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지휘권 확보(3)
“기가 막힌다, 진짜.”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만 보던 실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만? 나는 코도 막힌다.”
유리나는 두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과장되게 제 코를 집어 누르기까지 했다.
“뭐 저런 아티팩트가 다 있다냐?”
“직접 보는 건 나도 처음이야. 개발자가 마탑이니까, 이해 못할 물건은 또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무슨 뜻이여?”
“이제 우리 해방군에도 그 분야 최고의 권위자가 합류했으니까.”
“에엥?”
유리나가 전혀 몰랐다는 듯 동그랗게 토끼 눈을 떴다.
“그게 누군데?”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모르니까 묻지. 문명을 한 단계 진보시킨 통신용 수정구를 만든 건 조합의 마탑주 간다르 테이들러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데, 설마 그 사람은 아닐 테고.”
“하? 이리 상식이 부족한 애한테 대체 내가 왜 이론에서 밀렸던 거지?”
“뭐냐, 갑자기 시비 거는 거냐?”
쯔쯔, 혀를 차는 실비아에게 유리나가 주먹 감자를 들이밀었다.
그 와중에도 상황은 무척이나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서 약을 파느냐? 그딴 아티팩트, 나는 들어본 적도 없다! 혹, 네놈이 조작해 낸 물건은 아니겠지?”
“그리 반응하실 줄 진즉 예상했지요. 하면, 이건 어떻습니까? 본인의 능력을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이 보는 앞에서 증명해 보이시는 겁니다.”
“뭐라…?”
“기억 저장구가 조작이든 아니든, 해방군의 ‘연전연패’라는 결과는 명백한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 총책임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인버스 공작님이시구요. 설마 이 부분까지 부정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거야 전력의 차가 워낙 어마어마했으니,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어도…….”
“아뇨? 적어도 저라면 달랐을 겁니다. 능력은 있으나 자격은 갖추지 못한 제 신분에 통탄을 금할 길이 없을 뿐이네요.”
“……!”
언변이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구경하던 유리나가 툭 말을 내뱉는다.
“저것도 재능 아니냐? 사람 복장 뒤집어놓는 거.”
“…달변가는 제법 많이 봐왔다고 자부하는데, 나도 저런 유형은 처음 보네.”
“진짜 끝이 궁금해진다. 과연 저 자존심 강한 인버스 공작이 어떻게 반응할지. 그런 인물을, 쟤는 또 어떻게 요리할지.”
유리나가 기대한 광경은 금세 눈앞에서 펼쳐졌다.
“참으로 웃기는구나. 네놈 따위가 감히…….”
입으로 그리 말을 하면서도 인버스 공작의 시선은 연신 주변을 훑고 있었다.
윽박만 질러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인정하기는 싫지만, 녀석의 말대로 민심은 완전히 돌아선 듯했다.
그런 거라면,
“…좋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능력을 증명해 보일까?”
“지휘관은 전세를 읽는 통찰력과 시시때때로 변하는 전장에 대응할 직관력. 둘 모두가 필요하죠.”
“요점만 간단히 말해라.”
“이런 상황에서 아군끼리 치고받고 전투를 벌일 수는 없고, 모의로나마 그걸 가늠해 볼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냐고 지금 묻고 있지 않느냐?”
직후, 세타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의외의 제안을 했다.
“가볍게 체스나 한 판 두시죠. 지는 쪽이 깔끔하게 지휘권을 양도하는 쪽으로.”
“…체스? 나랑 말이냐?”
“네. 자신 없으신가요?”
“…….”
인버스 공작이 속으로 고소를 터뜨렸다.
아무래도 녀석은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듯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 체스라면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대략적이나마 가늠할 수 있지. 거기에는 달리 이견이 없다만, 내가 지면 네놈 같은 근본도 모르는 평민 따위에게 지휘권을 양도하라는 뜻이냐? 나는 몰라도, 다른 귀족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누가 저한테 달래요?”
“……?”
“이쪽의 지휘관은, 공작님의 직계 핏줄인 크리스 경이 될 겁니다. 이러면 걱정하시는 일도 벌어지지 않겠죠?”
“……!”
한 걸음 물러서 있던 크리스가 화들짝 놀랐다.
기실 그는 폐하께 직접 재능을 인정받아 내전 이전에 이미 자작에 준하는 가작위를 부여받은 상태였다.
혹여나 공작가를 물려받지 못하더라도, 언제든 독립할 수 있도록.
허나, 이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너, 갑자기 그게 무슨…?”
“내심 생각하고 계셨잖아요. 나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요.”
“…….”
“걱정하지 마요. 나랑 실비아가 옆에서 열심히 도와드릴 테니까.”
