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폐하를 구출하라(3)
고요한 밤, 우리의 거사는 시작되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모습을 감추는 인비저빌리티.
일대의 소리를 차단하는 사일런스.
거기에 더해, 플라이에 각종 신체 능력 향상 마법까지.
휙! 휘릭!
지금 막 높이 20여 미터가 넘는 후문의 외벽을 훌쩍 뛰어넘은 우리는,
“지금부터는 긴장해.”
눈앞으로 수백 평에 이르는 광활한 평지를 두고 있었다.
이곳부터 저 멀리 보이는 짙푸른 정원까지.
곳곳에 침입자에 대비한 마나 트랩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로, 일단 안으로 발을 들인 이상 지금부터 마법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달리 마법 왕국이라고까지 불리는 테라답게.
궁 전체에 마력을 감지하는 결계가 둘러쳐져 있었으니까.
다만, 정원 어딘가에 자리한 마나석만 제거하면 트랩은 작동하지 않는다.
외부 손님을 맞이해야 할 국가적 행사에서, 혹여나 있을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궁의 안전장치였다.
“여긴 나한테 맡겨.”
“어쩌려고?”
“잊었어? 내가 그간 어떤 훈련을 받아왔는지.”
순간,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세디스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한데 그 몸놀림이 새삼 예사롭지 않았다.
알면 보이는 것도 많다고 했던가?
그저 마검사의 재능을 타고났다고만 생각했는데.
몸을 사용하는 데 있어 녀석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만약 그대로 추락하는 달에 버티고 있었다면, 상위 달까지는 무난하게 올랐을 거란 확신이 절로 들 정도로.
쫘아아악! 휘리리릭!
세디스의 손에 쥐어진 스네이크 소드는 마치 채찍을 연상케 했다.
길이가 최대 10여 미터까지 늘어나는 그것을, 녀석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궁에서는 평지의 흉물스러움을 조금이나마 감추기 위해 띄엄띄엄 나무를 심어뒀다.
그 간격이 족히 수십여 미터나 이름에도 불구하고,
휘릭! 쫘아악! 휘릭! 쫘아악!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검을 로프 삼아 나무 사이사이를 건너뛰었다.
가만 보고 있노라니, 그 모습이 꼭 꼬리로 이동하는 원숭이 같았다.
퍽! 퍼퍽!
“…꺽!”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한 타격음과 웬 신음까지 들려왔다.
직후, 저 멀리 보이는 세디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오…….”
그제야 나와 바이커는 여유롭게 평지를 가로질렀다.
곧 정원에 도착하자 한편에 쓰러진 몇몇 경계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리한 푸른 마나석도.
“죽인 건 아니지?”
“칼등으로 살짝 쳤을 뿐인데 뭘.”
“스네이크 소드에도 칼등이 있었나?”
내 물음에 세디스가 보란 듯 제 검을 들어 보였다.
“일단 이것도 검이거든?”
“아까 이동할 때 쏘아지는 속도만 보면, 단순 타격만으로도 사람은 단번에 목이 꺾여 즉사할 기세였다만…….”
“날 뭘로 보는 거야? 힘 조절은 살수의 필수 소양 중 하나야. 즉사는 면하면서도, 회복은 절대 불가능할 정도의 치명상. 그 정도는 돼야 우리도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거든.”
“과연.”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힐끗 정면을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 왕이 갇혀 있다는 별궁이 보였다.
한데, 그곳의 경비들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척 보기에도 기세가 범상치 않은 기사들이, 손수 별궁 외곽을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바깥에서 보이는 테라스 곳곳에는, 테라가 자랑하는 왕실 마법사들까지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까진가. 아무래도 이 이상 몰래 숨어드는 건 힘들겠군.”
“잠깐만.”
바이커의 중얼거림에 나는 턱을 괸 채 생각을 거듭했다.
정면 돌파?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하책이기도 했다.
방법이 없다고 무작정 밀어붙였다간, 설령 돌파에 성공하더라도 탈출은 실패할 테니까.
그런 거라면…
“…역시, 우리도 달이 되는 수밖에 없겠네.”
“어쭈? 아주 살수 다 되셨어? 설마 나랑 똑같은 생각하고 있냐?”
