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도둑질
광활한 왕궁의 정원.
“찾아라!”
평화는 깨진 지 오래였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부산스러움.
순식간에 수천의 인원들이 궁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미쳤어… 이건 진짜로 미친 짓이라고…….”
정원 내 장미 넝쿨 사이로 바짝 엎드린 세디스의 얼굴도 완전히 울상으로 변해 있었다.
어차피 인비저빌리티 때문에 보이지도 않을 텐데.
예상외로 간이 콩알만 한 녀석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긍정적으로 생각해, 긍정적으로.”
“긍정은 지랄. 왕궁이 뉘 집 담장인 줄 아냐?”
“보니까 궁 내부 인원들도 거의 다 빠져나온 것 같구만. 이대로 저들은 주변을 수색할 테니, 우리는 느긋하게 물건들만 털어 나오면 된다니까 그러네.”
“나는 그냥, 진심으로 네 입을 좌우 위아래로 찢어버리고 싶다.”
“자신 있으면 한번 해보시던가.”
‘욱’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세디스를 향해 나는 보란 듯 상큼하게 미소 지어줬다.
그보다, 이제는 슬슬 움직일 시간이다.
“가자.”
“……!”
사사사삭!
세디스가 무어라 채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몇 무리나 되는 기사들이 별궁 내부로 쏟아져 들어간 직후였다.
본궁에서 나오는 이들도 상당수 줄어들었을 무렵.
타닷! 타다다닷!
나는 가볍게 땅을 박찼다.
지속 시간이 긴 편인 인비저빌리티나 사일런스와 달리, 플라이 마법은 이미 신체에서 떠나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2층 테라스 정도는 가뿐하게 뛰어오를 수 있었다.
기사가 아님에도.
그들처럼 몸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지난 3년간 에이스 스승님께 모두 전수받았으니까.
이제 엑스퍼트 중급 이하 수준은 순수 육체 능력으로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일은 네가 다 벌여놓고 혼자만 가냐!?”
내가 성공적으로 테라스에 걸터앉은 직후.
연신 투덜거리던 세디스도 사뿐히 내 뒤로 내려섰다.
마검사로 명성이 자자한 녀석인 만큼, 역시 이만한 높이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다.
쯧, 하면 잘할 수 있는 놈이 불만은.
“여기서 확실하게 딱 말해.”
“뭘?”
“이 넓은 궁 안을 전부 뒤지고 있을 수는 없잖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털 건지, 네 머릿속의 계획부터 한번 지껄여 보시라고.”
“계획 같은 거 없는뎅?”
“뎅은 씹, 진짜로 죽여 버리고 싶네.”
이번에는 진심으로 허리춤에서 칼까지 뽑아 드는 세디스였다.
“일단 그건 넣어둬.”
“입 닥쳐. 아마 서고니, 비고니 하는 곳들의 위치도 모르고 있겠지? 분명 일단 벌여놓고 보자는 심산일 테니까.”
“부정은 못 하겠네.”
“…당장 나라도 영지로 옮겨놔. 네 그 잘난 능력으로!”
“그건 안 되지.”
“뭐!?”
“친구잖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무엇보다, 전이의 이능을 연달아 두 번이나 사용하면, 내 마나가 버텨주지 못할걸?”
“아까는 우리 둘의 귀환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며!?”
“그거야 둘이 한 번에 이동했을 때의 얘기고.”
물론 구라다.
파이어볼 두 개를 동시에 만들어내나, 하나씩 시간차를 두고 따로 생성해 내나 결국 소비되는 마나량은 같으니까.
“흥분 좀 가라앉혀 봐. 비고가 어디 있는지는 대충 알 것도 같으니까.”
움찔.
점점 칼을 들이밀던 세디스가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방금 그 말, 자세히 설명해야 할 거야.”
“원래 중요한 물건들은 대개 꼭대기 층에 보관하잖냐. 마탑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일반화의 논리로는…….”
“일반화의 논리가 아니라, 사람 심리라는 게 다 똑같다고. 꼭대기에 없으면, 주인이 상주하는 침실 근처. 다시 말해, 왕의 침소를 중심으로 뒤져 보면 분명 무언가가 나타날 거라는 말이지.”
“…만약에 아니면?”
“그래도 불안하다면야, 좋아. 다른 곳은 다 제쳐두고, 왕의 침소. 거기만 딱 털고 돌아가자. 이러면 괜찮지? 내 이능을 사용하는 데 장소에는 특별한 제약이 없으니, 털고 그 자리에서 바로 뿅! 하고 사라지는 걸로.”
이어지는 내 말에, 그제야 세디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약속한 거다.”
“물론.”
***
…대략 10여 분 뒤.
왕의 침소는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본궁 꼭대기인 4층에 도착하자 저 멀리 복도 끝에,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통짜 금색 문이 시야로 들어왔기에.
가는 동안 마주친 인원도 몇 없었다.
이미 바깥의 소란으로 필수 병력만 제외하고 대부분이 뛰쳐나간 뒤였으니까.
당장 가장 중요한 왕과 공주가 별궁에서 기거했으니, 원래부터 이쪽은 경계가 옅었던 덕도 컸다.
