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66화 (166/251)

166화. 통합 테라군(2)

“…….”

내부를 잠식한 것은 숨 막힐 듯한 침묵이었다.

선을 넘은 건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차피 돌이킬 수도 없지만…

꿀꺽.

나도 사람인지라,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긴장이 됐다.

“…약조라면 해줄 수 있지.”

“저,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그 연유가 궁금하군. 그리 내 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속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 행동이, 아직은 허용 범위 내인 듯했기에.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레이지는 그 아름다운 외모 탓에 내전 이전부터 무수한 귀족들이 탐을 내던 아이였어. 한데도 마다한다면…….”

“물론 공주님께서는 아름다우십니다. 제게는 과분할 정도로요. 다만, 제가 아직 결혼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게 아니겠지. 역시 들은 거겠지? 이 저주받은 왕실의 비사를.”

“……!”

내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짐짓 인상을 굳힌 우르고스 국왕이 나직이 반문했다.

역시 정치로 닳고 닳은 인물이라서 그런지, 눈치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 부분은 분명 내 업보니까 딱히 무어라 할 생각은 없지만… 아직 젊어서 그런가? 내 너를 진심으로 아끼니 하는 충고지만, 언행에 각별히 유의하는 것이 좋겠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는 말, 들어는 봤을 테지?”

“…….”

“아직은 큰 위기를 겪어보지 않아 그런 듯한데, 진짜 호랑이를 만나게 되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이야.”

호랑이가 무에 무서우리.

내 전생은 무려 용이건만.

물론 그런 속내와는 별개로, 왕에게 완전히 미운털이 박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송구합니다. 폐하의 뼈아픈 충고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흥.”

나는 고개까지 숙였건만, 우르고스 국왕은 그저 코웃음으로 맞응수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듯싶다.

고작 스물도 되지 않은 핏덩이에 무늬뿐인 귀족인 나지만.

다른 한편으로, 7써클 유저는 반드시 품에 안고 싶은 인재일 테니까.

왕국 유일의 최고위 마법사가 함께한다면, 추락한 국왕파의 위상도 격상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걸 위해 자기는 이 왕실의 은밀한 비사까지 흘려줬는데, 나는 반대로 삐뚤게 나오고 있었으니…

쩝.

화를 내는 것도 이해는 간다.

어쩌면 이 시간 이후로, 나는 국왕이라는 큰 적을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약간의 작업이 필요했다.

큰 수고는 필요치도 않다.

단지, 아직 내 알맹이는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만 하면 될 뿐이니까.

“폐하, 무례인 줄은 압니다만, 제 마음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처음 결혼이니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대관절 그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더냐?”

“그건…….”

여기서 나는 잠시간 의도적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훗. 되었다. 이미 네 생각은 잘 알겠으니. 나는 오히려 네가 짐의 마음을 이해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예…?”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보거라. 대대로 조상님 대부터 철칙처럼 내려져 온 말씀이 있다. 반드시 지켜져야 할 약속 말이다. 더군다나, 윗대의 업을 내 대에서 청산하려 해도 문제다.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작금의 상황처럼. 정략결혼 따위의 방법을 쓰지 않는 이상, 저들은 언제든 내 목을 노리려 들 테니까.”

“그 부분은… 만약 폐하께서 처음부터 바꾸려고 노력하셨다면, 결과 또한 바뀌지 않았을까요?”

“무려 수백 년이다. 선대부터 쌓아온 그 무거운 업이, 고작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끊어질 수 있겠느냐? 카이클 공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쿠데타를 준비했다. 무려 내가 왕자였던 시절부터!”

“…이해했습니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 저는 폐하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네 녀석도 똑같은 종자라는 뜻이군. 짐이 그리 총애했건만.”

우르고스 국왕이 차갑게 조소했다.

허나,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는, 결혼만큼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

이윽고 내가 마음속의 대답을 내어놓자, 찰나 우르고스 국왕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라…?”

“잠깐도 아니고, 평생을 함께해야 할 반려입니다. 한데, 마음에도 없는 이와 어찌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예. 저는 권력에 큰 욕심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쭉 같이 살고 싶은 소박한 욕심만 있을 뿐이지요. 사랑하는 상대가 아니라면, 결혼은 추호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직후, 우르고스 국왕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눈가에 눈물도 찔끔 내비치는 것이, 가히 유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크크크크… 내가 깜빡했군. 네 나이가 이제 고작 스물이라는 사실을. 능력이 너무 출중하여 깜빡 잊고 있었어.”

