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통합 테라군(1)
달이 휘영청하게 떠오른 밤.
“…….”
마침내 우리가 탄 배도 멈춰 섰다.
선박 위의 무수한 사람들이 가장자리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봤고.
뭍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은, 분노 가득한 시선으로 이쪽을 올려다봤다.
“이제야 왔구나, 폐하의 은혜를 저버린 간악한 대역도 놈들!”
시작은 해방군의 대표나 다름없는 인버스 공작이었다.
선두로 나선 그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목청을 높였다.
“역도들은 당장 이리 내려와 오라를 받으라!”
“훗. 같잖은 승냥이 놈이…….”
이에, 카이클 공작도 지지 않고 전면으로 나아갔다.
그 입가에 여태 보지 못했던 비릿한 미소가 자리해 있었다.
“폐하의 은혜는 무슨. 그저 내가 두려워 방향을 튼 겁쟁이가, 입은 다시없을 충신인 양 지껄여 대는구나.”
“하하하하하하하하!”
배 위의 사람들이 대번에 폭소를 터뜨렸다.
그럴수록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져만 갔다.
이제는 분분히 검을 뽑아 드는 이들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감히 나를 모욕하다니!”
얼굴을 붉힌 인버스 공작이 분기탱천했다.
모두가 내 예상 범위 내의 상황이었다.
하여, 어떻게 하면 이 꼬인 실타래를 잘 풀어나갈 수 있을까, 홀로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고생 많았다, 이그니스 백작! 아주 큰 공을 세웠어. 솔직히 특별한 기대는 하지 않았건만, 이리 훌륭하게 적장을 끌어들일 줄이야.”
“……?”
내 머리 위로 대번에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저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이곳에서 역도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궁수들은 화살을, 마법사들은 각자 주력의 마법들을 준비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날 선 촉들이 당장에 이쪽으로 겨누어졌다.
주변으론 보이지 않는 마나의 기류가 들끓어 올랐다.
분위기가 그리 흐르자, 선박 위의 험악한 기세는 곧장 내게로 집중되었다.
“역시 함정이었나!? 이 빌어먹을 애송이 새끼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애당초 제국군이 테라를 노린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건만…!”
“어허. 화가 날지언정 말은 가려서 하게. 그건 공작 각하의 결정이셨어!”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누군가 실수로라도 쇳소리를 낸다면, 당장에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
다만 이상한 점은.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음에도, 정작 카이클 공작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었다.
그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카이클 공작은 이미 제국군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있었군.’
역시 그는 호랑이였다.
일신의 능력은 비범하며.
더하여, 절대 누군가의 아래에는 있지 못하는.
“동요하지 마라. 들개가 모여봐야 개새끼들일 뿐이다. 이미 강을 건넌 이상, 이 인원만으로도 적들을 궤멸시키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인즉!”
“……!”
‘미친’이라는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들어갔다.
전력의 차이는 압도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정예만 엄선했다곤 해도, 이쪽은 끽해야 천여 명 남짓이었으나.
뭍 위의 인원들은 어림잡아도 오천을 훌쩍 넘었으니까.
급하게 모은 머릿수만 이 정도였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전력은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카이클 공작은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직후, 이윽고 명이 떨어졌다.
기세에 밀릴 새라 카이클 공작 쪽 사람들은 더욱 힘차게 외쳤다.
이대로는 안 된다.
작금의 광경이야말로, 제국이 가장 원하던 상황이었으니.
“잠깐만요!”
하여, 곧장 내가 나섰다.
목소리에 마나까지 담았다.
그럼에도 대치를 이룬 양 군(軍)은 살기를 거두지 않았다.
때문에…
콰우우우우우우우우!
“……!”
어쩔 수 없이 나는 일부 힘을 드러내기로 했다.
마법 왕국이라 불리는 테라답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누구보다 마나에 민감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나는 아낌없이 일대 전체로 기운을 발산했다.
전신에 잠들어 있는, ‘7써클’의 마나를.
“무, 무슨 놈의 마나가…!”
“…제대로는 아직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 실력 행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
“하긴 이미 눈치채고 있는 사람도 있기야 하지만.”
힐끗, 제노스 쪽을 눈으로 흘긴 내가 말을 잇는다.
“예상들 하셨겠지만, 저는 이제 완벽하게 7써클의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
찰나, 숨 막힐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대부분이 멍하니 입만 벌렸다.
일부는 아예 마법까지 디스펠되고 있었다.
말에는 거짓이 있을 수 있으나, 마나에는 오직 진실만이 존재하니까.
제 전신으로 느껴지는 농도 높은 마나를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힘 있는 자가 곧 법인 세상.