“…그도 아니면, 궁 내부에 설치된 자체적인 마법 시설들을 믿는다던가.”
힐끗, 눈앞에 자리한 복도를 바라봤다.
일자로 쭉 이어진 기나긴 공간.
양옆으로는 갖가지 그림이며 조각상들이 늘어져 있다.
다만, 그 안 곳곳에 숨겨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마나석이었다.
복도 전체를 아우르는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도 바로 그것이었고.
하여, 내가 곧장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자,
“…근데, 반란군에서 왕실의 보물들을 여태 그냥 뒀을까?”
“…….”
이번에도 세디스가 초를 쳤다.
“아마도 아니겠지.”
“그럼, 괜히 헛수고만 하는 것 아니냐?”
“그래서 딱 왕의 개인 비고만 털려고 하는 거야. 당연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드나들 수 없는 장소일 거거든. 강제로 열려고 하면, 비고 자체가 무너지는 장치를 해뒀을 가능성도 크고.”
“…확실한 거지?”
“뭐, 내 생각에는? 더군다나, 카이클 공작은 무엇보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인물인데, 혹시라도 왕의 금고를 털었다는 소문이 퍼져 봐. 민중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냐?”
“보물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자기들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런 소문이 날 걱정도 없을 텐데?”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 그는 무척이나 신중한 성격이니까. 내전 초기부터 지금껏 승기를 잡아온 마당에, 완전히 승리를 따내고 전리품을 취해도 늦진 않을 거라고 판단한다면 모를까.”
“…일리는 있네.”
한차례 어깨를 으쓱여 준 내가 이내 한 가지 마법을 캐스팅했다.
“숨겨진 모든 기운들을 내 눈앞에 드러내라, 레드 필드(Red field).”
순간, 내 전신으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문자 그대로 적선의 파장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주변 기운을 감지하는.
달리 디택트 계열이라고도 불리는, 5써클 수준의 고대 마법이었다.
“이게 대체…?”
직후 세디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녀석에게도 보이는 거겠지.
그림과 조각상들 사이를 잇는, 무수한 마나의 선들이.
“저 선에 신체가 닿으면, 트랩이 발동하는 방식이겠지.”
“…이제 어쩌려고?”
“뭘 어째. 내 능력이면 만사 해결이잖냐.”
“뭐?”
당장에 세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눈앞의 장애물과 내 이능을 연관시키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긴, 색욕이 가진 능력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으니.
‘…사용할수록 확실하게 알겠어. 죄악의 힘이 왜 무서운 건지.’
나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능 사용의 조건 중, ‘한 번은 꼭 가본 곳이어야 한다’는 부분에는 일부 수정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한 번 시선이 미쳤던 곳이면 충분하니까.”
***
왕의 침소.
“…어이가 없네.”
세디스는 지금, 무척이나 황당한 광경들을 연이어 목격하고 있었다.
그 자신감만큼이나 세타는 거침이 없었다.
무수한 트랩들도.
길을 가로막는 병력도.
숨겨진 비고도.
모두 세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진짜 소중한 것은 몸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에 두는 법이거든.”
그리 말한 세타가 거대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침대를 들어내자.
“……!”
그 밑바닥에, 정말로 웬 지하실로 통할 듯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진짜 지하로 향하는 출입구일 리는 없으니, 아마 문 역할을 하는 ‘아공간 통로’일 것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 문을 열 수 없을 것이나.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세타만큼은 예외였다.
“…매직 아이.”
방금의 것은 그저 물체를 투과할 뿐인 흔하디흔한 마법이었다.
질 나쁜 이들이 여탕을 훔쳐볼 때나 이용해 먹는.
다만, 세타가 가진 이능과 합쳐지자 완전히 새로운 능력이 되었다.
사아아아아아!
“……!”
갑작스레 익숙한 검은 연기가 전신을 감싸더니, 이내 문 너머로 자신을 통과시켜 줬기 때문이다.
예의 세타가 가진 이능이었다.
허나, 곧 드러나는 내부의 광경은 이 사기적인 이능에 투덜거릴 틈도 없이 엄청났다.
“…헉!”
침대 아래에 자리한 공간이라고는 절대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백 평은 됨직한 공간을, 황금의 산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뿐인가?
표지만 봐도 절로 군침이 흐르는 고급 마법서들도 몇 개나 시야로 들어왔다.
아마 그 옆에 있는 장신구들은 마법이 각인된 아티팩트들이겠지.
그중에서도 특히 놀라운 것은,
“고, 골렘(Golem)…?”
한쪽 구석에 자리한 웅장한 자태의 돌무더기를 보며 세디스가 쩌억, 하니 입을 벌렸다.
말로만 듣던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아공간 내부하며.
이미 고대 시대에 자취를 감춘 마물인 골렘까지.
이 둘만으로도 세디스를 경악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저거, 설마 움직이는 건 아니겠지?”
“말이 씨가 된다.”
“…장난이라도 그런 농담은 하지 말…….”
번-쩍!
세디스는 채 말을 끝마치지도 못했다.
순간, 미동조차 하지 않던 골렘이 붉은 안광을 토해냈으니까.
