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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151화 (151/251)

151화. 가 작위(2)

마치 썩은 생선처럼 흐리멍덩해 보이기만 하던 왕의 눈에는 어느덧 기묘한 정광마저 어려 있었다.

“여, 여기서 말씀이십니까?”

“무릎을 꿇게.”

“하지만… 곧 추격자가 붙을 겁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탈출 가능성은…….”

내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조금씩 작아졌다.

상대의 동공은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기에.

일자로 꽉 다문 입매 하며, 그 고집스러운 얼굴은 언젠가 왕좌에서 봤던 정점의 사내.

국왕(國王) 우르고스 칸 테레이라 그 자체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이내 고개를 숙인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디스가 재빨리 사주를 경계한다.

이 나라의 법도(法度).

백작 이하의 작위는, 전적으로 왕의 자유의사에 따라 임명할 수 있다.

후작이나 공작과 같은 대귀족들이야, 필연적으로 왕정 회의를 거쳐야 하지만.

그 또한 최종 결정권자는 왕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진짜 귀족이 된다고…?’

일순간 내 전신이 잘게 요동쳤다.

나도 사람인지라.

막상 이런 상황을 마주하자 묘하게 가슴 한편이 떨렸다.

과연 어떤 작위를 하사받을까?

공작가의 후계인 크리스가 수년 전 자작이라는 가 작위를 받았으니, 남작 정도만 받아도 대박이었다.

비록 최하위 귀족이라곤 해도 평민과 남작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으니까.

“테라의 국왕, 우르고스 칸 테레이라 3세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서 엄숙하게 선언한다.”

원래는 국검(國劍)으로 작위를 수여하나, 아쉽게도 이 자리에서는 그것까지 바랄 순 없었다.

그는 검 대신 가만히 손을 들어 내 어깨 위에 얹었다.

“그 이전에, 세타 쿤 이그니스는 짐의 백성이 맞는가?”

찰나 움찔한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짐의 신하가 맞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하면,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가?”

“…….”

여기서는 잠깐 고민했다.

그저 형식적인 의례 절차라곤 해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평소 경멸했던 이들이, 입으로만 충성을 외치는 부류였으니까.

아까의 애쉬드 백작처럼 말이다.

“…폐하께서 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신다면, 저 또한 이 한 몸 바쳐 폐하께 충성하겠나이다.”

“……!”

순간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지 공주가 화들짝 놀랐다.

세디스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나도 안다.

감히 무엄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방금의 내 대답이 건방졌다는 사실을.

달리 표현하면, 내 사람을 건드리면 왕이고 뭐고 다 뒤집어엎겠다는 뜻이니까.

한데,

“…큭큭큭.”

도리어 우르고스 국왕은 웃음을 터뜨렸다.

더 나아가, 기껍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입만 번지르르한 쓰레기들보다는 훨씬 낫군.”

“…….”

“약속하지. 참고로, 짐은 네가 이리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예?”

“3년 전 내가 했던 제안. 잊은 건 아니겠지?”

“……!”

분명히.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수많은 귀족들의 반발을 뿌리치고 그는 내게 작위를 제안했다.

물론 그때에는, ‘국가 대항전에서 활약한다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기는 했지만.

“네 본래 신분이 평민이니, 원래는 남작 정도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만…….”

역시 예상대로였다.

물론 나쁘다는 건 아니다.

준 남작 다음이 남작이니, 단순 수치로 따져도 단번에 2단계나 신분 상승이니까.

허나, 우르고스 국왕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지. 아즈문의 일도 있었고 하니, 네가 그의 의지를 잇거라.”

“예? 그게 무슨…….”

“이 자리를 빌려 선언하노라. 세타 쿤 이그니스에게, 나 우르고스 칸 테레이라의 이름으로 ‘백작’의 위를 부여한다.”

“배, 백작이요!?”

“그래. 지금은 비록 가 작위에 불과하나, 국정이 안정되고 정식 수여식을 거행하게 되는 날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그니스 백작’이 될 것이다.”

