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지휘권 확보(4)
“…….”
사위에 고요한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승부를 결정지은 직후였다.
말을 어디로 움직여도 절대 결과를 뒤집을 수 없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처, 처음이지? 국내에서 인버스 공작님이 체스로 패하시는 거. 내 기억으로, 10년 전 체스를 테라로 들여온 게 다름 아닌 인버스 공작님이셨던 것 같은데…….”
실제로 테라에서 체스의 역사는 비교적 짧았다.
대략 20년 전부터 제국의 일부 귀족들에게나 유행하던 것이 근래에야 테라로 유입되었으니까.
유행이란 그런 것이다.
놀이든, 옷이든, 다른 기호품이든.
잘나가는 누군가가 하기 시작하면 너도 나도 따라 하는.
내 눈앞의 체스도 그랬다.
“…352전 351승 1무.”
그때,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선 크리스가 속삭였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국내 공식 전적이다. 그 1무조차도 스테일메이트(Stalemate). 상대는 카이클 공작님이셨지.”
“…….”
“사람들이 이리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는 뜻이다. 무릇 어떤 분야든, 경험과 연륜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니까.”
나는 힐끗 인버스 공작을 바라봤다.
그는 아직도 주먹만 꽉 쥔 채 온몸을 파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얼굴 한가득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선.
그쯤 되자 마음 한편으로 살며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여, 곧장 그 근심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내기는 내기니까, 지휘권은 양도하시는 거죠?”
물론 대상은, 충격을 받은 인버스 공작이 아니라 약속의 이행 여부였다.
“…….”
그때서야 상대가 반응한다.
그는 순간적으로 입술을 콰득 깨물더니,
“웃…….”
“웃?”
“웃기지 마라!”
촤르르르륵!
체스판을 통째 집어 던졌다.
제 자리를 잃은 말들이 바닥으로 흩뿌려진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는 한참이나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러시면 곤란한데?”
“감히 비열한 속임수로 나를 농락하다니. 기사들은 당장 검을 뽑아라!”
촤아아아앙!
순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덟 명의 기사가 힘차게 검을 뽑아 들었다.
소수의 인원만 성 내부로 들이기로 했으나, 그 소수에는 최소한의 호위도 포함됐다.
혹시나 이런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 엄선된 전력들 말이다.
“저 인버스 공작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살며시 미간을 찌푸린 실비아가 곧장 손을 들어 올리려 한다.
허나,
“…잠깐만.”
“……?”
나는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이유나 들어봅시다.”
“뭐라?”
“게임은 공정했습니다. 남들 눈에는 순 억지나 부리시는 걸로 보입니다만, 대체 제가 무슨 속임수를 썼다는 것인지요?”
“흥. 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나는 분명 게임 중 이상한 낌새를 느꼈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뜻이야.”
“아하.”
내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곁에 선 크리스의 표정조차 착잡하게 물들어갔다.
그 모양새가 꼭, ‘어쩌다 저렇게까지 추해졌는지…’ 하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이게 소위 말하는 높으신 분들의 갑질이라는 거죠?”
“네놈이 무어라 지껄이든, 나는 이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 순순히 속임수를 썼음을 인정하던가, 그도 아니면…….”
나는 인버스 공작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죄송하지만, 방금 하신 말씀들은 모두 이 ‘기억 저장구’에 기록되었습니다.”
어느새 내 손안에 녹 빛으로 빛나는 둥그런 구체가 들려 있었다.
게임 시작 전부터 내가 미리 작동시켜 둔 기억 저장구였다.
“뭣…!”
“한 번 봐놓고도 이리 당하시니, 저는 정말로 공작님의 능력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멍청한 자가 대체 어떻게 해방군의 지휘를 도맡아 왔는지… 이래서 계급이 깡패라고들 하는 모양입니다.”
“놈!”
직후, 인버스 공작이 참지 못하고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으로 짜르르,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알려진 인버스 공작의 경지는 5써클 마스터.
엑스퍼트 중상급 기사 여덟에, 고위 마법사 하나라면 분명 대단한 전력이다.
다만,
“또 후회하시려고 그러시네.”
머릿수는 이쪽도 결코 밀리지 않았다.
홱!
“…억!”
마나를 담아 있는 힘껏 내 안면으로 주먹을 뻗어오던 인버스 공작이 괴성을 터뜨렸다.
