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한계 돌파(2)
“찾았다.”
찰나, 몸을 숙인 루나가 미소 지었다.
또 찾았다.
벌써 알려준 약초만 다섯 개째였다.
이 정도라면 가히 ‘꾼’으로서의 재능도 있는 것 아닐까?
하물며 그녀는 알게 모르게 이 일에 재미까지 느끼고 있었다.
“흥~ 흥~”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여태 상대의 목숨을 취할 줄만 알았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한데, 의외로 이런 일에 루나는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
루나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간간이 보이는 말갛고 예쁜 꽃들까지.
내면만큼은 그녀도 천상 여자였다.
“…그리고…….”
순간, 바삐 손을 놀리던 루나의 손길이 움찔 멎었다.
더하여, 눈동자마저 몽롱하게 풀려갔다.
허리춤에 자리한 ‘물건’이 시야를 스쳤기에.
스르릉.
서늘한 쇳소리가 숲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다른 어떤 보물을 가져와도 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나.
딱 하나.
병장기만큼은 예외였다.
그중에서도 검은 더더욱.
기사에게 명검(名劍)이란, 그 어떤 부나 명예보다 가치가 있었다.
무구에 대한 욕심만큼은 루나 또한 여느 기사 못지않았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서걱!
이번에 선물로 받은 검은 가히 역사에 기록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우지끈!
한 박자 늦게, 아름드리나무가 통째 균형을 잃었다.
허공에 새하얀 실선이 그려진 직후였다.
그 단순한 검질 한 방으로,
쿵!
단단하기 그지없는 고목이 쓰러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방금의 일격에, 루나는 마나를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대단해.”
루나는 마치 애인처럼 검을 꼬옥 끌어안았다.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양 볼에 희미한 홍조마저 어릴 정도로.
“아주 멋있는 선물을 받았어. 정말로…….”
자연스레 이런 명검을 준 세타의 얼굴도 떠올랐다.
대체 그 저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은, 검을 뽑아 든 순간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이제 루나의 머릿속은 검에 대한 만족만으로 가득했으니…
“…앗.”
찰나, 그녀가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나무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몰려왔다.
잠시간, 쓰러진 고목을 향해 목례해 준 그녀는 곧,
“……?”
빙그르르 몸을 돌렸다.
다시 약초들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
한데, 거기서 이변이 발생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저 멀리, 숲 끝의 어둠 속에서 웬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듯하면서도, 때로는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발걸음이었다.
그 모순적인 간격의 사이에서,
“…….”
어느새 루나의 표정은 한껏 굳어졌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은 이곳에서 절대로 마주쳐서는 안 될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역시 내 착각이 아니었군.”
머리칼은 바다를 연상케 할 정도로 푸르고, 눈동자마저 밝은 사파이어 빛을 띠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모습은 이제 고작해야 삼십 대나 되었을까?
허나, 그의 진짜 정체를 루나는 잘 알고 있었다.
“파랑의 검사…….”
루나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제국의 공작.
대륙 제일이라는, ‘십이월(十二月)’의 일인.
그가 휘두르는 검은 저 대해의 해일마저 갈라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날 아는가? 그보다, 대단하군. 아직 어린 듯한데 벌써 엑스퍼트 ‘상급’에 올라선 건가?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꽈아아악.
절로 손안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더 나아가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는 단번에 그녀의 경지를 훤히 꿰뚫어 봤다.
지금 싸워봐야 열이면 열, 지고 만다.
…다만.
그럼에도 루나는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들킨 이상, 그냥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호오?”
멀지 않은 곳에 세타가 있었다.
하니, 눈앞의 사내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분명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기에.
“의외로군. 그리 멍청한 여인 같지는 않았는데.”
“…….”
루나는 말없이 마나를 휘돌렸다.
괜찮다.
긴장하지 말자.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하면서.
비록 지금의 상태로는 필패(必敗)이나…
그녀 또한 같은 급으로 올라서면 얘기는 또 달랐다.
우웅! 우우우웅!
지금부터, 루나는 ‘벽’을 깨부술 작정이었다.
***
약 10여 분 뒤.
“…….”
지금 내 앞에는 오우거 한 쌍이 고이 쓰러져 있었다.
사체의 훼손화를 피하기 위해 깔끔하게 심장만 꿰뚫었다.
