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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144화 (144/251)

144화. 나태의 죄악(1)

“…넌 정말로 안 될 아이구나?”

사이하게 미소 지은 레이지가 그리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번쩍!

“……!”

직후, 그녀의 신형이 내 앞에서 사라졌다.

나른하기 그지없는 얼굴.

연신 흐물거리는 평소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실로 믿기 힘든 속도였다.

한데, 놀라운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척이… 사라졌다?”

두 눈이 연신 주변을 훑었다.

허나,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느껴지는 기운조차 조금도 없었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생명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쐐애액!

“세타, 위에 조심!”

“……!”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즉시, 몸이 먼저 반응했다.

푸욱!

한 박자 늦게 날이 선 비수가 내가 있던 허공을 갈랐다.

머리 위에서 뚝 떨어져 내린 레이지는, 직후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뭔 씹…….”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분명 내 주변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하면, 루나는 어떻게 이 존재감을 먼저 눈치챘을까?

“…….”

의문을 담아 시선을 돌렸지만, 루나는 여전히 불똥 튀는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상대가 ‘감히 나를 두고 한눈을 팔다니…’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희미하게 귓전을 때렸다.

‘눈이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느낀다… 뭐 그런 건가?’

기실, 이건 에이스 스승님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상대를 눈으로 뒤쫓지 마라.

그리하면, 필연적으로 동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말이야 쉽지.

쐐쐐쐐쐐쐑!

“윽…!”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금 집중을 하려 들면 사방에서 흑색의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저 빌어먹을 마사수부터 처리해야 하는가.

허나, 그러기에는 레이지의 존재가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푹!

“꺅!”

“……!”

순간,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레이지가 비수를 내질렀다.

부지불식간 기습을 당한 이는 유리나였다.

허벅지가 깊게 베인 그녀가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이미 무리하고 있었던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리 여유롭게 있어도 되는 거니? 나는 너만 공격한다는 얘기는 조금도 하지 않았는데.”

“…비겁한 할망구.”

“훗. 그래. 난 치졸하고 저열한 여자라, 계속해서 네 동료들을 상처 입힐 생각인데… 아니다. 그냥 콱 죽여 버릴까?”

“…….”

“그래. 죽여 버리는 게 낫겠다. 어차피 해방군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까.”

우우웅!

내 써클이 거칠게 진동했다.

전신으로 피어오른 마나는 순식간에 술식을 구성하고.

곧 하나의 마법을 만들어낸다.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ear).”

파지직!

한줄기 뇌전이 섬전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레이지에게 날아들었다.

“어림도 없지.”

퍼석!

직후, 레이지는 또다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무척이나 성가신 능력이었다.

마법사의 텔레포트라면, 하다못해 마나의 흐름이라도 감지될 텐데.

저건 효과는 같으면서도 사전 징후를 전혀 느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실력 있는 암살자들은 기척을 숨기는 데 능하다더니.

저건 숨기는 정도가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 있다 ‘왁!’ 하고 나오는 듯하지 않은가?

‘…가만, 숨는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만약 저게 칠죄종의 능력이라면.

기사인 루나보다 마법사인 내가 먼저 기척을 감지해 내야 순서가 옳았다.

죄악의 기본이 되는 마기에 가장 민감한 존재는, 기사가 아닌 사제나 마법사니까.

다시 말해,

‘이건 죄악의 힘이 아니라, 허공에 숨은 마사수와 똑같은 은신 능력이다.’

이제야 희뿌연 머릿속이 조금은 개어지는 느낌이다.

비교적 최근에 세디스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개개인에게 숫자가 부여되는.

즉, 정식 달로 인정받게 되면 가장 먼저 고유의 은신술부터 배우게 된다고.

아마 예의 열아홉과의 전투에서도 처음부터 그가 작정하고 숨었다면, 그리 쉽게는 사로잡지 못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은신술의 핵심은…

사아아아아아!

상념을 이어가던 그때, 바로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신경을 특정 지점에 집중하자 그제야 레이지의 존재감이 전신으로 각인되었다.

하여,

쯔어어어어엉!

나는 망설임 없이 손안에 마력 검을 생성해 냈다.

그리고 휘둘렀다.

최초 잔영처럼 흩뿌려지는 마력 검은, 곧 수십 개의 검로로 쏘아졌다.

마치 가야 할 곳을 몰라 막무가내로 베어내는 듯이.