주먹은 내 볼 끝을 스치고.
나는 일직선으로 뻗은 팔을 지렛대 삼아 곧장 그를 엎어 쳤다.
콰앙!
“커헉!”
그 결과, 인버스 공작의 등판이 통렬하게 맨바닥 위에 작렬했다.
“고, 공작 각하!”
여덟 기사 중 하나가 경악성을 토해낸다.
허나,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크리스와 유리나, 루나, 실비아 등.
아까 말했듯 당장 우리 편의 전력 또한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속으로 중얼거린 내가 힐끗, 주변을 둘러봤다.
족히 수십 명도 더 들어설 수 있을 듯한 너른 로비였다.
이곳에서 난전이 벌어진다면, 결국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도 눈치챌 테고.
그리되면 상황은 내게 훨씬 유리하게 작용할 터였다.
“괘, 괜찮으십니까?”
눈치를 살피던 두 기사가 조심스레 인버스 공작을 부축했다.
“나, 나는 괜찮으니 저 미친 아티팩트부터 빼앗아라.”
“며, 명 받들겠습니다.”
…어찌 끝까지 저리 추한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더니.
해방군이 이렇게 몰락하게 된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한데, 하늘도 이들을 벼르고 있었던 것일까?
‘…살기?’
순간, 내 눈이 ‘흡’ 치켜떠졌다.
최선두에서 대치하던 루나가 황급히 몸을 굴렸다.
하늘에서 은(銀)의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그건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멀지 않은 곳.
일행들과 긴장 어린 대치를 이어가고 있던 여섯 기사의 목이,
서거걱!
“……!”
곧 주인을 잃고 줄줄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으니까.
***
아무런 전조현상도 없이.
쉬쉬쉭!
다른 달들과 함께 지붕 위에서 ‘뚝’ 하고 떨어진 레이지가 주변을 훑었다.
이미 달들은 충실하게 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죽여라.
근접전으로는 꽤나 까다로운 기사들도 여럿 보였으나, 상관없었다.
정면 승부가 아닌 기습이니까.
야습이라면 더더욱 좋았겠지만, 밤을 기다리기에는 기회가 너무 좋았다.
성 내부의 병력이라고 해봐야 척 보기에도 고위 인사인 열댓 남짓이 전부였으니.
채애애앵!
“…채앵?”
순간, 처음으로 살을 가르는 파육음이 아닌 쇳소리가 들려왔다.
레이지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을 치떴다.
이곳에 있는 달들의 기습을 막아낼 수 있다 함은.
목표물의 실력이 예상을 상회한다는 뜻이니까.
“엑스퍼트 상급?”
웬 흑발의 여인이었다.
그것도 상당히 젊어 보이는.
그 검 위로 덧씌워진 것은 최상급을 목전에 둔 상급의 오러다.
“이름이 무엇이지?”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녀 앞의 일곱 번째 달이 흑발의 여인에게 물음을 던졌다.
“루나 틴 론지에다.”
“…루나 틴 론지에? 황제가 탐내는 인재라는 그?”
세븐스 문이 복면 뒤로 사뭇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아하.”
그제야 레이지도 손뼉을 쳤다.
어쩐지 범상치 않아 보인다더니.
오히려 소문이 훨씬 못한 느낌이잖아?
알려진 그녀의 나이는 이제 고작해야 20대 초반.
한데도 이미 엑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은…
가히, 제국 최고의 재능이라는 나이트 쟈벨린과도 견줄 만했다.
“쟤도 반드시 죽여야겠네?”
챙! 챙! 채애애앵!
무차별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주변과 달리.
레이지의 시선이 향하는 그곳만큼은 박빙이었다.
비수를 역으로 꼬나 쥔 자객.
그리고 척 보기에도 예기가 줄줄이 흐르는 기사.
이미 기습이 막힌 시점에서, 후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해야 정상이지만.
추락하는 달의 조직원들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들이다.
휘리리릭!
휘돌리는 비수에 깃든 것은 상대에게 뒤지지 않는 상급의 오러였으며.
속도와 힘, 기교 등 어느 하나 밀리는 부분이 없었으니.
“…흡!”
순간, 루나가 눈을 치떴다.
놀라운 일은 직후에 벌어졌다.
그녀의 검 위로 완연한 검의 형상을 이루는 짙푸른 오러가 덧씌워졌으니까.
