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비사
“스읍~ 후우~”
들숨과 날숨이 반복된다.
들이마실 때는 주변에 존재하는 푸른 마나가 전신으로 스며들었고.
내쉴 때는 일견 혼탁해 보이기까지 한 새까만 연기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벽을 부순다.
그 이후에는, 아이리스의 네 번째 조각까지 해제한다.
와직! 와지지지지직!
“……!”
순간, 내면에서 무언가 부수어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능력이라면 이미 갖춘 지 오래였다.
필요했던 건, 약간의 실전 경험과 완전히 성장한 육신.
즉, 7써클이라는 거대한 마나를 받쳐 줄 ‘물리적인’ 그릇이다.
와장창창창창!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웬 굉음이 울려 퍼졌다.
“…앗!”
사위를 경계하던 루나가 화들짝 놀랐다.
진짜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내 몸을 중심으로 점차 폭주해 가는 ‘마나’ 탓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바다에서 몰아치는 해일(海溢)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우(暴雨)처럼.
불현듯, 내 마나는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쩌적, 쩌저저적.
땅은 외부의 압력에 몸서리쳤고.
푸드드득!
새들은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으음…….”
그 와중에도 루나는 착실하게 자리를 지켰다.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지금 내 상태가, 무척이나 위태위태하다는 사실을.
허나 곧,
“후우…….”
내 몸 안에 잔재하던 마지막 노폐물마저 한 줌의 재가 되어 빠져나갔을 때.
스윽.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리곤 저 멀리 자리한 코끼리 크기의 바윗덩이를 가리켰다.
그 순간,
꽈꽈과과광!
“……!”
예의 바위가 통째로 터져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어떤 전조현상도 없이.
그 흔한 캐스팅조차 않고서.
“…대단해…….”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한 루나가 짤막하게나마 감상평을 내어놓았다.
“고마워. 덕분에 무사히 한 걸음 내딛게 되었네.”
“정말로 7써클의 경지에 오른 것인가?”
“아마도?”
“…….”
루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검만 그려 쥔 채 멍하니 이쪽만 바라볼 뿐.
하기야 잠깐 혼자 숨만 내쉬더니, ‘나 7써클이요!’ 하고 외치면 어느 누가 황당해하지 않을까?
내심 머쓱하였기에, 나는 곧장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봐야지?”
“논의?”
“그 왜, 제국 3군이라고 했나?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아마도 각 루트별로 제국군을 나눈 것 같은데… 이제 그 3군이 테라로 치고 들어올 가능성이 상당히 커졌잖아.”
“…웨이브로 공작.”
다시금 아까의 일을 떠올렸는지 루나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 시점에서 나는 호기심이 들었다.
“내가 십이월의 수준을 정확히 잘 몰라서 그러는데… 웨이브로 공작은 그중에 몇 번째야?”
“세평으로는… 5위쯤 되는 것으로 안다.”
“5위?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네.”
12명 중에 5위.
가히 상위권이라 부를 만했다.
여기서 자연스레 한 가지 더 드는 의문은,
“그럼, 내 스승님은?”
“8월의 검사 말인가? 그는 아마도…….”
“아마도?”
“…11위쯤.”
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뭐야, 평가가 왜 그렇게 박해?”
“어쩔 수 없다. 8월의 검사는 비(非) 제국 출신일뿐더러, 집단조차 빈약한 자유연합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
얘기는 들었다.
기사들은, 출신 성분을 철저히 구분 지어 상대를 평가한다고.
그 간격의 차이가 실제로 얼마나 큰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정리하자면, 당장 빠른 시일 내에 마주하게 될 적은 무려 제국 출신의 십이월이 2명. 그리고 10만 대군이라는 뜻이네.”
“…심각하군.”
“차라리 잘됐는데?”
“응?”
순간 고개를 갸웃하는 루나를 향해 나는 씨익, 하고 미소 지었다.
“막상 눈앞에 닥치면 똥줄이 탈 테니까. 이제는 반란군도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거잖아?”
“……!”