나는 이것으로 일종의 ‘페로몬’을 만들 계획이었다.
다른 마물들을 자극하는 특별한 향은 저 제국군의 길목을 차단하는 데도 무리가 없을 것이므로.
“…우선 원래 목적대로 치료제부터.”
오우거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최소한 근처에 다른 마물은 없다는 뜻이었다.
이 포악한 생명체는 제 영역에 다른 놈들이 접근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니까.
더욱이 밤일(?)까지 치르는 마당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쿵!
직후, 아공간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무쇠솥 하나를 꺼냈다.
여기서 실비아의 치료제와 페로몬 향수를 만들 생각이었다.
훗날 그릇을 확장할 매개체는 재료가 충분치 않다.
이곳에 있는 약초는 극히 일부였으며, 무엇보다 그릇 확장에 가장 필요한 준비물은 ‘드래곤 블러드’니까.
블러드.
다시 말해, 드래곤의 ‘피’다.
마탑에서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이런 곳에서 공짜로 얻어걸리겠는가?
“…우선 깨끗한 물로 솥을 가득 채우고, 지금까지 구한 약초들을 3시간가량 끓인 뒤에…….”
태양초.
소형 만드라고라.
적색 아스피린까지.
지금껏 구해놓은 재료들을 모조리 집어넣었다.
부글부글부글.
얼마 지나지 않아 솥 내부는 새빨간 액체로 가득 찼다.
생긴 거만 보면 꼭 지옥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거, 만약 실비아가 의식이 있는 상태였다면 죽어도 먹지 않으려 했을지도.
“…뭐,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 마나로 양기를 상당수 중화시키는 일이니까.”
양기가 음기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되면 사태만 더욱 악화시키는 격이었으니.
하여, 중화 작업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다음은 페로몬인데…….”
대충 준비를 끝낸 나는 바로 옆에 또 하나의 솥을 꺼내 놓았다.
일명 페로몬.
내 생각대로라면, 이걸로 마물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나는 일종의 마물 군단을 집결시켜, 그들로 하여금 제국군을 상대하게 할 작정이었다.
자연스레 그들의 진군 속도는 늦춰질 것이고.
만약 피해가 예상보다 크다면, 부랴부랴 진로를 수정할지도 몰랐다.
그리되면, 최종 목적지까지도 알아낼 수 있을 테고.
“부디 계획대로 되어야 할 텐데 말이지…….”
오우거의 생식기를 통째 썰어 솥에 때려 넣던 와중이었다.
순간, 내 전신이 ‘흠칫’ 떨렸다.
홱.
그뿐만이 아니라 고개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꺾여갔다.
챙! 채채채챙!
웬 희미한 쇳소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기에.
“…누군가 싸우고 있다?”
두 개의 거대한 마나였다.
일견 느끼기에도 상당히 범상치 않은.
한쪽은 제법 익숙한데.
다른 한쪽은 처음 느껴보는 기운이었다.
다만, 내 감으로는…
‘…최소 스승님과 동급.’
그 즉시, 내 신형이 쏜살처럼 튀어 나갔다.
***
쩌엉! 쩌저저저정! 쾅!
루나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잠시간 상대를 떨쳐 낸 그녀가 숨을 몰아쉰다.
“헉, 헉…….”
“…제법이군.”
사내, 파랑의 검사 웨이브로 공작이 짤막하게 감상평을 내놓았다.
루나는 이미 만신창이였으나, 그럼에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아이야. 무엇이 너를 그리 조급하게 만드느냐?”
“…….”
“이미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깨달았을 텐데? 한데, 도망은커녕 내게 계속해서 맞선다는 선택이라…….”
“…….”
“벗어날 수 없으니, 차라리 싸우겠다는 생각이라면 중책(中策)은 되겠으나…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닌 듯한데 말이지.”
“하압!”
커다란 기합성과 동시에, 루나가 재차 달려들었다.
“…멍청한지고.”
웨이브로 공작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어떤 방법을 쓰든, 그녀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그만큼 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벽’이 존재했으니까.
다만, 그런 와중에도 조금이나마 격의 차이를 메우는 것은…
투-쾅!
두 인영이 중간에서 격돌했다.
“그 검. 역시, 그 옛날 아란달이 소유했다던 명검 은아겠지?”
