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도둑질(2)
터억!
거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곧장 눈앞의 책을 덮었다.
“뭐야!? 한참 재미있게 보고 있었는데 왜?”
“언제는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자며? 여기서 날밤 까면서 한가하게 책이나 읽고 있을래?”
“그, 그건 아니지만, 조금은 더 봐도 괜찮지 않냐? 나 뒷내용이 너무너무 궁금한데…….”
“돌아가서 봐. 아무래도 술술 읽어 넘길 내용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런 것보다는, 본분을 잊지 말아야지?”
“본분?”
“잊었으면 다시 한번 이 주변을 둘러봐라.”
“……!”
그제야 세디스가 머리 위로 느낌표를 떠올렸다.
곧 그 두 눈마저 초롱초롱하게 변했다.
지천에 널린 것이 황금이요.
발에 채는 것이 아티팩트였다.
더욱이 내가 봐도 ‘저런 마법도 있었지…’ 하는 마법서들까지 드문드문 눈에 띄었으니.
과연 한 왕실의 비고라 부를 만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우리 거라는 말이지…?”
“딱 필요한 것만 추려서 털어야지. 뭘 전부냐?”
“아니, 왜! 아공간 주머니도 있겠다, 보이는 대로 쓸어 담으면 되겠구만.”
“주머니도 한계가 있거든? 그리고 과하면 체하는 법이야.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꼭 필요한 것들만 가져가야지.”
“굳이?”
“들킬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지. 뭐, 폐하라고 이곳에 있는 모든 보물을 기억하지는 못하실 테지만.”
“…폐하는 아시려나 몰라? 정작 믿음을 주고 작위까지 내린 충신이, 실상은 제 곳간을 털어갈 도둑놈이었다는 사실을.”
“너만 입 다물면 되잖냐. 참고로 우린 공범이다?”
“그야 물론이지. 그럼 내 지분도 있다는 거네?”
신이 난 표정으로 반문한 세디스는, 내 대답을 채 기다리지도 않고 뛰어갔다.
과연 마검사답게.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각종 병장기들이 쌓여 있는 좌측의 공간이었다.
“흥~ 흥~ 흥~”
“…….”
아예 콧노래까지 부르며 보물을 골라가는 세디스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그럼 나도 챙겨볼까?”
느긋하게 마법 서적들이 꽂혀 있는 책장부터 향했다.
예의 왕족의 비사가 적힌 책은 단단히 품에 갈무리한 채로.
‘테라는 이천 년 전, 드래곤의 은총을 받은 나라로도 유명했지.’
정확히는 테라의 전신(前身)인, 마도 왕국 칼데라스였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전설은 국가의 자랑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마도 문명이 찬란히 꽃을 피우고.
그와 비례하여 인간의 욕심마저 극에 달했을 때, 소위 ‘슬레이어(Slayer)’라는 족속들이 등장했다.
달리 용살자라고도 불렸던 그들은, 감히 중간계 최강이라는 드래곤을 부의 축적 대상으로 삼았다.
마나의 집약체인 하트(Heart).
이름난 명검을 만들 수 있는 본(Bone).
최고급 비약 재료로 쓰이는 블러드(Blood)는 물론이고, 검기로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스킨(Skin)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모두 보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인간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본래 드래곤은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생명체이나.
단 하나.
어린 해츨링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였다.
슬레이어들이 그 해츨링에게까지 마수를 뻗으려 할 때.
전 대륙에서 한 곳.
오직 마도 왕국 칼데라스만큼은 적극적으로 나서 우려를 표했다.
혹여나 드래곤이 일족 차원에서 대응하면, 대륙의 어느 나라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물론 당시에는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그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고 맹신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칼데이라를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들이 드래곤의 분노를 감내해야 했다.
이 시점에서 칼데이라는 훗날 국가의 명운을 뒤바꿀 선택을 하였으니.
오히려 드래곤의 편에서, 인류에 맞서겠노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용인(龍人) 전쟁으로 명명된 이 오랜 갈등의 끝은 당연하게도 드래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애당초 수명부터 100배가 차이 나는 인간이 드래곤을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다.
승전국이나 다름없는 칼데이라는 무려 당대 로드(Lord)에게 직접 은총을 받았다.
다시 말해,
“…어쩌면, 아직도 그 흔적이 이곳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지.”
마법은 정형화된 대상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발전되어 왔다.
최근(?) 이천 년 사이에 드래곤 로드가 바뀐 이력은 딱 한 번.
