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한계 돌파(3)
‘패드립은 선 넘었나?’
상대, 웨이브로 공작의 기세가 폭풍처럼 전신을 할퀴었다.
그만큼 화가 나서 나도 흥분했다.
만약 개입하지 않았다면, 방금의 검에 루나는 목이 떨어진 신세가 되었을 것이기에.
과연 마스터를 상대로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세평이지만… 상대는 에이스 스승님보다 강하다는 상위권의 십이월. 거리는 이미 허용했으며, 보호해야 할 짐도 하나. 내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군.’
절로 쓴 미소가 피어올랐다.
한데, 그 시선을 느꼈는지.
“짐짝 취급은 사절이다.”
“……!”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선 루나가 전의를 불태웠다.
“나도 돕겠다.”
“괜찮겠어?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이 정도는 끄떡없다.”
말은 그리하지만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의류는 여기저기가 찢어져 곳곳에 새빨간 속살이 내비쳤으며, 무엇보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활화산 같은 마나까지.
“…기다려 봐.”
최소한 마나라도 안정시켜 줘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루나의 손을 맞잡았다.
“……!”
찰나, 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나를 안정시키는 마법은 신체 접촉이 필수적이다.
내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연애질인가?”
웨이브로 공작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그는 무척이나 고깝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으니까.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기에, 나는 잠시간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정보까지 얻으면 더더욱 좋고.
“아까 제가 누구인지 물었었지요?”
“…수작이 뻔히 보인다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터이니 넘어가 주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예의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예의를 운운하는 놈이,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를 들먹이나?”
“…….”
이 부분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여, 나는 곧장 소개를 이어갔다.
“저는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합니다.”
“…세타 쿤 이그니스? 네가?”
“절 아시나요?”
“…….”
웨이브로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나, 그 두 눈은 이미 흥미로운 기색으로 가득했다.
“…재미있군. 그런가? 네가 세타 쿤 이그니스였어. 그러고 보니, 알려진 소문과 외모도 완벽하게 일치하는군. 돌아가신 전대 태자 전하와도 얼굴이 비견될 정도라더니…….”
“전대 태자 전하요?”
“…우리나라에서는 귀족계에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닌 소문난 바람둥이셨다. 뺀질거리는 그 특유의 분위기까지, 아주 빼다 박았군.”
“켁. 그래도 황족인데, 말버릇이 선 넘으신 것 아니에요?”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 욕도 하는 법이니까. 더욱이 그분은 사사로이 내 제자이기도 했다.”
하기야 나도 황제 욕이라면 무수히도 많이 했으니.
“그보다, 제국군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사실은 놀랍네요. 특히 파랑의 검사, 당신의 존재는 더더욱요.”
“훗. 내게서 정보를 캐내고 싶나?”
“딱히 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크크크. 아직은 재미가 있으니 한 번 더 넘어가 주지. 네 말대로, 우리는 검은 마물의 숲을 하나의 ‘길’로 뚫을 계획이다.”
“역시…….”
찰나, 내 얼굴 위로 어두운 빛이 어렸다.
이 시점에서, 루나의 내부도 어느 정도 안정화되어 갔다.
“뭐, 서부의 자이툰은 이미 수도까지 함락시킨 마당이니까. 우리 3군이라고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 당장 황제 폐하께서 현장에서 뛰고 계시니…….”
“……!”
이번에야말로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자이툰의 수도가 함락당해?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협곡에서 대치 중이라고 들었는데?
“아직 목적지는 정하기 전이었는데,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이니 너희 테라를 노려볼까?”
반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전쟁을 벌이기 싫으면 순순히 정보를 토해내라는.
허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역시 목표는 리비아였군요.”
“……!”
순간, 웨이브로 공작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반응으로 나는 확신했다.
“무슨 뜻이지?”
“당장 테라를 노려봐야 아무런 실익이 없으니까요. 동선상 자이툰에서 남부로 가로지르고 계시니, 리비아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적장의 입장에서는 빠르게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그곳이 가장 큰 부담이기도 할 테고요.”
“…다른 건 몰라도, 테라를 점령하는 데 실익이 없다는 말은 틀렸다. 중부 거점인 그곳을 점령하면, 대륙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구태여 불필요한 희생을 만들 이유는 없다는 의미에요. 반란군이라는 카드를 버리기에, 제국은 지금껏 너무 많은 것을 퍼줬잖아요?”