“……!”
“어디 처박혀 있나 했더니, 이런 핏덩이가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뭐, 핏덩이치고는 재능이 넘친다는 점은 인정하나…….”
“…큭!”
“그 검은 오히려 나한테 더 어울리겠구나. 네게는 너무 과분해.”
루나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에게 처음 받은 소중한 선물이다.
이걸 받자마자 빼앗길 수는 없었다.
파르르르르.
검을 맞댄 채 힘겨루기를 하는 루나의 손이 하염없이 떨려댔다.
더 나아가, 두 눈은 압력에 못 이겨 실핏줄까지 터져 나갔다.
자연스레 피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허나 곧, 그녀의 검신으로…
“오.”
순간, 웨이브로 공작이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맞댄 검이 조금씩 이쪽으로 밀려온다.
“오러 소드? 검기가 아닌가?”
오직 ‘마스터’만의 전유물.
그 절삭력은 강철조차 단번에 베어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자세히 보면 가장자리가 희미한 것이, 완전한 검기는 아니었다.
“너는 반드시 죽여야 할 아이로구나. 이름이 무엇이지?”
웨이브로 공작이 여유롭게 물었다.
그 자세조차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다.
한 손으로는 검을 쥔 채.
다른 한 손은 여태 뒷짐을 진 상태였다.
루나의 입장에서는 평생을 통틀어 다시없을 굴욕이었다.
“알려주지 않을 생각인가? 뭐, 딱히 상관은 없다만…….”
“…루나 틴 론지에다.”
“루나 틴 론지에…? 가만, 분명 어디선가…….”
루나는 조금이나마 시간을 끌기 위해 내뱉은 대꾸였으나, 웨이브로 공작은 금세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아하. 쟈벨린에게 졌다던 그 여기사가 자네였나? 황제 폐하께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
“과연, 그랬군. 그런 거라면 이만한 실력도 이해가 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었군.”
루나는 이제 대답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더 입을 열면, 당장이라도 애써 모은 마나가 흩어질 것 같았기에.
속전속결.
시간이 없었다.
스팟!
루나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 검기가 무수한 궤적을 남긴다.
그야말로 변화의 극치였다.
쏘아지는 검은 천 개의 움직임을 만들어내니.
이내 허공으로 연꽃마저 그려낸다.
아름다움에 취하는 자, 그대로 목숨을 잃을지니.
론지에 가문 제5비기, 일천의 로터스(Lotus).
“…대단하군.”
웨이브로 공작은 그 모든 변화를 한순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쩌어어엉!
“……!”
고작 한 번의 휘두름으로, 그 모든 변화를 단번에 깨부수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줄은…….”
루나가 울컥, 죽은피를 역류시켰다.
마스터.
그중에서도 제국의 마스터는 정말로 괴물 같은 자들이다.
여타 다른 왕국의 마스터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파랑의 검사는 그 십이월 중에서도 상위권이라고 하더니,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고문을 해서라도 정보를 캐내고 싶지만… 아쉽게도 내게 시간이 없군. 잘 가게. 제법 좋은 구경을 시켜줬으니, 고통 없이 보내주지.”
검이 천천히 접근한다.
웨이브로 공작은 잔인했다.
말과는 달리, 그 검은 무척이나 천천히 움직였으니까.
‘…제길.’
죽음의 향이 뒤늦게 몰려들었다.
그럼에도 루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목적은 이뤘다는 사실 정도일까?
이만한 소란이라면, 세타는 분명 눈치채고 도망쳤을 것이기에…
쐐애애애애애액!
“……!”
그 순간, 어마어마한 파공음이 둘 사이를 갈랐다.
꽈아아아아아앙!
주변으로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너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난 웨이브로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손아귀가 저릿했다.
하늘에서 쏘아진 웬 마나의 창과 검이 충돌한 직후였다.
“뭘 고통 없이 보내줘?”
“누구냐?”
“글세…….”
곧, 무척이나 뺀질거리게 생긴 녀석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대답해 줄 의무라도 있나? 내 친구를 해하려고 한 녀석에게.”
“…어린놈이 입버릇이 고약하구나.”
“정이 궁금하면, 고통 없이 보내줄 테니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나 물어보셔.”
“……!”
순간, 일말의 동요조차 없던 웨이브로 공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