“……!”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내 권위를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 엄격히 대역죄인으로서 다스릴 것이니.”

“…….”

이 엄청난 사실에, 나는 그저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친…….”

세디스는 아예 어전인 사실도 잊고 욕지거리까지 내뱉었다.

***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후우…….”

디자이어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내면에서 ‘나태’가 끊임없이 속삭였다.

제아무리 그라도.

역시 두 가지 죄악을 동시에 다스리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세타 쿤 이그니스.

그 녀석은 어떻게 색욕과 식탐의 힘을 무리 없이 한 그릇에 품을 수 있었을까?

“…큭!”

순간, 잦아들던 격통이 다시금 뇌리를 잠식했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음에도 이 고통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탐욕이 게걸스럽게 나태를 탐하려 한다.

허나, 나태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음이다.

그럴수록 디자이어의 정신은 피폐하게 메말라 갔다.

그 순간,

- 대공.

“……!”

거짓말처럼 디자이어의 전신이 우뚝 멎었다.

마치 모든 사고회로가 정지하는 듯한 느낌.

희미하게 머릿속에서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디자이어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 뜨였다.

“레, 레이지인가?”

- 맞아.

“어, 어떻게…?”

- 말했잖아. 난 죽지 않아. 그저 영원히 대공의 안에서 함께할 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는 도무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죄악의 전이는 곧 영혼의 소멸과 직결된다.

본체인 마왕이, 감히 그런 건방진 행태를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 잊었어? 내 능력이 어떤 종류의 힘인지. 참고로 비록 죄악의 힘은 잃었지만, 어쩌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 그게 정말인가!?”

- 응. 이럴 때를 대비해서 뿌려둔 씨앗이 있거든.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 혼자 울지 마.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 내가 대공을 도와줄 테니까.

“…….”

디자이어는 내면에서 들끓어 오르는 기운이 빠르게 안정화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곧, 그의 입가로 완연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야 못다 했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늘이 그에게 기회를 내려줬으니까.

“솔직히 나는… 마지막에 네가 했던 말. 그 답을 주지 못해 지금껏 괴로워하고 있었다.”

- 응?

“그때에는 나도 혼란스러웠거든. 아직도 내게 그런 감정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 무슨 뜻이야, 그게?

“그저…….”

그녀의 존재를 조금 더 명확하게 느끼기 위해 눈을 감은 디자이어는,

“나도 사랑했다. 아니, 지금도 사랑한다. 그 대답을 꼭 해주고 싶었다.”

- ……!

이윽고 진심을 고백했다.

우우웅!

순간, 디자이어는 내면의 묵직한 울림을 느꼈다.

그 기분 좋은 감정을 더욱 가슴 깊숙이 새겨 넣으며, 디자이어는 계속해서 명상을 이어갔다.

꼬박 하루가 더 지날 때까지.

***

한편, 별궁의 메인 주방 앞.

“이것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바이커가 초조한 낯빛으로 주변을 힐끔거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곳 인근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식사 시간도 아니었을뿐더러.

이중, 삼중으로 굳게 봉인된 식당과 식료품 통로는 딱 정해진 시간에만 개방되었으니까.

그마저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 직접 식료품을 운반했다.

바이커가 여태 이런 곳에서 눈치만 살피고 있는 이유다.

“그래도 왕족이니까,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는 보장해 준다는 거겠지.”

실제로, 별궁 내부에서 상주하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큼 외곽의 경비를 믿는다던가.

그도 아니면, 몇 없는 내부의 인원을 신뢰한다는 뜻이겠지.

미리 접하기로, 이곳 2층에는 마법 제1군단장인 애쉬드 백작이 기거한다고 들었으니…

다다다다다!

“……!”

그 순간, 웬 발걸음 소리가 바닥에서 전해졌다.

잽싸게 몸을 숨기려던 바이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복도 끝에서 달려오는 인영들은 그의 눈에도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세타, 성공했구나!”

곧 바이커의 입가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전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몰골이 야위었으나, 분명 기억 속에 있는 폐하도 함께셨다.