“…….”
“마탑주와 자유연합. 결코 무시하지 못할 두 전력이 최근 합류한 마당에, 뭣 하러 아까운 병력을 소모하겠어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게 최고의 전략이라고, 이럴 때 반란군을 이용하면 될 것을.”
어느새 웨이브로 공작의 두 눈에는 싸늘한 한기마저 어려 있었다.
예상컨대, 반드시 나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그런 것보다, 요즘 들어 부쩍 시험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그릇의 확장을 떠올린 이후부터였다.
과연 이 몸으로 내가 생각하는 ‘그것’도 가능할까?
그게 가능하다면, 눈앞의 초인을 상대로도 통할 것인가?
‘모르니까 해보는 수밖에.’
찰나, 루나에게 의지를 전한 내 잇새로,
- 움직이지 마라.
“……!”
이내 대기를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직 드래곤만의 전유물.
언령(言霊)의 힘이었다.
물론 반쪽짜리에 불과했지만…
“…이게 무슨?”
효과는 있었다.
시간상으로는 고작해야 일 초나 될까?
움직임을 제약한 것은 찰나에 불과하나, 그 잠깐이면 거리를 벌릴 시간은 충분했다.
언령을 토해내는 즉시, 이미 원래 위치보다 10미터는 훌쩍 거리를 벌려 놓았으니까.
아마,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상대의 방심도 한몫했겠지.
“수고하세요. 여기서 십이월이라는 전력을 없애면 좋겠지만, 아직은 실력이 부족해서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내게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웨이브로 공작은 거리를 좁히는 대신, 곧바로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일명 마법 폭죽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삐유우우우우우~ 펑!
숲의 나무 사이를 뚫고 밝은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허나, 그는 알까?
차라리 따라붙었다면, 도리어 붙잡을 가능성은 훨씬 컸을 텐데.
“지금부터 10분 안에, 이 일대를 수천의 병사들이 포위할 것이다. 그 안에는 우리 제국이 자랑하는 흑사자단도 있지. 물론, 그 전에 내게서도 벗어나지 못할 테지만…….”
“거참, 이미 제가 그리 정했다니까 그러네.”
“……!”
나는 곧장 루나의 허리를 한 팔로 두르고,
웨에에에엥!
예의 ‘색욕의 이능’을 발동시켰다.
“무슨…!”
“안녕히 계세요~”
꾸벅 고개까지 숙여준 나는, 이윽고 그 안으로 몸을 집어 던졌다.
***
같은 시각, 레이브 성의 대회의실.
“폐하! 무사하셔서 진심으로 다행입니다.”
해방군 진영의 귀족들은 문자 그대로 난리가 났다.
그들의 중심에 있는 것은 왕의 귀환과 함께 재등장한 인버스 공작이었다.
한데, 그 어깨가 미묘하게 치솟아 있었다.
왕을 구출하는 일.
그런 엄청난 공을 제 자식이 세웠으니까.
어찌 기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모두 경들의 노력 덕분이네. 특히나, 내 옆에 있는 공작의 아들 덕이 컸지.”
인버스 공작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는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폐하, 제 자식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당장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시는 게 옳은 순서라 사료되옵니다.”
“일이라면?”
“저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반란군 놈들을 그냥 둬서야 되겠습니까? 우선 폐하가 이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리시지요. 그리하시면, 반란군은 필연적으로 명분을 잃게 될 겁니다. 여태 중립을 표명했던 다른 귀족들도 모두 돌아설 테고요.”
“…….”
“저들은 감히 국왕 폐하를 강제로 억류했습니다. 아마 민중들까지 모조리 들고 일어나겠지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우르고스 국왕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가장 격렬하게 반응해야 할 이가 정작 입을 다물자,
“……?”
오히려 분위기만 어색해졌다.
“폐하…?”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인버스 공작이 재차 입을 열려던 그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열린 문틈으로 뒤늦게 도착한 크리스와 세디스 무리가 들어섰다.
“…조금 늦었군.”
그제야 우르고스 국왕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송구합니다. 잠시 저희들끼리 실랑이가 있어서…….”