“그 말씀은…?”

“아, 오해는 말게. 칭찬이니까. 푸흐흐흐흐. 그래.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부럽군. 가문이니 핏줄이니에 얽매이지 않고, 제 자유의사로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 젊음도.”

“소, 송구할 따름입니다, 폐하.”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 숙이는 내 모습에 우르고스 국왕이 눈을 빛냈다.

“정이 네 뜻이 그렇다면, 인사 차원에서 공주를 내가 직접 소개해 주는 일 정도는 괜찮겠지?”

“아…….”

순간, 왕이 정색을 하곤 말을 잇는다.

“이것마저 거절하려고는 하지 말게. 좋아하는 마음도, 눈으로 봐야 생기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그 정도라면… 알겠습니다.”

“좋군. 아주 좋아.”

무엇이 그리도 흡족한지, 우르고스 국왕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오래간만에 즐겁군. 청춘이란 좋은 것이야. 곧 있을 살얼음판도 내 기껍게 걸을 수 있겠어.”

“화, 황송하옵니다.”

“조만간 내 자리를 마련해 보지. 그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이그니스 백작…….”

찰나 멈칫한 그가 재빨리 뒷말을 수정했다.

“…아니, 이제는 예비 공작 각하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노, 놀리지 마십시오. 그저 꿈은 클수록 좋기에, 제 패기라도 보여드릴 겸 드린 말씀일 뿐이었습니다.”

“그게 패기라면 내 아주 분에 넘치도록 봤구먼. 하하하하하하!”

또 한차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린 우르고스 국왕이 이내 손을 휘저었다.

“그래. 이만 나가보게. 조금 뒤에 회의실에서 보지.”

“예, 폐하.”

기다려 마지않던 말이었기에, 나는 곧장 예를 취하곤 출입문을 나섰다.

그곳을 나서는 즉시,

“…연기 한번 더럽게 힘드네.”

누구도 들리지 않을 혼잣말을 조용히 뇌까리면서.

***

대략 1시간 뒤.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나서야 나는 대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와중이었다.

“…….”

지금 막 들어서는 내게 무수한 시선들이 집중됐다.

왕이 회의실을 살얼음판에 비유했던가?

막상 와보니, 과연 그 말 대로였다.

검만 꼬나 쥐지 않았을 뿐.

흉흉한 공기가 이미 내부에 한가득이었으니까.

아마 기세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살인이 일어났을 분위기였다.

“설마하니, 제 동료도 서슴지 않고 베어내는 간악한 반란군 놈들과 한 테이블에 앉게 될 줄이야…….”

“풋. 다 무너져 가던 놈들이 또 입으로 씨부려대기 시작하는군.”

“뭐야!?”

시작은 해방군 쪽 귀족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소처럼 우직하게 생긴 그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고성을 질렀다.

“말조심해라! 나는 이미 내전에서 가족과 가문을 모두 잃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국이고 뭐고 네놈들부터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야!”

“병신.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보시던가.”

“이 개자식이!”

당장에 예의 소를 닮은 사내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거 뽑으면 넌 뒈져.”

“입 닥쳐라! 내 네놈만큼은 반드시 쳐 죽여야겠다!”

이 험악한 광경에 몇몇이 더 일어나 기세를 뿜어냈다.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외세의 침략과 민족의 분단.

그 아슬아슬한 간격의 사이에서 대부분이 설령 제국의 식민지가 될지언정,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만큼 양 군이 지닌 감정의 골이 깊다는 뜻일 테지만…….

이대로라면, 동서나 남북으로 나라를 반으로 갈라 통치하자는 말까지 나올 분위기였다.

“자자, 그만들 하시고요. 여러분들이 아직 나라를 빼앗겨 보지 않아서 그런 말씀이 나오시는 것 같은데…….”

다만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내가 미리 준비한 물건이 있었다.

자이툰이 함락되는 즉시, 나는 레베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삼 주야는 더 지난 바로 며칠 전에야 그 회신이 왔고.

“여길 좀 봐주세요. 거기, 칼들은 집어넣으시고요.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그건… 통신용 수정구?”

“네.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특정 장소를 보여드리려고 하거든요.”

우우웅!

직후, 나는 지체 없이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곧 웬 처음 보는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수정구 너머의 그는 조용히 옆으로 비켜섰다.

