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50화 (150/251)

150화. 가 작위(1)

“…….”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과연 속사의 마법사라는 위명답게 아직도 그의 주변엔 넘실거리는 마나탄들이 가득했다.

허나,

“이만 하시지요.”

파창!

내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동시에.

예의 마나탄들은 곧장 대기 중에서 스러졌다.

“말도… 안 되는…!”

애쉬드 백작이 놀라 ‘흡’ 눈을 치켜떴다.

어전(御前)이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써클을 휘돌리며 재차 마나탄들을 생성해 내려 했다.

부질없는 짓이다.

“상대의 마법을 자의적으로 디스펠시킬 수 있다는 것.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스스로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웃… 기지 마라. 대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시니, 제 입으로 확실하게 말씀드리지요. 저는 애쉬드 백작님보다 강합니다. 이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너 같은 핏덩이가 최소 6써클 마스터 이상… 그딴 헛소리를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냐?”

“그럼, 눈으로 보고도 안 믿으시렵니까?”

“……!”

이제 애쉬드 백작의 꽉 다문 턱은 덜덜 떨려대기까지 했다.

그는 알까?

만약 내가 여기서 조금 더 노력을 하면, 써클의 상승 또한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만, 아직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다른 외부적인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며.

지금의 경지만으로도 어지간한 강자들은 대부분 찜쪄먹을 수 있기에.

바로 지금처럼.

“아까 제법 신경 쓰이는 말씀을 하시던데요. ‘이그니스’가 어쩌고 하고요.”

“……!”

“그 성에 대해서, 달리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마지막 말은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작 당사자인 나도 모르는 성(姓)을, 애쉬드 백작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확인이 필요했다.

순순히 실토하려 들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입을 벌리게 만들 생각이었다.

“부, 분명… 하지만 네가 구태여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순전히 내 착각일 테니…….”

“저는 단지 그 착각이라는 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하면… 알려주면 나를 그냥 보내줄 테냐?”

“…….”

나는 말없이 애쉬드 백작을 바라만 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제 침만 꼴딱꼴딱 삼켜대고 있었다.

이제 스스로도 확실하게 인지한 것이다.

어떤 방법을 쓰든, 나한테는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신변 정도는 보장해 드리죠.”

“그럼, 마나의 맹세를…….”

“어전입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 약속을 하겠습니까?”

“하, 하지만…….”

“그만. 그 이상은 폐하에 대한 무례이기도 합니다. 그리되면, 아무리 저라도 애쉬드 백작님을 그냥 보내드리지는 못하겠지요.”

“…….”

힐끗, 눈치만 살피던 애쉬드 백작이 이내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약속한 것이다.”

“네. 그러니까 어서 말씀해 보시지요.”

“…아마 이 나라 사람들은. 아니, 지금은 대륙인들 중 누구도 잘 알지 못하는 비사일 것이다. 나도 우연치 않게 오랜 고서(古書)에서 접했던 기록이니까.”

“무슨 고서요?”

“제국에서 발행된 고서로 보였다.”

“……!”

전혀 예상 밖의 대답에, 내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제국?

갑자기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정확히 발행자가 누구인지, 관련된 인물이 어떤 자들인지는 나도 모른다. 거기 적혀 있는 내용에 따라 백방으로 자료를 찾아보려 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문자 그대로, 관련 기록들은 완벽하게 말소된 상태였다.”

“…….”

냄새가 난다.

그것도 상당히 구린 냄새가.

“지금은 그저 몽상가가 지어낸 소설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네게서 그 이름을 들으니 조금 놀라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보시지요.”

“…고서 속에 등장하는 ‘이그니스’라는 성을 가진 인물은, 한때 누구보다 빛났던 사내였다. 허나, 최후는 누구보다 비참했던…….”

“비참했던?”

“…비운(悲運)의 황자.”

“화, 황자?”

“그래. 그의 풀네임은 지그하르트 폰 이그니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전전대 황태후의 핏줄이다.”