하는 양을 지켜보던 인버스 공작이 으득 이를 갈았다.
“크리스, 네놈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애써 화를 삭인 그가 뒷말을 삼켰다.
징벌은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눈앞의 상황부터.
크리스의 자격을 부정하자니, 가문의 정통성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격이었으니.
이리되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좋다. 네 장단에 놀아나 주마.”
어차피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무릇 지휘관이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여 적을 제압하는 것을 최고의 전략으로 삼는다.
하물며 아예 피를 흘리지 않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면, 더 거론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 참. 그리고…….”
“……?”
“그냥 ‘지휘권을 건네주겠다’ 같은 말 한마디로는 무게감이 떨어지니, 진 쪽이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개처럼 짖는 것으로 마무리 짓죠.”
“……!”
“그러면, 쪽팔려서라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명을 내리겠어요? 명색이 귀족인데.”
“…….”
뻔히 보이는 도발이다.
한데, 왜인지 인버스 공작은 감정이 격동하는 것을 느꼈다.
하여,
결국 그는 그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고 말았다.
“…개처럼 짖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개가 되는 것으로 하지. 주인이 물라면 물고, 핥으라면 핥는 그런 개새끼 말이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인데요?”
***
제국이 위치한 북부와 마찬가지로 중부에 자리한 이곳 테라에도, 물기 섞인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겨울이 찾아오고 있음이다.
마침내 새하얀 눈발이 온천지를 뒤덮고, 강물마저 얼어붙는 그 날에는…
이 나라도 완전히 피로 물들게 되겠지.
“저기야?”
순간, 털이 달린 외투로 온몸을 꽁꽁 싸맨 레이지가 저 먼 곳을 가리켰다.
도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이 유독 인상적인 영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확실하다.”
“이게 웬 고생이람. 추운 날에는 이불 속에 콕 틀어박혀서 온종일 잠이나 자는 게 제일인데.”
말을 할 때마다 레이지의 입가로 새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써드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잤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중간 중간에 네가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있던 시간만 빼도, 우리는 임무를 끝내고 진즉 돌아가고 있었을 거다.”
“잠이 몰려오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말해야 또 내 입만 아프겠군. 여기서 확실하게 못 박지. 지금부터는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목표물을 죽일 거다.”
“누가 뭐래? 죽여, 다 죽여도 좋아.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일이니까.”
“그냥,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서. 특히 스노비 2황자의 변덕이야, 누구나 알아주는 것이니까.”
“우리 황자 전하? 그것도 맞지. 근데, 이번에는 걱정 안 해도 돼. 황자 전하가 뒤늦게 뜯어말려도,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일 생각이거든.”
‘그게 대공을 위한 일이니까…’ 하는 뒷말은 애써 삼킨 레이지가 이내 목표물을 떠올렸다.
세타 쿤 이그니스.
첫 만남부터 묘한 느낌을 주는 녀석이었다.
그녀의 일을 실패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서큐버와 럼프의 목숨까지 앗아간 핏덩이.
한데 이제는 불안정한 대공의 감정마저 시시때때로 뒤흔들고 있었다.
그런 대공을 위해서라도,
“자 그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황천길로 보내 드릴까?”
드물게, 평상시 게으르기 그지없는 그녀의 움직임에 생기가 감돌았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레이지는 진심으로 대공을 사랑하고 있었다.
***
다른 모든 사람들을 남겨두고 나와 인버스 공작을 포함한 몇몇 지휘부들만 성 내부로 들어섰다.
곧 일 층 로비에 금세 기다란 테이블 하나가 놓였다.
가상의 수 싸움을 위한 준비물이었다.
체스(Chess).
자신의 말을 이용해 상대의 왕을 잡아야 승리하는 게임이자, 지극히 귀족적인 놀음.
눈이 64개인 흑색의 판 위, 각기 16개의 말로 가상의 전투를 벌인다.
한때 체스는 어마어마한 유행세를 탔었다.
비교적 최근인 제국이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을 벌이기 전, 대륙 평화기에 말이다.
소위 실전 경험에 굶주린 참모들이, 이 체스로나마 뇌 주름에 기름칠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라의 체스 최강자는 오래전부터 양대 산맥이었다.
하나는 제노스의 부친이자 반란군의 수괴인 카이클 공작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내 눈앞에 있는 인버스 공작.
하면, 귀족도 아닌 나는 어떻게 체스를 둘 수 있을까?
이런 유행세 탓에 체스는 아카데미 시절에도 이미 필수 교양과목이었으니까.
선공인 흑(黑)은 나.
후공인 백(白)은 인버스 공작이다.
그는 당연하다는 양, 하수에게 선공을 양보한다는 말 따위를 지껄여 댔으나,
덥썩!