세디스가 장난스레 내 어깨를 툭하고 쳤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어제의 일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쩝.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나태를 취했어야 하는 건데.”
가볍게 입맛을 다신 내가, 이내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
어느 으슥한 동굴.
“…….”
칠악의 대공, 디자이어는 지금 무척이나 심각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 공…….”
“…레이지.”
바로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가고 있었기에.
복부의 상처는 얼핏 봐도 치명상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진즉 죄악의 힘으로 자연 회복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상흔에 남은 마나가 상처를 좀먹고 있었다.
“빛의 마나…….”
이윽고 마나의 정체를 확인한 디자이어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빛과 마기는 상극이다.
칠악 중에서도 신체적인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레이지에게는 가히 극독이나 다름없었다.
“난… 이미 틀렸어. 그러니까, 차라리 대공이 취해줘.”
“……!”
순간, 귓가를 때리는 희미한 목소리에 디자이어가 이를 악물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으나, 상대가 무엇을 전하려는지 구태여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이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을, 결국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레이지는 곧 죽는다.
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확실하게 인지했다.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소생 불능의 상태.
뒤쪽에 자리 잡고 선 외팔 사내가 착잡한 눈빛을 보내온다.
그 시선은, 이내 비수가 되어 디자이어의 심장으로 날아와 꽂혔다.
“알… 잖아? 이대로… 면, 나태는 그저 본체로 회귀할 뿐이라는… 거.”
“…….”
“그러기 전에… 대공이… 취해줘. 그렇게라도… 대공과 함께하고 싶으니까. 영… 원히.”
“……!”
누군가 슬프냐고 묻는다면, 고민조차 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라고.
슬픔은 사람이나 느끼는 감정이니까.
이미 반마의 존재로 거듭난 디자이어에게, 그런 인간적인 잔향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 그러할진대…
‘…이 욱신거림은 무엇이란 말인가?’
직후, 가슴을 움켜쥔 디자이어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곧 그는 깨달았다.
레이지는 아직도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알겠다.”
“고… 마워.”
그제야 레이지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맺혀졌다.
곧이어,
우우웅!
레이지의 벌어진 잇새로 웬 보랏빛 구체가 떠올랐다.
나태의 일부였다.
디자이어는 그것을,
콰득!
망설이지 않고 통째로 집어삼켰다.
파르르르르.
그 즉시 레이지의 신형이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쉼 없이 떨려댔다.
그녀가 손을 뻗는다.
디자이어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만 봤다.
잠시간 볼을 쓰다듬던 그녀의 손길은,
툭.
이윽고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가 속삭인 마지막 목소리는, 디자이어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고생 많았다, 레이지.”
지금 이 순간, 디자이어는 다짐했다.
어쭙잖은 잔머리 굴리기는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하니, 이번에야말로 그 녀석.
세타 쿤 이그니스를 죽일 것이다.
반드시.
***
레이브 강 너머에 자리한 반란군의 임시 진영.
그곳 중앙 천막에서, 카이클 공작은 한 인영과 독대를 나누고 있었다.
“일전에 해방군 측에서 해온 제안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편지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미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으신 것 아니십니까? 구태여 왜 제 의견을…?”
“생각해 보니, 굳이 우리가 응해야 할 이유가 없을 듯해서 말이다.”
“예?”
“아군은 확실하게 돌려받았다. 뒤늦게 마음이 돌아선 이들까지 품에 안았지. 이제 걸릴 건 아무것도 없으니, 원래 목적대로 해방군부터 빠르게 집어삼키고, 제국군에 맞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구나.”
“하지만 저곳에는 두 마탑주와 빛의 마녀, 8월의 검사까지 있습니다.”
“안다. 그러니 더 잘되었지 않느냐?”
“……?”
“이제 ‘마탑’을 테라의 내전에 참전시킬 확실한 명분이 생겼으니까. 제 식구는 당사자가 직접 처리토록 하는 것이 옳은 논리겠지.”
“……!”
그제야 인영의 신형이 작게 들썩였다.
“…그렇군요. 어차피 적이 될 이들이라면…….”
“병법의 최고봉은 적과 적을 싸우게 만드는 거지. 이런 걸 통수에 통수라고 한다지?”