곧 어느 대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이제는 모두가 수정구에 시선을 모으고 있을 무렵.

“…도시가 상당히 낯이 익어. 저곳은 분명… 엘리도르가 아닌가?”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엘리도르는 자이툰의 수도였다.

달리 은의 도시라 불리는 장소답게.

건물 곳곳에 순은의 왕국 문양을 새겨놓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도시다.

한데…

“…으음. 저기가 정녕 내가 알던 엘리도르란 말인가?”

이제 그곳은 원래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수정구가 투영하는 형상에는 오직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들만이 가득했으니까.

심지어, 때때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음영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의 통솔하에, 사람들은 쇠붙이며 돌들을 실어 날랐다.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피골마저 비쩍 곯아 있을 정도였다.

“…저들은 분명 민간인일 텐데, 어찌 저리도 끔찍한 짓을…….”

채 말을 잇지 못하는 한 귀족을 향해, 나는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전쟁 중이니까요. 국민들까지 사역에 동원하는 것이겠지요. 집에 있는 포크며 스푼들을 녹여 무기로 만들게 할 수도 있고, 인원이 부족하면 강제로 징집할지도 모르구요.”

“그런…….”

“하면 이제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게, 같은 민족끼리 피 터지게 싸우다 저들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까?”

“…….”

이어지는 내 물음에도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대단한 카이클 공작과 인버스 공작을 포함하여.

상석의 국왕도.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우던 귀족들도, 이미 제자리를 찾은 지 오래였다.

그 적막함 속에서,

“…일국양제(一國兩制).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체제를 제안하지.”

“……!”

여태 침묵을 지키던 카이클 공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바로 어제까지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밀던 사이다. 설마하니, 이 잠깐의 회의만으로 사이좋게 제국군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지?”

“음…….”

“우리는 우리대로. 해방군은 해방군대로, 외세의 침략을 막도록 하지. 그때까지는 임시 휴전이다.”

제 의견을 내어놓은 카이클 공작이 곧 상석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동의하시오, 국왕?”

“이, 이런 무엄한!”

우르고스 국왕이 곧장 손을 들어 귀족들을 제지했다.

“되었다.”

“폐, 폐하. 하지만…….”

“카이클 공작. 내 생각은 물을 필요 없다. 나는 전적으로 저기에 있는 이그니스 백작의 의견에 따를 테니까.”

“……!”

모두가 기함했다.

때 아닌 기습 공격을 받은 나조차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어, 어찌 그런 말씀을…!”

“이 시점에서는 나보다, 저 인버스 공작보다. 다른 누구보다도 이그니스 백작의 입김이 크다는 사실을, 그대들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나?”

“…….”

“그저 자존심 탓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뿐. 아마 저들도 이그니스 백작이 가장 껄끄러울 테지.”

이윽고 왕이 말을 마치자 카이클 공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깊은 곳에 자리해 있는 것은, 분명한 ‘감탄’이었다.

“…자리보전을 위해 마지막 자존심까지 내던지셨군. 다만, 가장 현명한 선택이기도 해. 그 말대로 우린 다 무너진 해방군보다, 두 마탑주와 자유연합을 등에 업은 7써클 마법사가 더 골칫거리니까.”

“이 작자가 그래도!”

보다 못한 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만!”

“……!”

“…폐하께서 제게 일임하셨으니, 지금부터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카이클 공작님의 의견은 불가(不可)합니다. 일국 이 체제요? 제국군을 물리치고, 겨우 전쟁의 지옥에서 벗어난 국민들에게 또다시 끔찍한 고통을 겪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

내 완고한 반대 의사에, 반란군 쪽 사람들이 대번에 반발했다.

“저쪽은 당장 눈앞의 우리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쟤 놈은 벌써 머릿속에서 제국군까지 물리치셨군.”

“가만 두고만 봤더니 정말로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건방진 애송이 자식이…….”

“대체 네놈 혼자서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당장 3년간의 내전으로, 전 국토가 피폐해져 먹을 것부터 걱정해야 할 판국에!”

마지막 말이 핵심이었다.

내전으로 인한 극심한 식량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에, 현재 테라의 영토는 너무나 황폐해져 있었다.

하니, 나는 지금부터 그 문제부터 해결하려 한다.

“만약 해결할 수 있다면요?”

“……!”

“제게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있다면, 두 공작님께서는 향후 있을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전적으로 제 명에 따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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