“실랑이?”
“…그게…….”
크리스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이내 세디스가 제자리에 부복했다.
“제가 폐하와의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일변했다.
대경한 귀족들은 아예 고성까지 내질렀다.
“이런 무엄한!”
“이건 아닙니다, 폐하. 천한 것이 이 자리에 참석한 것도 황당할진대, 폐하와의 독대라니요?”
“다른 목적이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여기서…….”
우르고스 국왕은 가만히 손을 들어 귀족들을 제지했다.
“저 아이는 짐을 구해주었네. 이곳의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지.”
“……!”
그 한마디에, 귀족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에 있어 우르고스 국왕은 이미 세타와 세디스를 가장 큰 수훈자로 인정했다.
그 사실을 귀족들도 모두 알고 있었고.
다만,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세타가 자리를 비우자 이때다 싶어 목소리를 높여봤을 뿐이다.
“…아, 참고로 짐은 세타 쿤 이그니스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렸네. 혹여나 경들도 보거든,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도록 하게.”
“……!”
이제 귀족들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할 지경이었다.
백작이 뉘 집 똥개 이름인가?
무려 고위 귀족이다.
테라의 역사 전체로도, 이십 대에 그 위치까지 오른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례로, 왕국 내에서 ‘십이지신’에 가장 가까웠던 대지의 마법사.
아즈문 사트리노조차 마흔을 넘어 백작의 작위를 받았으니까.
더군다나, ‘평민’이 단번에 백작이 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폐하의 명이네. 다들 물러가지 못하겠는가?”
“……!”
의외인 것은, 이 시점에서 인버스 공작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줬다.
직후, 인버스 공작 스스로 출입문을 나섰으니까.
“……!”
상황이 그리되자, 다른 귀족들도 부랴부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곧, 오직 둘만이 회의실에 남게 되었을 때.
“그래, 짐에게 무슨 할 말이 있지?”
“…….”
우르고스 국왕은 물었고, 세디스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과연 이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예에 어긋나지 않을까?
질문은 간단하고 담백할수록 좋았다.
너무 깊게 파고들면, 비고에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가 들통 날 수도 있으니까.
“그게…….”
잠시 후, 상념을 마친 세디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묻게.”
“하면 결례를 무릅쓰고… 혹, 현 카이클 공작의 핏줄 중에, ‘왕족’과 관련된 이가 있습니까?”
“……!”
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우르고스 국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뭐라?”
***
동이 트는 새벽.
웨에에에엥!
허공에서 만들어진 새까만 아가리가 이내 한 인영을 토해낸다.
“…쿨럭!”
여전히 몸이 성치 않은 상태였기에 루나는 대번에 마른기침을 토했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머지 한 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세타?”
“여기 있어.”
“……!”
그제야 루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세타는 바로 등 뒤에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폭주하는 마나까지 다스려 준 이.
또다시 크나큰 은혜를 입었다.
더하여,
“…….”
순간, 루나의 양 볼에 희미한 홍조가 떠올랐다.
아직도 아까 맞잡은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생생했으니까.
굳은살로 온통 뒤덮인 자신의 것과는 정반대인 손이었다.
“음…….”
왜인지 간질거리는 마음 한편에, 루나가 나직한 신음을 삼키고 있을 때.
“저기. 아직 몸이 불편한 건 잘 알고 있는데, 잠시만 호위를 부탁해도 될까?”
“…응? 그게 무슨…….”
“내친걸음이라고, 그동안 미뤄왔던 일을 지금 해볼까 하거든.”
세타가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나, 이대로 7써클의 벽을 깨부숴 보려고.”
“……!”
직후, 루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방금 저 아이가 뭐라고 했는가.
7써클?
“지, 진심인가?”
“왠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아서.”
“…….”
루나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명실상부 이 아이는, 마탑주들 중에서도 상위권으로 올라서게 될 테니까.
“아 물론, 나도 확신 같은 건 없는데…….”
“엄호하지.”
세타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안의 검을 꽈악 움켜쥔 루나가 의지를 불태웠다.
그 눈이 꼭, 접근하는 모든 것들을 베어버릴 기세다.
곧 그녀가 보란 듯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나한테 맡겨라. 확실하게 지켜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