“……!”

“…라고 고서에 적혀 있더군. 다만, 실제로 알려진 역사와는 많이 다르다. 한 세기도 더 전부터 저 광활한 제국을 통치해 온 혈족은 오직 트쉬베르뿐이었으니까.”

그 말대로였다.

현 황제와 황자들의 성이 바로 트쉬베르였고, 이미 오랫동안 그 혈족들이 대륙을 지배해 왔으니까.

다만, 이 모든 이야기가 진짜라면.

그저 소설이 아니라, 제국에서 의도적으로 은폐한 ‘현실’이라면.

“…맙소사.”

내 부모는 제국인.

그것도 무려 황족의 자손이라는 의미가 된다.

***

같은 시각.

한 손에 웬 양피지를 움켜쥔 실비아가 있는 힘껏 집무실의 출입문을 열었다.

벌컥!

“……?”

미리 도착해 있던 일행들이 대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리스와 루나, 유리나는 당연히 참석했고.

이번 회의에는 자유 연합주인 세논, 부연합주 에이스, 초월과 환상의 두 마탑주와 더불어 일부 고위 귀족들도 함께였다.

“반란군 쪽에서 답신을 보내왔어요.”

“……!”

이윽고 이어지는 실비아의 목소리에 모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크리스였다.

“내용은 무엇이지?”

“직접 한번 보셔야 할 것 같네요.”

양피지를 건네받은 크리스가 그것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실제로 내용은 별것도 없었다.

- 해방군 측의 휴전 제의에 대해, 우리 혁명군은 며칠간 답을 미루고자 한다.

혁명군은 반란군이 스스로를 자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뭐 이런…?”

순간, 크리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게 끝이라고?

조금 더 살펴보려 했지만, 글자는 그게 전부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여나 거부하더라도 이유 정도는 기재해 둬야 예의가 아닌가?

물론, 이 경우에는 그저 며칠의 말미가 필요하다는 답신이기는 했지만,

“상황의 심각성은 저들도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 어찌…….”

확실한 건, 이대로 계속 내전을 벌이면 저쪽도 큰 손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피해는 향후 있을 제국의 침략에 크나큰 핸디캡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만, 다르게 생각하면…

“…역시 반란군은 처음부터 제국과 한통속이었나?”

이런 얘기라면 또 별개의 문제였다.

상식적으로, 병력과 군자금까지 밀어준 마당에 이제 와 그들을 내친다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했다.

“아니요. 그 부분은 세타 쿤 이그니스가 확언까지 했습니다. 제국의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요. 테라 전체로 보면, 이미 제 살 깎아 먹기로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으니, 이미 황제는 충분한 이득을 봤습니다.”

“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데, 이 와중에 무척이나 뜬금없이.

“…….”

문득 크리스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실비아 스필 세드릭.

저 자존심 강한 여인이, 누군가를 저토록이나 믿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던가?

곧 크리스는 그 의문을 그대로 입 밖으로 토해냈다.

“…세드릭 영애는, 세타 쿤 이그니스의 말을 무척이나 신뢰하는 모양이군.”

“…그야… 저도 같은 생각이니까요. 무엇보다, 능력 하나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내고요.”

가만히 지켜만 보던 세논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이스는 홀로 ‘암, 그렇고말고’ 따위의 말들을 중얼대기까지 한다.

허나, 그럼에도 크리스의 얼굴 위로 떠오른 의문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고기 맛도 씹어본 사람이 안다고.

왜인지, 믿는 이유가 그게 전부는 아닌 듯했으니까.

‘…혹시?’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저 마음속에 묻으려 했던 감정을 도로 되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면 일단 그에게 연락을 취해보지.”

일단 상념을 떨쳐 낸 크리스는 이내 품 안에서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세타 쿤 이그니스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직통 수정구였다.

한데,

“아뇨. 그렇다고 너무 그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죠.”

이번에도 실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는 믿는다더니?”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해방군의 참모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니까요.”