그 즉시, 바이커가 예를 갖췄다.

“폐하를 뵙습니다.”

“…인버스 공작의 차남이군. 고개를 들라.”

세디스에게 업힌 채시면서도, 폐하는 위엄을 잃지 않으셨다.

바이커의 두 눈으로 감격이 물들었다.

이거면 된다.

이대로면, 반란군의 뒤통수를 거하게 후려칠 수 있다.

“바이커. 통로는?”

“앞으로 1시간 후면 저녁 시간이니까, 그때를 노려야 할 것 같아. 보다시피 지금은 문이 완전히 막힌 상태거든.”

“그냥 내가 강제로 뚫어버릴까?”

“그건 하책이야. 이미 살펴봤는데, 문 곳곳에 충격에 반응하는 알람 마법이 발라져 있어. 수식을 복잡하게 꼬아둬서, 힘으로 풀려고 하면 대번에 저쪽에서 눈치챌걸.”

“그래? 앞으로 한 시간은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세타가 힐끗, 뒤쪽을 돌아봤다.

“…두 분이 함께라면 리스크가 배로 커지겠지. 그러니까 바이커. 네가 먼저 폐하와 공주님을 모시고 빠져나가.”

“뭐? 내가 무슨 수로?”

“벌써 잊었어? 내 능력.”

“……!”

순간, 바이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이곳까지도 안전하게 잠입할 수 있게 만들어줬던, 예의 그 사기적인 전이 능력.

한데,

“…그 능력, 분명 한계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사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막 쓸 수 있는 그런 능력이었냐?”

“한계라면 분명히 있지. 그때도 말했다시피, 세 사람이 최대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한 번 더 사용하면 내 엄청난 마나도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는 점.”

“…엄청 심각한 문젠데, 그거?”

“괜찮아. 아직 한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다며.”

세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곁의 인영에게 척하니 어깨동무를 걸쳤다.

“그때까지 충분히 마나를 비축해 두고. 혹시나 내가 쓰러지면, 여기 세디스가 어떻게든 처리해 주겠지.”

“…뭐, 나도 이런 데서 너랑 묻힐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세디스의 대답에도 바이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얘들이 아니라, 내가.

무려 폐하와 공주님을 탈출시켜야 하는 일이다.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이리라.

“표정 관리 좀 하고. 뒤는 확실하게 맡아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두 분을 모시도록. 이건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움찔.

찰나, 바이커의 동공이 요동쳤다.

“나,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넌 대인버스 공작가의 차남이잖냐. 우리랑은 태생부터가 다른.”

“그, 그게. 내가 그렇기는 한데, 차라리 이런 쪽은 네가 하는 편이…….”

“그럼, 추격자들은 네가 다 처리해 주고?”

“…….”

바이커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자신감 하면 바이커 론 인버스지. 안 그래?”

그제야 바이커의 두 눈으로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아, 알겠다.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나도 반드시 해내 보일 테니까.”

“걱정 말래도 그러네.”

“나 지금 진지하다. 이건 명령이야. 알지? 전시 상황에서 귀족의 명령은, 작위가 없는 이들에게 절대적이라는 거.”

“켁? 그리 따지면 지도 작위는 없으면서.”

“내 아버지가 공작님이시잖냐.”

“쩝, 그건 맞지.”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폐하께서 반응하신다.

그건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이었다.

어느새 폐하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세타 쿤 이그니스. 나 또한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지. 그대는 이제, 내가 누구보다 믿는 신하이자 이 나라의 ‘백작’이니까.”

“……!”

…뭣!?

이게 뭔 소리야.

누가 뭐라고?

“폐, 폐하…?”

“아 참. 깜빡 잊고 너한테는 말을 안 했네.”

“무슨…….”

“이제 나, 백작이라고. 폐하께 작위를 하사받았거든.”

“……!”

이어지는 세타의 말에, 바이커는 입만 쩌억하니 벌려댔다.

턱이 빠지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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