“씹…….”
“…물건만 몇 개 훔쳐 갈 생각이었는데, 너 때문에 상황이 묘해졌네?”
“이게 왜 나 때문이냐!? 저게 이 공간을 지키는 수호신, 뭐 그런 거겠지!”
“그렇다고 치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이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라 외부에서 눈치챌 가능성은 적다는 사실이야.”
“그게 다행이냐? 당장 저 고대 시대의 산물을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이번에도 너는 그냥 나한테 맡겨만 두라고.”
“……!”
세디스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와 똑같았다.
이제 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안심이 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날 정도였다.
“골렘에게는 약점이 있거든. 핵 말이야.”
“…누가 그걸 모르냐? 상식이잖아. 그 핵을 어떻게 찾느냐가 문제지.”
“저 거대한 몸체를 움직이는 핵이야말로, 온갖 마법적 지식들의 집약체인데. 상식적으로, 그런 물건에서 아무런 기운이 흘러나오지 않겠냐?”
“그걸 역대 인류사상 가장 위대했다는 고대 시대의 마법사들이 몰랐을까? 약점을 뻔히 노출시킬 위인들이겠냐고.”
“애써 감추려고 해도, 나는 알 수 있으니까.”
“뭐?”
“직접 한 번 만들어본 적이 있어서 말이야.”
“……?”
세디스의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누가 뭘 만들어?
“야, 방금 뭐라고…….”
“이거 잘만 하면, 골렘까지도 훔쳐 갈 수 있겠는데?”
“……!”
무어라 의문을 토할 새도 없이, 녀석은 금세 저 멀리로 뛰쳐나갔다.
이제는 완전히 거체를 일으켜 쿵쿵 움직이기 시작하는 예의 골렘을 향해서.
한데, 그리 쇄도하는 세타의 손이 어느새 검게 물들어 있었다.
골렘의 약점은 느린 속도라고 했던가?
하여, 마치 빗살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공간을 가로지른 녀석은 곧,
콰득!
“……!”
골렘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옆구리로 제 손을 박아 넣었다.
경악스러운 점은, 단단하기 그지없는 골렘의 동체가 마치 스펀지처럼 꿰뚫렸다는 사실이었다.
치이이익!
그것도 모자라 관통된 주변 부위가 검게 녹아들기까지 했다.
“흑염(黑炎)…?”
투-확!
세타가 곧장 손을 빼냈다.
흑수(黑手)는 이미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아니, 이제는 새하얀 서리마저 어려 있었다.
흑염으로 관통력을 극대화한다.
동체를 꿰뚫는 즉시, 염을 꺼뜨려 핵의 손상을 최소화한다.
손을 얼려 온도마저 극한까지 끌어 낮춘다.
그 과정이 실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너는 대체 오늘 몇 번이나 나를 놀라게 하는 건지. 골렘이 저렇게 상대하기 쉬운 마물이었나?”
세디스가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을 때,
“응? 이건 뭐지?”
곧 녀석의 의문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세디스가 시선을 돌리자, 골렘에 가려져 있던 구석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석재로 조각된 가슴 높이의 돌기둥 위로 웬 책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여기서 저 책이 제일 숨기고 싶은 보물인 모양인데?”
세타가 재미있다는 어투로 말했다.
동의한다.
평범한 물건이라면, 저리 꽁꽁 숨겨둘 이유도 없을 테니까.
곧 녀석이 망설임 없이 예의 책을 들어 보였다.
“나도 보자.”
세디스가 잽싸게 다가갔다.
그리곤 등 뒤로 빼꼼히 머리까지 들이밀었다.
서책의 첫 장.
‘테라의 왕족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비사(祕事)에 대해서…’ 따위로 시작되는 서두는, 일견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이거 뭐,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될 왕가의 비밀. 뭐 그런 건가?”
어느덧 세디스의 두 눈도 초롱초롱하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다음 글귀를 향하게 되었을 때.
-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나는 저주받은 씨앗이다. 아니, 테라의 왕족 대부분이 축복받지 못할 종자들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왕족들 사이에는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고위 귀족들. 그중에서도, 공작가에서 태어난 여식들은 반드시 왕족에게 시집을 오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는 비사랄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정략결혼이잖아. 이게 왜?”
세디스의 눈은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 …혈육으로 이어진 관계. 그것만이 쿠데타를 방지하고, 이 왕조를 영원토록 유지할 수 있다. 선대 국왕도, 그 앞의 국왕도, 모두가 그래왔다. 만약 공작가에서 여식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으면, 뒤에서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회유, 협박, 중상모략. 심지어 내 아버지는 납치도 서슴지 않으셨지.
“……!”
- 그건 앞으로 이 책을 볼 나의 후예들도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권력은 그냥 유지되는 것이 아니므로…….
세디스가 ‘합’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새 세타의 눈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책 전체로 치면, 지금까지는 소개 글에 불과하다. 나는 대륙력 212년, 테라의 5대 국왕 테디 칸 테레이라다.
대륙력 212년.
다시 말해, 이미 50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책이었다.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 얘기를.
“미친…….”
세디스는 지금, 명백한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