***
한편.
“그게 무슨 뜻이지?”
우르고스 국왕의 수정 같은 눈빛이 정면을 향했다.
그와 동시에 세디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과연 일국의 제왕다운 눈빛이었다.
그 시선은 세상 모든 만물을 꿰뚫어 보는 듯,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었으니.
“아, 제가 좀 혼란스러운 소문을 접해서…….”
“말끝 흐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하거라. 네 말은 자칫 왕실모독 죄로 엄벌에 처해져도 부족하지 않은 발언이었다. 그건 네가 세운 공으로도 상쇄시키지 못할 것이야.”
“그, 그러니까요.”
순간, 세디스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당사자인 ‘그’를 보다 확실하게 팔아먹는 수밖에.
“어, 언젠가 카이클 공작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를 말하는 거지?”
“그게… ‘가족력’에 관한 소문이었습니다.”
“……!”
찰나, 우르고스 국왕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 정말로 우연이었습니다. 한데 그 내용이 좀…….”
“자세히 고해보라.”
“그것이… 이 오랜 내전을 일으킨 이유와 관련하여, 명분이라면 자기네들 쪽에도 있다는 듯한 내용이었습니다.”
“……!”
“무, 물론 저도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으나, 이 일련의 상황들과 조합해 보니 어째 조금…….”
꿀꺽, 한차례 마른침을 삼킨 세디스가 말을 이었다.
“…아니, 많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폐하께서 진실을 공표하는 것을 망설이시는 일도 그렇고, 혹 저희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가 해서요.”
처음부터 의문이었다.
전쟁에서의 명분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카이클 공작처럼 여우같은 인물이 그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책 한 권으로 추측 정도는 가능한 상태가 되었으니…….
“…그건 자네 혼자만의 생각인가?”
“예?”
“이름이 세디스라고 했나? 자네 혼자만 품고 있는 의문이냐는 말일세.”
“…….”
세디스는 왕이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소문이 퍼지는 일을 우려하는 것이다.
왕실에 딱히 좋은 얘기도 아니었으니까.
세디스는 의리를 지키기로 했다.
“아직은… 저 혼자만 품고 있는 의문입니다.”
“…자넨 이그니스 백작의 절친한 친우라지?”
“예? 그, 그렇습니다만…….”
“하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그와 공유하고 의논해 보게. 단, 조건은 오직 그에게만 말해야 하네.”
“……!”
“약속해 줄 수 있겠나?”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세디스 입장에서는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물론입니다.”
“…….”
직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우르고스 국왕은,
“…20년도 더 지난 얘기네.”
이윽고 세디스가 경악스러워할 만한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나갔다.
“카이클 공작이 내 ‘매제’가 된 일 말이네. 그의 친누이를 나는 생에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지. 혹, 이 얘기는 알고 있었나?”
“예? 하면…….”
솔직히 높으신 분의 가족력 따위, 관심도 없었지만 말뜻은 확실하게 이해되었다.
매제.
즉, 왕비의 친동생이다.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왕족이 죽게 되었을 때, 저 카이클 공작에게도 최소한의 ‘왕위 계승권’이 생긴다는 의미다.
다만, 국왕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가 있다면 첫 번째도 있겠지. 세간에서는 예의 카이클 공작의 누이를 내 첫째 부인으로 알고 있지만, 진짜 첫째는 따로 있었네. 물론 정식은 아니네만…….”
“그게 누굽니까?”
“…현 카이클 공작의 부인인 메텔이네.”
“……?”
찰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세디스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허나 곧,
“예에에에에에에에!?”
그 얼굴이 완전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친! 뭐 이딴 콩가루 집안이 다 있어?”
그리곤, 이내 어전인 사실조차 잊고 욕지거리까지 토해냈다.
***
레이브 성으로 돌아왔다.
“일단 좀 쉬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가장 먼저 내 방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세타아아아아아!”
“…….”
웬 작은 체구가 다다다, 내게로 뛰어들지만 않았다면.
