의 창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홍염(紅炎)이 흑염(黑炎)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갑니다.”

“자, 잠깐!”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것일까?

헤이즈 후작이 부랴부랴 제 검을 고쳐 쥐었다.

허나, 이미 늦었다.

직후 ‘퉁!’ 하는 작은 소음과 동시에.

파르르르르르르르륵!

예의 흑염의 창이 대기를 불사르며 빗살처럼 쏘아져 나갔으니까.

***

한편, 리비아의 왕성.

“왜 그랬느냐?”

레베카는 실로 오랜만에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거듭 약속했기 때문이다.

영향력을 위해 둘이서 함께 참석했지만, 식당 내에서만큼은 괜한 발언을 삼가기로.

지금은 연합 전선이 첫걸음을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이니까.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한 법이다.

이런 때일수록 말을 아끼고, 행동 가짐을 조심히 해야 한다고 누누이 일렀건만.

“뭔 말이라도 해봐라. 아빠도 이유라도 좀 알자.”

“…몸을 사리기만 하면, 결국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질 뿐이니까.”

“그게 아니야. 그 이전에 저들이 몸을 사리는 이유부터 생각해야지. 먼저 움직이는 놈이 가장 피해가 클 것이 자명한데, 어느 누가 허울뿐인 선봉을 맡으려 하겠느냔 말이다.”

“자국 이기주의. 처음부터 그런 분위기가 팽배해서야, 어떻게 저 제국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겠어?”

“하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만 골라서 하는구나. 이리 각국이 뜻을 모아 한데 모였지만, 누구도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확신하지 않는다. 아니, 현실적인 수치로 승산은 4할도 채 되지 않을 게다.”

“…….”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처음 맞붙는 나라는 열에 열의 확률로 처참하게 깨질 거라는 의미다.”

“…….”

“자랑스러운 선봉대? 그딴 건 개나 주라지.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법이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제발 그 성질머리 좀 죽이란 말이야!”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레베카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본 그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국군을 상대로도 이길 수 있어.”

그녀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검은 마물의 숲.

그 무시무시한 마물들을, 고작 혼자만의 힘으로 일거에 쓸어버리는 엄청난 신위를.

진짜 나이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는 이미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까마득히 넘어섰다.

“콩깍지도 병이라더니, 내 딸이 이러니까 진짜로 미치겠네. 이유 있는 자신감이라는 건 아빠도 안다. 마법 대전에서 제법 이름을 날렸다지? 하지만, 그래봐야 너랑 동갑인 핏덩이가 아니냐?”

“응? 마법 대전이라니?”

“하도 세타, 세타, 거리길래 따로 조금 알아봤다. 테라에서는 제법 유명한 이름이더구나.”

“……!”

레베카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세타 님은 어디까지나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유분수지.

은인에 대한 뒷조사를 감행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아빠는 세타 님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개막전에서 트라오레 후작의 아들을 꺾고 파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단순 추정만으로, 왕국 제일의 천재라는 제노스 델 카이클과 비견되는 재능이라고.

아니, 어디 그가 왕국에 국한되는 천재던가?

마법사들 사이에서 제노스 델 카이클은 대륙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천재였다.

그런 이와 최소 동급이라는 말인즉,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일순 레베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다른 무엇보다, 세타 님이 실제로 또래라는 사실이 기뻤다.

“텄네, 텄어. 애비 말은 아주 한 귀로 흘려듣는구먼. 에잉!”

이내 골드런 공작마저 완전히 두 손 다 들었다는 표정이 되었을 때.

“주, 주군!”

웬 사내가 열린 문틈으로 쏜살같이 들이닥쳤다.

리비아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는 실력자이자, 골든 버드 상단 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 알렌이었다.

“무슨 일이지, 알렌?”

“그, 그게 테라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

그 즉시, 두 부녀의 시선이 딱하고 마주쳤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네 님이 드디어 오신 모양이구나.”

“제가 직접 응대할게요! 지금 어디에 계시죠? 왕성 안으로 들어오셨나요? 혹, 무례를 범하지는 않으셨겠죠?”

레베카의 입에서 다다다, 말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한데 알렌의 표정이 사뭇 심각했다.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설마, 아니죠? 아니라고 해줘요, 제발.”

직후, 레베카가 간절한 눈빛으로 알렌을 쳐다봤다.

“지, 직접 나와서 보시는 편이 나을 듯하, 합니다. 이게 설명하기가 좀…….”

심지어, 답지 않게 알렌의 목소리가 연신 떨려대고 있었다.

불끈 주먹을 쥔 레베카가 지체 없이 방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두 부녀는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왕성에서 성문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성도(城道).

무수한 사람들이 그 양옆으로 마치 해일처럼 쫙 하고 갈라져 있었다.

문제의 인영들은 그 사이를 천천히 걷고 있었고.

중요한 것은,

“헤, 헤이즈 경…?”

전신 곳곳에 그을린 자국이 가득한 리비아의 자랑.

헤이즈 드렌 아이슬란이 마치 호위라도 되는 것마냥 웬 잘생긴 청년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레베카는 청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번에 상황을 이해한 레베카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펴졌다.

그리곤 후다닥 그쪽으로 뛰쳐나갔다.

“세타 님!”

“이게 대체…….”

아직 상황을 단 ‘일’도 이해하지 못한 골드런 공작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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