찰나, 허공에서 ‘훗’ 하고 코웃음을 치는 환청이 들려왔다.

물론 환청이 아니라 진짜 비웃는 것일 테지.

‘그리 생각하는 시점에서 네 패배다, 나태의 레이지.’

나는 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증식과 가속.

두 가지 마법이 한데 어우러진 마력 검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로 합쳐졌다.

곧이어, 정확하게 한 곳을 찔렀다.

푸욱!

“……!”

웬 피육을 꿰뚫는 소음과 동시에, 손끝에서 생명체를 찌르는 감각이 전해졌다.

마력 검이 내다 꽂힌 곳은 바로 등 뒤.

더 정확히는, 짙은 음영이 진 ‘그림자’다.

그 순간,

“…쿨럭!”

내 그림자는, 꿀렁이며 한 인영을 토해냈다.

복부 한복판이 꿰뚫린 그녀.

레이지가 그곳에 있었다.

***

20년도 더 지난, 빛바랜 기억.

그 시절의 레이지는, 소위 잘나가는 귀족가의 여식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항상 배를 채울 수 있었고.

이따금 외부로 모습을 보일 때면, 그 신분만으로도 모두가 고개를 숙일 정도로.

그 탓인지 레이지는 갈수록 나태해졌다.

손짓 하나면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종래에는 가족들마저 그녀를 포기했을 무렵.

가문이 망했다.

호시탐탐 영지를 노리던 인근의 영주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영지전을 걸어온 것이다.

그래, 그때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왕이란 작자는 불합리함을 알면서도 이를 묵인했다.

그때에도 강한 자가 법인 세상이었으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인근에서나 목소리가 큰 일개 백작이었고, 싸움을 걸어온 이는 나라 전체에서도 위명이 자자한 대귀족, 공작이었다.

고작 3일.

풍족했던 가문 전체가 몰락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부친을 포함한 그녀 가족들을 눈앞에 꿇려두고, 영지를 빼앗은 공작은 말했다.

감히 역모(逆謀)의 뜻을 품은 죄로, 가주는 죽여 그 목을 광장에 효수하고.

다른 가족들은 평생을 노예로 살게 될 것이라고.

그랬다.

그녀의 나라는, 서남부에 자리한 리비아 왕국.

실제로 아버지는 제국으로의 망명을 준비했다.

그 시절에는 암암리에 꽤나 성행했던 일이다.

인접국들을 흡수하며 급격하게 몸집을 키워가던 제국은 인력난에 시달렸고.

황제는 부와 지위를 약속해 가며 타국의 귀족들을 영입하려 들었다.

능력만 있다면, 출신을 막론하고 귀히 쓰겠다는 단언까지 했다.

물론 이 소식을 접한 타국의 왕들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다만, 포식자인 황제에게는 감히 무어라 말할 수 없으니.

국내에서 혹여라도 망명을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나라를 배신한 대역죄인으로 취급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괘념치 않았다.

당신은 확신했으니까.

제국은 아주 잠시 발톱을 감춘 호랑이라고.

지금은 평화롭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대륙 전체가 피바다로 물들 것이라고.

최후에는 결국, 제국이 이 땅을 모두 집어삼킬 것이라고.

아버지는 그러기 전에 가문의 모든 식솔들을 데리고 나라를 떠나고자 한 것이었다.

그 결과,

결국 당신은 목숨을 잃었고, 그 명예는 더럽혀졌다.

그녀와 어머니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예고대로 노예로 팔려 갔다.

남자들은 대부분 ‘고기 방패’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전쟁 노예로.

그에 비해 여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얼굴이 반반하다 싶으면 귀족들의 성 노리개로.

나머지는 가장 천한 허드렛일이나 하는 하녀로.

온실 속의 화초였던 레이지는 전자였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예순을 훌쩍 넘긴 늙은 귀족에게 팔려 갔으니까.

앞으로의 미래를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이송 과정이었다.

그 며칠 사이, 수백 번은 더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린 듯싶다.

절망. 좌절. 후회.

그 비극적인 낭떠러지의 끝에서, 레이지는 ‘그’를 만났다.

“…멈춰라.”

“웬 놈이냐!?”

그날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오후.

하나뿐인 오솔길을 웬 흑발의 미남자가 막아섰다.