180센티미터를 훌쩍 넘는 나와는 달리, 고작 160을 겨우 넘는 인영의 정체는,
“…세디스?”
녀석이었다.
한데, 그 얼굴이 꼭 귀신이라도 본 모양새다.
“잠깐만 얘기 좀 하자.”
“뭔 얘기?”
“아 됐고, 급하게 할 말이 있으니까 일단 와봐.”
“……?”
순간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등 뒤에서 찌르르,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내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
루나가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흑백이 분명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이럴 시간 없어! 방으로 가자. 꼭 너 혼자여야 해. 잠깐이면 되니까…!”
“아, 알았으니까 좀 놔봐.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진짜 오해하겠네.”
직후, 나는 세디스의 손길을 가볍게 뿌리쳤다.
어느새 루나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이쪽에 고정한 상태로.
누누이 얘기하지만, 세디스는 남자다.
비록 얼굴은 어지간한 미인의 뺨도 후려칠 정도로 생겨먹었지만.
“아, 복장 터져 뒤지겠네. 그냥 귓속말로 할 테니까 이리 가까이 붙어봐.”
“…그러시다면야.”
나는 순순히 귀를 가져다 댔다.
곧 이어지는 얘기들은, 정말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국왕과 독대를 나누고 오는 길이야.”
“그랬어?”
“그리 담담하게 반응할 일이 아니고! 거기서 너무 충격적인 얘기를 들어서, 아직도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고!”
흠칫.
순간, 내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너 혹시, 우리가 비고에서 찾은 책에 관한 내용을 발설한 건 아니지?”
“물론 아니지. 직접적으로는.”
뒷말이 핵심이었다.
“너 진짜…!”
“아, 걱정 좀 하지 마. 잘 돌려서 물어봤으니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왕의 첫 번째 부인이랑 카이클 공작의 정실이 동일 인물이란다!”
“…뭐?”
이게 뭔 헛소리야.
찰나 저 멀리 떨어진 루나의 눈치를 살핀 세디스가 재차 빠르게 속삭였다.
“정확히는, 방금 얘기한 그녀는 일개 자작가의 여식이었는데. 왕은 젊은 시절 그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었대. 한데, 머지않아 전대 국왕에게 들키고 말았지. 당연히 그쪽은 발칵 뒤집혔고. 왕족은 2처, 3처가 기본이라지만, 그래도 순서가 중요한 법이니까.”
“그래서?”
“결국 그 전대 국왕의 반대로 둘은 헤어졌고, 당대 왕인 우르고스 칸 테레이라가 마침내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을 때, 왕은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단다.”
내용이 점점 흥미진진해졌다.
“이후의 일이 충격적인데… 그때에는 왕에게 이미 세 명의 부인이 있는 상황이었거든. 아무런 배경도 없는 자작가의 여식을 네 번째 처로 들여봐야, 다른 왕비들의 모진 시기와 질투를 못 버텨낼 테니… 결국 왕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단다.”
“특단의 조치?”
“처가 아니라, 의제로 받아들였대. 의로 맺은 동생 말이야.”
“뭐…?”
“그렇게 왕의 여동생이 된 그녀는, 마침내 한 권력가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요점만 간단히 말해. 슬슬 머릿속이 복잡해지려고 하니까.”
“아이 씨바! 그러니까, 왕이 개새끼라고. 자기는 만일에 발생할지도 모를 제 치부를 미리 은폐하면서, 카이클 공작과 둘만의 비밀을 만들고 싶었대. 세간에 알려지면, 둘 모두 매장을 당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을 비밀 말이야. 지는 옛 여인을 공유하는 걸, 그런 비밀로 생각했겠지.”
“……!”
“왕실 모독죄 중에는, 왕의 은혜를 입은 여인에게 손을 대는 것도 처벌 대상으로 삼는다니까. 그걸로 카이클 공작을 옭아매려 했다나 뭐라나.”
이윽고 모든 전말을 알게 된 나는,
“이거 완전히 미친 새끼 아니야?”
지엄하신 폐하께, 실로 솔직한 감상평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