“…….”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에게 홀로 너무 큰 부담을 지우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실언했군.”

깔끔하게 실수를 인정한 크리스가 재차 물었다.

“달리 생각해 둔 방법이라도 있나?”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직접 카이클 공작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네요.”

“……!”

이어지는 실비아의 목소리에, 찰나 크리스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반란군의 수괴와 단판을 벌인다는 얘기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그 기개만큼은 과연 해방군의 참모라 부를 만했다.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하지.”

직후, 실비아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크리스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었다.

***

우리는 미리 생각해 둔 탈출 경로로 빠르게 내달렸다.

약속은 지켰다.

예의 애쉬드 백작은 전신을 꽁꽁 묶어 어느 방구석에 처박아뒀으니까.

한순간 마나를 역류시켜 큰 충격까지 줬으니, 깨어나도 아마 며칠은 꼬박 요양해야 할 터였다.

그보다는,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라는 말이지.’

한차례 주변을 둘러본 내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우선, 원래의 계획을 떠올려 보자.

자연스레 별궁 내부의 구조가 함께 머릿속에 그려졌다.

여느 대저택의 건물이 그러하듯, 이곳 별궁도 주방은 몇 개나 딸려 있었다.

그리고 신선한 재료들을 운반하기 위한 별도의 식료품 이동 통로까지.

우리가 이용하려는 탈출구는 바로 그곳이었다.

이를 위해, 바이커는 이미 진즉에 주방 근처를 살펴보러 갔다.

사실 이 부분은 원래 계획과 조금 달랐다.

바이커는 어디까지나 왕에게 신뢰를 얻기 위한 카드였으니까.

한데, 예상외로 왕은 우리를 순순히 믿고 따라줬다.

짐작컨대, 아마도 그 이유는…

‘…공주의 입김이 컸지. 이름이 레이지 칸 테레이라라고 했던가?’

힐끗, 헉헉대면서도 열심히 쫓아오는 그녀를 바라본 내가 입을 열었다.

물론 발은 쉼 없이 움직이면서.

“생각보다 저희를 잘 믿어주시네요.”

“…여기서 더 떨어질 나락도 없으니까요. 만약 적들이 수작을 부리는 거라면, 구태여 이런 번거러움을 감수할 이유도 없었겠죠.”

순간 움찔 몸을 떤 레이지 공주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음… 그것도 그렇네요.”

“그보다, 탈출 계획은 확실하게 있으신 거겠죠?”

“이쪽으로 쭉 가다 보면, 저희 동료이자 인버스 공작가의 차남인 바이커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일단 그 포인트까지만 도달하면… 궁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인버스 공작가의 차남…? 하면, 역시 당신은 해방군 쪽 사람이셨군요!”

그녀는 손까지 불끈 쥐며 좋아라 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따위의 말까지 중얼거리면서.

이미 예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니면, 직접 들으니 느낌이 또 다른 건가?

“루나는 잘 있나요?”

“네. 안 그래도 공주님을 잘 좀 부탁한다고 제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아마 이 계획이 실패하면, 제가 살아 돌아가도 그녀의 검이 제 목을 떨어뜨리겠죠.”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론지에 후작님이 전사하셨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입까지 틀어막은 공주님의 눈가로 언뜻 물기가 내비쳤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내가 가볍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세타 쿤 이그니스.”

웬 늙수레한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접촉한 이후, 처음으로 듣는 육성이었다.

일국을 통치하는 지배자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힘없고 갈라진.

“폐하?”

“이런 상황에서 조금 뜬금없지만… 내 직접 자네에게 가 작위를 부여하고 싶네.”

“……!”

순간, 내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왕을 업고 뛰던 세디스는 아예 몸까지 휘청였다.

한 나라의 왕에게 직접 가 작위를 내림받는다.

비록 공식적인 작위 수여식은 아니라 하더라도.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결국 나는, 이 시간부로 진짜 귀족이 된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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