더욱이 이런 난세에서 그 법칙은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곧 육천이나 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집중되었고,
“그러니까, 명색이 최고위 마법사인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
“단언컨대, 여기서 저희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이 나라 테라는 결국 서부 자이툰과 마찬가지로 무너지고 말 겁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쐐기를 박았다.
“대표적인 예로… 파랑의 검사 웨이브로 공작. 이름 정도는 다들 들어보셨겠죠?”
“…….”
“제가 ‘직접’ 맞붙어본 결과, 그는 제 위명에 결코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지닌 강자였습니다.”
“……!”
마침내 내가 말을 마치자, 순식간에 경악의 폭풍우가 주변을 잠식했다.
***
이후, 나는 말의 진위를 증명하기 위해 색욕의 이능까지 선보여야 했다.
물론 그 근본은 철저하게 감췄다.
실질적인 능력은 워프와 다를 바 없었기에, 적당히 내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마법이라고 둘러댔다.
덕분에 나는 역사상 다시없을 천재라는 찬사를 또 한 번 듣게 됐다.
…솔직히 조금 낯부끄럽긴 한데.
향후 있을 ‘통합 테라군’의 출범을 생각하면, 내심 반길 만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현재.
밤이 깊었으니, 날이 밝는 대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어보자는 양 군의 합의에 따라,
털썩!
“이제야 한숨 돌리겠네.”
곧바로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허나, 세상만사는 역시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벌컥!
“…개뿔.”
노크도 없이 방 내부로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오늘도 밤잠은 텄구나.
그리 생각하며 누운 채로 고개만 돌리자,
“어떻게 된 거냐? 7써클이라니?”
누구보다 먼저 나를 찾아주신 두 스승님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제자로서 예는 갖추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7써클이면 대장이랑도 동급 아니야?”
“단순 경지로는 그렇지. 거참 기분이 요상하네. 이러다 조만간 제자한테 추월당한 모지리 스승 취급받는 거 아닌가 몰라?”
“치솟은 입꼬리부터 내리고 말씀하시죠. 입에서 나오는 말이랑 표정이 상당히 다르십니다만.”
“크흠. 내 표정이 뭐 어떻다고… 암튼, 실력을 갖췄으니 그에 합당한 자리를 내어주어야겠지?”
에이스 스승님을 향해 가볍게 손사래 친 세논 스승님이 이내 내게로 다가선다.
그리고는,
“앞으로 내 너를, 자랑스러운 조직의 부 연합주로 임명하노라, 제자야.”
“…뭣!? 대장! 그럼 나는?”
“애초에 부대장은 여럿이라도 괜찮거든? 물론 대가리는 하나여야겠지만.”
“아니, 어이가 없네. 자기는 제자한테 추월당할까 걱정하면서,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동급으로 만든다고?”
이내 방방 날뛰기 시작하는 에이스 스승님을 향해,
“어쩌라고. 꼬우면 네가 대장 하던가.”
세논 스승님은 언제나처럼 단 몇 마디로 마주 응수해 주셨다.
***
아군은 모두 떠나가고, 새롭게 설치된 반란군의 천막들만이 남아 있는 강 뭍.
“…….”
멀리서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는 한 인영이 있었다.
“…이러면 나만 바보가 된 셈이잖아.”
칠흑 같은 흑단의 머리칼을 지닌 인영의 정체는 루나였다.
달빛 아래에 고고히 선 그녀는, 자태만큼은 어느 여신에 뒤지지 않았다.
“뭐? 등을 맡아줘? 진짜 부끄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 루나는 무척이나 수치스러웠다.
7써클 마법사라니!
그 아이가 속으로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고작 엑스퍼트에 불과한 기사가, 앞으로도 지켜주겠다느니 하는 시건방진 소리를 해댔으니…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해.”
루나는 자존심이 상당히 강한 편에 속했다.
더 나아가, 살아오면서 입으로 내뱉은 말들은 반드시 지켜왔다.
허나, 지키지 못할 약속의 이행은 만용이요, 허세일 뿐이다.
그러니까,
“…최소로 잡아도, ‘마스터’는 되어줘야 약속을 지킬 수 있겠지.”
다만 그 경지는 혼자만의 훈련으로 이룰 수 없었다.
하여, 루나는 그 길로 곧장 누군가를 찾아나섰다.
휘오오오오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걷기를 대략 수십 분여.
과연 운명의 신은 그녀의 편이었던 것일까?
마침, 거짓말처럼 성에서 빠져나오는 한 사내와 마주쳤다.