그 진짜 의도를, 나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봐온 인버스 공작의 기본 성향 자체가 반드시 적의 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대응하는 전략을 취했으니까.
하여, 나는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우선은 퀸부터.
탁!
“……!”
인버스 공작이 대번에 움찔 몸을 떨었다.
행동반경이 넓은 퀸은 그 활용도가 무궁무진했다.
대게 실력 차가 상당한 고수가 하수를 상대할 때는, 처음부터 퀸을 빼주고 대국을 벌이고는 하는데.
그것만으로 한두 수가 아니라 네 수, 다섯 수를 접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퀸의 생존 여부는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치곤 했다.
“…아직 어린다는 건가?”
피식 웃음을 터뜨린 인버스 공작이 정석대로 폰부터 움직였다.
지휘관은 최대한 뒤로 물리고 졸부터 움직이는 안전지향적인 전략.
허나, 필연적으로 가장 먼저 졸부터 잃게 되는 비정한 한 수.
나는 지금부터 그 근간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생각이다.
탁, 탁, 탁, 탁, 탁!
내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탁, 탁, 탁!
그 속도에 맞춰 인버스 공작도 비교적 빠르게 수를 뒀다.
고작 나 따위에게 고민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테니까.
그 성격까지 파악하고 나는 속도감 있게 게임을 이어갔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진영은 극과 극이 되었다.
8개의 폰들이 우르르 전방으로 포진해 있는 백과 달리.
흑인 나는 폰의 전진은 최소화하고, 작전 사령관인 퀸.
마법사인 비숍.
기사인 나이트와 룩을 공격적으로 배치했다.
상대는 최대한 고급 인력들을 살리는 수를 펼쳤지만.
나는 비숍이나 나이트를 내어 주는 한이 있더라도 폰을 두 개, 세 개씩 잡아냈다.
“멍청한 놈…….”
어느덧 인버스 공작의 입가에 명백한 조소가 떠올랐다.
잠시 그 심리를 읽어내자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생각할 테지.
졸 따위가 아무리 많아봐야 졸은 졸일 뿐이다.
결국,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기사나 마법사 같은 고급 전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버스 공작은 사령관으로서 실격이다.
탁!
“크하하하하하하!”
마침내 백의 나이트가 흑의 퀸마저 잡아냈다.
직후, 인버스 공작은 참지 못하고 광소를 터뜨렸다.
실제 전투에서 사령관이 잡히게 되면, 전쟁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건 진짜 전쟁이 아니라 체스이며.
나는 실제 상황에서도 이런 모습이 되기를 바랐다.
설령 사령관이 싸우다 죽더라도, 좌절이 아니라 그것을 각성제 삼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그런 군을 만들고 싶었다.
탁!
그때부터 나는 폰을 전진시켰다.
“마지막 발악이냐? 크크크크.”
허나, 인버스 공작의 웃음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어, 어떻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방금 비숍을 움직이는 순간, 전체적인 그림이 확연히 시야로 들어왔겠지.
아직 여덟 개 모두가 살아 있는 내 폰들이, 완벽하게 킹을 옥죄여 가고 있는 광경을.
그때부터 인버스 공작은 부랴부랴 킹을 지키기 위해 말들을 뒤로 물렸지만.
늦었다.
이미 어떤 경로로도 킹이 빠져나올 수 없는 완벽한 수렁에 빠졌다.
전후좌우.
어디로, 어떤 말을 움직이든 사로(死路)요.
다른 말들로 활로를 개척하려 해도,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그때부터 내 입이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인버스 공작님은 소규모 국지전에서는 뛰어난 전술 능력을 보이시나, 통솔해야 하는 머릿수가 많아지면 수가 난잡해지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탁!
“소위 말하는, 큰 싸움에 약한 부류시지요. 나무는 무척이나 잘 보시지만, 숲 전체를 바라보는 능력은 부족하다고나 할까요?”
탁!
“일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라면 모를까, 일국을 지배하는 왕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한 자질입니다. 당장 이 체스판만 봐도…….”
“그 입 좀!”
쾅!
순간, 인버스 공작이 테이블을 후려쳤다.
와르르, 체스 말들이 몇 개나 쓰러졌다.
파르르르.
인버스 공작의 꽉 쥔 주먹이 하염없이 떨려댔다.
굴욕일 것이다.
인생에 다시없을 치욕이자 흑역사일 것이다.
그 입은 연신 ‘감히, 감히, 감히’ 따위를 중얼거리고 있다.
허나, 내 손짓에 자비 따위는 없었다.
탁!
쓰러진 말들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폰(Pawn)이 체스판을 때리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나는,
“체크 메이트(checkmate).”
비정할 정도로 상대의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