“…이해했습니다. 역시 공작 각하십니다.”
“둘만 있을 땐 아버지라 부르래도.”
설핏 미소 지은 카이클 공작이 정면을 바라봤다.
독대의 상대.
그의 아들이자, 왕국 제일의 천재라는 제노스가 그곳에 있었다.
어째 매번 느끼는 거지만,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이다.
“내 생각을 알게 되었을 때, 네 친구 녀석의 표정이 퍽이나 볼만하겠구나.”
“…….”
“응? 표정이 왜 그러느냐? 혹, 정말로 친구의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아 그러느냐?”
“…그게 아닙니다.”
“하면?”
“저는 그저… 그 녀석이 뒤통수를 친다면 모를까, 뒤통수를 맞는 모습은 쉽게 상상하기 힘들어 그랬습니다. 그만큼 저는, 세타 쿤 이그니스를 제 호적수로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호오…….”
그제야 카이클 공작이 흡족한 미소를 내어 보였다.
확실한 라이벌이 있다는 것.
그만큼 성장에 도움이 되는 요소도 없으니까.
실제로 제노스는 그 압도적인 재능으로 여태 너무 고독하게 성장해 왔다.
“내 생각도 같다. 한 번 본 것뿐이지만, 분명 보통 녀석은 아니었지.”
“…….”
“하지만 이 나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야. 포위망은 보다 견고해졌고, 내 계획은 보다 완벽에 가까워졌으니.”
그 명성답게.
카이클 공작의 목소리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허나, 정작 그도 간과한 현실은.
뒤통수.
또 다른 이름으로, ‘빈집털이’를 당하고 있는 것은 현재 그 자신이라는 사실이었다.
***
테라의 별궁.
그 안에서도 1층의 볕이 가장 잘 드는 방에, ‘그’가 있었다.
“폐하, 또 끼니를 거르셨습니까?”
곧 방 안으로 한 여인이 들어섰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문 앞에 식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방의 주인은 우르고스 칸 테레이라.
이 나라 테라의 왕이 바로 그였으며, 지금 막 내부로 발을 들인 여인은 공주인 레이지 칸 테레이라였다.
“하아…….”
친한 이들에게는 달리 ‘레이’라고도 불리는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강인해 보이던 폐하는 이제 없었다.
그저 무척이나 몰골이 야윈 중년의 사내만이 눈앞에 자리해 있을 뿐.
“기운 차리셔야지요. 폐하께서 혹여 잘못되기라도 하시면, 이 나라는 완전히 저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 거랍니다.”
“…….”
레이의 속삭임에도 상대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도리어 직후,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제법 컸던 모양인지, 감시자나 다름없는 기사들은 기세만으로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에요.”
가만히 사내의 등만 바라보던 레이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괜히 기사들에게 미운털이 박혀봐야 이 짧은 시간마저 사라질 가능성이 컸기에.
“…네게는 늘 미안하구나.”
“……!”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였다.
허나, 레이는 확실하게 들었다.
그녀의 입가로 아픈 미소가 번져 갔다.
“…또 올게요.”
자그맣게 중얼거린 레이가 이내 출입구로 다가섰다.
대기하고 있던 두 기사는 곧장 방문을 닫으려 했다.
그 순간,
퍼퍽!
“……?”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갑작스레 예의 기사 둘이 모로 쓰러졌다.
곧이어,
휙!
웬 젊은 사내가 천장에서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다, 당신은?”
외모만 놓고 평하자면, 상당히 잘생긴 사내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래서 기억한다.
새로이 등장한 사내는, 레이의 머릿속에도 분명히 남아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그녀에게도 꽤나 설레고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분명…
“세타 쿤 이그니스…?”
“어라? 저를 기억하시네요.”
“역시 당신이 맞군요!”
짝, 손뼉까지 치는 그녀를 향해,
“구하러 왔습니다, 공주님. 그리고, 폐하.”
“……!”
세타가 멋들어지게 허리를 숙였다.
분명 귀족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여느 뺀질대는 이들보다도 훨씬 보기 좋은 예(禮)다.
실제로, 그건 레이가 지금껏 본 그 어떤 것보다 멋있는 재회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