“어라? 예쁜 아가씨, 이 야밤에 혼자 어딜 갔다 오는 길이래?”
“…8월의 검사님.”
“그런 낯간지러운 호칭은 집어 치우라니까 그러네. 그냥 에이스라고 불러. 아님 에이스 씨나 님도 좋고.”
“…….”
“…뭐야? 표정을 보니, 나한테 무슨 용건이 있는 모양인데?”
순간 고개를 갸웃한 에이스가 천천히 루나를 향해 다가갔다.
“뭐, 미인의 용건은 언제나 환영이다만… 안 그래도 기분이 꿀꿀했는데, 어디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심야 데이트라도 할까?”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엉?”
“저랑 싸워주십시오.”
“엥?”
모음 하나가 바뀌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스르릉.
루나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거침없이 제 검을 뽑아 들었다.
“뭐 이런 미친…….”
에이스는 너무나 황당해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만, 이미 조급해질 대로 조급해진 루나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챙! 채채채채채챙!
“아니 뭔 설명이라도 해주고 싸워 달라던가!”
아닌 밤중에,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렇게, 이 갑작스러운 전투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무려 밤이 새도록.
***
다음날 아침.
의외로 스승님 이후에는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던 나는,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인지는 몰라도 일어나는 즉시 왕의 호출을 받아야 했지만.
“무려 3년간 이어져 온 내전이, 네 덕분에 첫 진전을 보이는구나.”
“과찬이십니다. 한데, 화가 나지는 않으십니까?”
“화?”
“폐하께서 이대로 카이클 공작을 마주하게 되면, 당장에 길길이 날뛰실까 저는 우려하고 있습니다만…….”
“…….”
제법 적나라한 말이었으나, 의외로 우르고스 국왕에게는 큰 반응이 없었다.
이미 내가 7써클 마법사라는 소문을 접했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화야 나지만, 나라가 우선이 아니겠느냐? 짐에게는 수백만 국민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음이니.”
…그저 제가 행했던 일에 대한 일말의 가책일까.
“그런 것보다, 나는 이후의 일이 더 걱정이야. 지금껏 내가 봐온 두 공작은 결코 서로에게 양보가 없을 것이 분명하니.”
“그렇겠지요.”
“듣자 하니, 7써클에 올라섰다지?”
“…….”
예상대로 왕은 내 소문에 대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왜 말이 없나?”
“…그렇습니다.”
“역시 그랬군. 하하하하! 진정으로 왕국의 홍복이야. 고작 네 나이에 5써클에만 들어서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천재라 칭송하건만.”
“폐하.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짐이 네게 거는 기대가 크다. 지금 두 공작을 연결할 유일한 고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이그니스 백작. 바로 자네니까.”
직후, 우르고스 국왕이 짐짓 아쉽다는 양 입맛을 다셨다.
“한데, 그런 인물이 고작 백작. 이래서야 타국인들마저 비웃을 일이지. 최소 두 공작과는 같은 급은 되어줘야 할 것 같은데…….”
“…예?”
“이건 어떤가? 이대로 내 딸과 약식 혼인을 올리는 것은.”
“……!”
순간적으로 내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지금 이 방에는 나와 국왕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게 단순히 떠보는 것인지, 진심인지는 전혀 분간이 가지 않지만…
‘뭔 씹…….’
내 기분은 가히 좋지 않았다.
테레이라 왕족의 비사를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지금 왕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기에.
왕은 개 버릇 남 주지 못하고, 다른 공작가처럼 ‘혈육’으로 나를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공주의 부군이라면 결코 공작에 밀리지 않아. 오히려 모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네가 내 뒤를 이을지도 모르지.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니더냐?”
“…차라리 이건 어떠십니까?”
“응?”
“자리에 대한 욕심. 물론 제게도 있습니다.”
내 대답에, 우르고스 국왕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하면…!”
“그러니, 그들과 똑같은 ‘공작’의 자리를 주신다면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
“다만, 폐하께는 그만한 권한이 없으실 테지요. 귀족들도 대번에 반발할 테고요. 듣기로, 후작부터는 다른 대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하다지요?”
“너…….”
어느새 우르고스 국왕의 표정이 사악하고 굳어 있었다.
물론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통합 테라군이 출범하는 대로, 저는 누구보다 선봉에서 제국군에 맞서 싸우겠습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큰 공을 세워, 당당하게 그 자리를 취하겠습니다.”
“……!”
“폐하는 그저 최종 결재만 해주시지요. 그리해 주신다면, 폐하의 뜻을 충실히 받들겠나이다.”
“…….”
이제 완전히 입을 다문 우르고스 국왕을 향해, 나는 기어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약조해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