잘만 하면,
“전(前)대 로드가 남긴 보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문제는, 그 보물을 어떻게 찾느냐는 건데.
여기에는 바로 내가 딱 특화된 인물이다.
드래곤의 손때가 탄 물건은 필연적인 특징이 있으니까.
다름 아닌 드래곤 특유의 ‘냄새’다.
마나는 각기 고유의 색깔과 내음을 지니고 있고, 인간들이 다루는 마나와는 그 농도와 기향 자체가 달랐으니.
이 세상 인간들 중 오직 나만이 그 향을 느낄 수 있었다.
우웅! 우우우웅!
눈을 감았다.
보다 기운을 확실하게 느끼기 위해.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웬 희미한 내음을 풍기는 두 가지 물건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나는, 겉표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빛바랜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와 상반될 정도로 은색의 나신이 우아하게 뻗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검이었다.
“그, 그거 혹시…?”
어느새 후다닥 다가선 세디스가 눈을 반짝였다.
“왕국 제일의 기사라는, 아란달이 사용했던 검 아니야?”
“……!”
들어본 기억이 있는 이름이다.
테라 제일의 기사 아란달.
전대 국왕은 그런 그에게 국보(國寶)를 하사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물체도 베어낼 수 있다고 하며.
자체적인 냉기까지 품고 있는 그것의 실체는, 실버 드래곤의 송곳니로 만든 검이었다.
분명 이름도 은아(銀牙)였던가?
이만한 명검이 아란달 사후에는 이런 비고에서나 처박힌 채 썩어가고 있는 듯한데…
저 제국의 기사들이 통탄할 일이다.
“…하기야 테라에는 이제 인물이 없으니.”
비록 마법 왕국이라 불리기는 해도, 약 반세기 전에는 소위 이름 깨나 날리는 기사들이 나라에 몇몇 존재했다.
그중 최고였던 이가 은아의 주인이었던 전전대 3월의 검사, 아란달 브륜 하르츠다.
특히나, 그의 검에서 비산하는 은의 향연은 대륙에서도 위명이 자자했으니.
“…가만. 생각해 보니 이건 이미 딱 맞는 주인이 있잖아?”
“그렇지! 얼른 이리 내놔 봐!”
“너 말고.”
탐욕으로 물든 세디스의 눈빛을 뿌리치며, 나는 냉큼 손에 쥔 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보자, 꼭 가져가야 할 것들은 다 챙겼고. 여기에 보석 중 최고봉이라는 레드 다이아몬드 정도만 슬쩍하면 충분하겠지?”
레드 다이아몬드는 그 희귀성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자랑했다.
오래전에는 이거 하나면 ‘나라’도 살 수 있다고 알려진 보석이었으니까.
그런 게, 목재함에 보관된 채 몇 개씩이나 더 널려 있었다.
“하나 정도는 뭐…….”
추가로, 금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아공간 주머니의 나머지는 이것들로 가득 채울 작정이었다.
요약하자면,
책이 두 권.
검이 하나.
레드 다이아몬드 한 개에.
순금으로 된 괴가 수십 킬로그램.
마지막으로, 이번 도둑질의 피날레는…
“…역시 여기서는 저게 제일 핵심이거든.”
이내 내 시선이 공간 구석을 향했다.
이미 동력을 잃고 쓰러진 마물.
골렘이 그곳에 있었다.
무려 고대 시대의 산물이자, 그 크기만 약 10여 미터에 이르고.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력은 단단한 바위마저 박살을 낼 정도인.
더불어, 검기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강도마저 지녔으나.
골렘은 불에 약했다.
정확히는, 흑염 이상의 초고온이 유일한 약점이었다.
저걸 통째로 옮길 수는 없으니, 나는 저기서 핵심적인 물건만 가져갈 생각이었다.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핵’ 말이다.
이것만 있으면.
완전히 내 입맛대로 개조한, 나만의 골렘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전쟁에서 이게 모습을 드러내면 퍽이나 볼만하겠네.”
덥석!
이윽고 저 뒤쪽에서 희희낙락거리는 세디스의 뒷덜미를 곧장 움켜쥔 내가,
“다 끝났으면 이제 돌아가자.”
“자, 잠깐! 나는 아직 덜 털었…….”
“시끄러.”
웨에에에엥!
곧장 색욕의 이능을 발동했다.
하여튼, 어딜 가나 하기 싫다던 놈이 끝에는 제일 설친다.
***
한편.
휘영(輝映)한 달이 떠오른 깊은 밤.
실비아는 꿈에서도 예상치 않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흠칫.
“……!”