이미 이송 중에 수도 없이 치욕을 당한 레이지는 이미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 만하군. 너희 인간들이야말로, 마족들보다 더 지독한 존재들이다.”

“갑자기 막아서선 뭔 씹소리냐? 저리 안 비켜!?”

이송을 담당한 노예상들이 분분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 머릿수만 스물에 이르렀다.

이십 대 일.

누가 봐도 한쪽의 전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푸-확!

“……!”

기적이 일어났다.

“크헉!”

“사, 살려줘. 제발…….”

그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사방으로 솟구치는 붉디붉은 피 보라 속.

흑발의 미남자는 단 두 개의 검으로 노예상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레이지가 더블 소드(Double Sword)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

한 편의 학살극은 금세 마무리되었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스물에 이르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미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레이지에게 사내는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겠나?”

“…….”

흑발의 사내.

그 시절의 대공은, 레이지에게 세상 무엇보다 찬란한 빛이었다.

***

두근, 두근, 두근.

과거의 늪에서 빠져나온 레이지는 심장이 박동해 옴을 느꼈다.

빠져나간 피만큼이나 이성까지 날아간 기분이다.

그녀의 눈앞에, 언젠가 본 적 있는 부친의 원수가 오버랩되었다.

“세타, 쿤, 이그니스…….”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내뱉듯 중얼거린 레이지의 주변으로,

콰콰콰콰콰콰콰!

“……!”

일순간 마기가 폭발했다.

대공에게 해를 입히려는 자.

그 누구라도, 이 손으로 쳐 죽이리라.

***

“크르르르르…….”

흠칫.

찰나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나는 곧장 시선을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어느새 상처 입은 레이지는 신형을 곧추세운 채였다.

그녀의 잇새로 기괴한 흉성이 새어 나오고 있다.

‘…나태의 죄악. 그 주인은 마왕 벨페고르. 능력은 분명…….’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던 지식이 빠르게 떠올랐다.

나태의 대표적인 능력은 기체화(氣體化)다.

무색무취의 연기로 화한 그것에게, 물리적인 타격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갖가지 마법 또한 마찬가지다.

가히 회피의 마왕이자, 달리 기체화를 절대 방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휘오오오오오!

- 상성적으로, 너는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어.

어느새 완전한 기체화를 이룬 레이지가 내게 의념을 전했다.

“무슨 뜻이죠?”

- 나는 느껴지거든. 네 몸 안에 있는 식탐과 색욕의 힘이. 죄악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라는 점은 놀랍지만, 같은 기운으로 내게 타격을 입히는 건 불가능해.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벨페고르의 권능을 믿는 건가요?”

- …뭐라 생각하든. 나는 지금부터 하나둘 네 몸에 상처를 낼 거야. 피가 냇물을 이룰 때까지 말려 죽일 작정이거든.

내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상성(相性).

그 이름을 먼저 입에 올린 상대가, 나는 그저 가소로웠다.

“죄송한데, 상성을 따지자면 칠악들 모두가 저와는 상성인데요? 물론, 제게 긍정적인 방향으로요.”

- …훗. 이 상황에서도 허세니?

“잊었어요? 아카데미 때 제가 무슨 마나를 사용했는지.”

- …설마…….

찰나 흔들리던 연기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 …아니. 이미 마기를 몸 안으로 받아들인 이상, 빛의 마나는 사용할 수 없을 텐데. 두 가지 속성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니까.

“아니요? 마법적인 관점에서 따지자면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고, 반대로 어둠이 존재해야 빛도 자리 잡을 수 있는 법이니, 그 반대겠죠.”

- 그런 이론적인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됐고, 그 눈으로 직접 한번 보세요.”

우우우웅!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내 써클이 크게 진동했다.

그리곤,

화아아아악!

이내 내 양손으로 보란 듯이 어마어마한 빛의 덩어리가 만들어졌다.

- ……!

“내가 얘기했죠?”

- 어, 어떻게…?

“이전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저는 당신과 달리 빛과 어둠. 양면을 모두 지닌 ‘인간’이니까요.”

- …너는…….

예의 기체화된 레이지가 크게 꿈틀거렸다.

-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존재였구나.

직후, 내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시 만나 반가웠습니다.”

나는 지체 없이 손안의 구체를 정면으로 쏘아 보냈다.

번-쩍!

곧 어마어마한 빛무리가 순식간에 건물 전체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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