“뭐야, 최상급이라고?”
…아니, 아니다.
일시적으로 힘을 폭발시킨 것이겠지.
루나 틴 론지에는 지금 무리를 하고 있었다.
미세하게 입가가 시꺼멓게 죽어 있었으니까.
마나 홀이 한계를 넘어섰을 때 발생하는, 최초의 현상이다.
“저쪽도 금방 끝나겠네.”
그제야 레이지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쓰러진 테이블을 중심으로, 우측의 인원들은 대부분 명을 달리했다.
오히려 좌측의 다소 젊은 핏덩이들이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갈 듯싶었다.
사사로이 목적도 이루고.
거국적으로는 제국의 대계에도 도움을 주고.
이거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아니겠는가?
레이지의 입가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혀졌다.
그 순간,
꽈아아아아아앙!
“……!”
처음으로 달 하나가 튕겨 나갔다.
레이지는 당황하지 않았다.
정보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에 일이 이렇게 쉽게 풀려갈 거라고는, 그녀 또한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스팟!
직후, 레이지는 곧장 땅을 박찼다.
그리고,
불쑥!
나인스 문을 튕겨낸 예의 인영의 앞으로 들이닥쳤다.
여타 달들과 마찬가지로.
어느새 레이지의 양손에도 한 쌍의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곧장 그것을 전면으로 들이밀고는,
“오랜만이네?”
“…….”
“진짜로 반가워. 나는 줄곧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는데, 너는 나를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예상외로, 녀석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지, 나태의 레이지.”
“어머?”
“나야말로 반갑다. 이렇게 제 발로 직접 찾아와 줘서.”
“뭐야아~ 너도 내가 보고 싶었던 거야?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네?”
몸을 베베 꼬아대던 레이지가 싱긋 미소 지었다.
허나, 그녀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 할망구가.”
순간적으로 레이지의 표정이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는 최대의 콤플렉스는, 다른 무엇도 아닌 ‘나이’였으니까.
“…선 넘네?”
곧 레이지의 내면에서 살기가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만큼 내부로 잠입한 의문의 복면인들은 강했다.
기척은 나조차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은밀했고.
팔뚝만 한 단도를 휘두르는 실력은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나았으니까.
무엇보다,
푸푹! 푸푸푸푸푹!
천장에 숨은 또 다른 자객이 특히 문제였다.
로비의 사람들이 대응할라치면, 때마다 새까만 흑선이 날아들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본 적 있는, 칠흑의 화살이다.
출입문은 하나요.
뒤늦게 소란을 듣고 그곳으로 뛰어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흑색의 비에 그대로 꿰뚫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복면인과 내 눈앞의 여인은 아직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으니.
“컥!”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의 비명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문자 그대로, 무차별적인 학살이었다.
해방군이든 다른 무엇이든, 마치 뒷일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가만.’
달리 생각하면, 이 또한 기회가 아닐까?
내부의 소란은 이제 외부에서도 확실하게 감지했다.
이 모든 상황들이 실시간으로 군영 전체로 전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위기에 빠진 전(前) 사령관을 구해내고.
세디스의 은원 관계도 청산하고.
거기에 더하여, 추후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 분명한 적의 전력까지 깎아낸다.
이거, 잘만 하면…
“…읏!”
“……!”
순간, 실비아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뒤에서 보조를 도맡던 그녀가 가장 거슬린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시점부터 암살자들은 집요하게 실비아만을 노렸다.
기실, 인버스 공작 쪽 사람들보다 우리 쪽이 잘 버티고 있던 것도 모두 그녀 덕분이었다.
한데, 그조차 이제는 한계에 봉착한 듯하니.
지금부터는 내가…
“경고하는데, 함부로 움직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 잘생긴 얼굴에 생채기가 나기 싫다면 말이야.”
“…잊으셨나 본데, 아카데미 때도 그쪽한테만큼은 자신 있었거든요. 왜인지 제일 약해 보여서 말이에요.”
“흐응~ 미안하지만 그때의 내가 아니라서. 정이 시험해 보고 싶으시다면야…….”
“늙은 생강이 맵다, 뭐 그런 건가요?”
“…….”
직후, 레이지의 얼굴이 사악하고 굳었다.
“너,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지껄이면 입을 찢어 버린다?”
이내 내 입가로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혀졌다.
“해보시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