“쉿. 소리 지르면 망설이지 않고 목을 그어버릴 거야.”
“…….”
침대에 누운 채로 실비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불 속으로 들어온 웬 인영이 온몸을 옭아맨 채 비수를 들이밀고 있었다.
딱 한 치.
조금만 근육을 움직여도 실비아의 가녀린 목은 곧장 꿰뚫릴 간격이다.
“…누구시죠?”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내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
“세타 쿤 이그니스는 지금 어디에 있지?”
“……!”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조차 짐작되지 않는 쇳소리였다.
허나, 그 내용은 결코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걔는 왜요?”
실비아가 침착하게 반문했다.
“질문은 나만 한다고 했을 텐데.”
“…당신, 제법 익숙한 기운을 풍기시네요. 거기다 제 침실까지 들키지 않고 숨어들 실력까지. 혹, ‘달’인가요?”
주르륵.
복면인이 손에 쥔 비수에 힘을 가했다.
대번에, 실비아의 새하얀 목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내 말이 장난 같나?”
“…몰라요.”
“뭐?”
“그 녀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도 잘 모른다고요. 아직도 궁 내부에 있는지, 아님 수도를 빠져나왔는지.”
“…궁? 수도? 그게 설마 테라의 수도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요?”
복면 뒤로, 인영의 인상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상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여, 복면인은 아예 팔 하나를 잘라 버리려 독하게 마음먹었다.
그 순간,
쨍그랑!
“……!”
웬 둥그런 구체가 내부로 날아들었다.
와장창!
“뭔 속닥대는 소리가 이리 크냐? 잠이 확 달아났네.”
직후, 깨진 창문 사이로 사람이 뒤따라 들어섰다.
실비아도 잘 아는 여인이었다.
“빛의 연합주님!?”
실비아가 놀라 외쳤다.
바로 옆에 방을 두고 있는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전면으로 쇄도했다.
마법사임에도 여느 기사를 방불케 할 정도의 움직임이다.
“…멍청한.”
복면인이 차갑게 조소했다.
마법사가 살수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는 법.
이대로 앞에 있는 목부터 그어버릴 작정이었으나,
번-쩍!
“……!”
곧 복면인은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까 창문 내부로 날아든 정체불명의 구체.
그것이 갑작스레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므로.
“…큭.”
시야를 뒤덮는 광휘.
온몸을 옥죄는 찬란한 빛.
본능이 경고해 온다.
이대로면 같이 죽는다.
하여…
쿠당탕!
복면인, ‘세컨드 문’은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반대편 출입문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
색욕의 이능은 역시 대단했다.
족히 말을 타고 달려도 보름은 걸릴 거리를, 고작 내 절반의 마나를 사용해 일 초 만에 레이브 성 인근까지 당도할 수 있었으니까.
“진짜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니냐?”
“뭐가?”
“이리 쉽게 대륙 여기저기를 이동할 수 있는 거면, 워프니 게이트니 하는 것들은 왜 필요하냐고?”
“대신 마나를 무지막지하게 잡아먹잖냐. 아마 나 말고 어지간한 마법사들은 능력이 있어도 써먹지도 못할걸?”
세디스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계속해서 강을 따라 걸었다.
특별히 반란군의 기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이곳은 강 너머.
명백한 해방군의 영역이었으니까.
…분명 딱 삼 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쉭! 쉬쉬쉬쉭!
“……?”
순간, 웬 검은 물체가 허공을 갈랐다.
달빛을 가로지르는 그 유려한 움직임은, 보고 있노라면 절로 감탄마저 자아낼 정도였다.
아직 세디스는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의문의 인영은 곧장 이쪽을 향해 쇄도해 오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숙여!”
“……!”
내 경고성에 세디스가 즉시 반응했다.
서걱!
잽싸게 머리를 숙인 녀석의 위로, 서늘한 은빛의 실선이 그려졌다.
두피에서 잘려 나간 몇 가닥 머리털이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이런 미친…!”
“누구냐?”
직후, 내 서늘한 눈빛이 정면을 향했다.
그곳에 웬 복면을 뒤집어쓴 가녀린 인영이 자리해 있었다.
허나,
“……!”
콰콰콰콰콰콰콰!
인영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체구와는 정반대였다.
지금껏 느껴본 그 어떤 기사보다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단언컨대, 내 직감으로 느껴지는 상대의 경지는…
“…마스터?”
실제로, 스승님을 제외하면 몇 번 경험해 보지 못한 경지.
즉, 육신의 능력이 극한에 달한 초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