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38화 (138/251)

138화. 선박 위의 적장(2)

협상단은 금세 꾸려졌다.

함께할 이들을 뽑는 일은 쉬웠다.

애당초 처음부터 답은 나와 있었다.

바다 위에서 뒤통수라도 맞는다고 생각하면 절로 골치가 아파졌으니까.

하여, 백 퍼센트 믿을 만한 이들만으로 인원을 구성했다.

그 수가 대략 일백.

포로가 된 인버스 공작 쪽 사람들과 목격자로 참석시킬 나머지 귀족들을 모두 포함하면, 도합 이백에 이르는 대인원이었다.

계획은 완벽하다.

다만, 이걸 곧이곧대로 따를 자칭 높으신 분들이 아니었지만.

“당장 이 줄을 풀지 못하겠느냐!? 내가 직접 공작 각하께 결백을 증명하겠다. 하니, 이 이상의 무례를 범하지 마라!”

“알았으니까, 일단 저희랑 어딜 좀 같이 가시죠. 그 이후에 풀어 드리든 말든 결정할 테니까요.”

“뭐? 대체 어디로 가자는 것이냐?”

“그거야 가보시면 알겠죠?”

내 반문에 안드라 후작이 으득 이를 갈았다.

당장 욕이라도 내뱉고 싶지만 애써 화를 삭이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기야 여기서 발광을 해봐야 내가 씨알도 안 먹힐 상대라는 것은 이제 확실히 알았을 테니.

“대관절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게냐? 너는 인버스 공작님의 명을 받고 이곳으로 왔다 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크리스와 함께!”

“그런데요?”

“하면, 우리가 공작 각하를 배신할 리가 없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열 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사람 마음속은 모르는 법이라잖아요. 분명한 건, 여러분 중에 분명히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마 공작 각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일을 시키셨겠어요?”

“다른 귀족들은? 배신이라면 오히려 그들이 가능성이 더 크지 않느냐? 론지에 후작의 사후, 그들만큼 공작 각하에게 대립각을 세워온 이들은 없었다!”

물론 이에 대한 변명 또한 준비해 뒀다.

나는 곧장 손가락을 들어 까딱거렸다.

“아니죠. 공작님이 국경지대로 향한다는 정보는 극비였잖아요? 그걸 인지하고 있던 사람들은, 공작 각하 쪽 귀족 분들. 그중에서도 소수의 최측근이라 들었어요. 동의하시나요?”

“그, 그건…!”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달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서, 공작 각하의 심정은 지금 어떠시겠어요?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이 아닐까요? 그토록 신뢰했던 부하들이었는데.”

“…….”

이어지는 내 말에, 그제야 안드라 후작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곧이어 자못 서슬 퍼런 기세로 주변을 훑어보기까지 한다.

물론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다.

“…솔직히들 말씀해 보시오. 대체 어느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작자가 정보를 흘린 건지. 조금이라도 본 게 있다면 얘기라도 해보란 말이오.”

눈치만 살피던 귀족들이 대번에 목청을 높였다.

“헤저드 백작. 가만 생각해 보니, 그대는 입버릇처럼 후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 않소?”

“뭐, 뭐요!? 그건 지금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가 아니오?”

“그저, 웬 개새끼가 권력에 눈이 멀어 동지들을 팔아먹은 거라 생각을 하니… 뒤늦게 의심이 되어서 말이오. 여우같은 카이클 공작은 분명 그럴듯한 자리까지 약속했을 테지요?”

“아라드 백작! 말이면 단 줄 아시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하루라도 일찍 투항했어야 하느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여 댔지 않았소?”

“어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이래서 두 발로 걷는 생물들은 믿는 게 아니라고 하나 봅니다.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비단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입만 다물고 있을 뿐, 그들 모두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검을 겨누었다.

딱 내가 원하던 상황이다.

“자, 자. 이 문제는 제가 따로 생각해 뒀으니, 여러분끼리 이리 싸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

순간, 귀족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방금 그 말. 무슨 뜻인가?”

“의문이 있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니까요. 일주일 뒤에, 저는 적의 수괴를 직접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저, 적의 수괴…? 설마 카이클 공작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눈을 크게 뜨는 안드라 후작을 향해 내가 싱긋 미소 지었다.

“왜 아니겠습니까? 카이클 공작은 자기 사람들을 끔찍이 챙기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지, 진짜라고…? 이런 미친…!”

“기실, 이건 카이클 공작의 요청사항이기도 합니다. 충성스러운 부하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수만 군의 희생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물. 적장이지만 그런 부분만큼은 존경할 만하지요.”

안드라 후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가 간자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말인가?”

“네. 범은 범이라는 거겠지요. 저는 그 한 명으로 우리 측의 포로들을 돌려받을 생각입니다. 배신자도 처리하고, 아군도 구하고. 손해 보는 장사는 전혀 아니니까요.”

“……!”

귀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나는 유심히 살폈다.

그리곤 마침내 쐐기를 박는다.

“숨어 계신 배신자 분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겠군요. 이걸로 목숨은 건지실 테니까요.”

***

자정 무렵.

밤은 깊어만 갔다.

귀족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기에, 광장에는 적당히 천막을 설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걸 크리스는 휘하 기사들에게 곧장 지시했고.

다만, 그 과정에서 머릿속의 계획들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야 했다.

“…진심으로 그리 일을 진행하겠다고?”

“네. 이미 카이클 공작님과도 협의가 된 사항입니다.”

“공작님께서도 포로 교환에 응하셨다는 뜻인가?”

“물론이지요. 손뼉도 짝이 있어야 소리가 나는 법이니까요.”

“…….”

입을 다문 크리스는 한참이나 내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먼젓번에 경고했듯, 역풍이 불 가능성이 크다. 남 좋은 일만 다 시키는 수가 있어.”

순간, 내 두 눈 사이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남’이라…….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결국, 크리스도 카이클 공작을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한다는 뜻이렷다?

“…하니, 아군에게는 크리스 경이 잘 설명해 주세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배신자는 절대로 잡아낼 수 없다고요.”

“취지는 알아듣겠지. 허나, 마음은 정반대일 것이다. 애당초 적장은 부하 하나를 위해 이만한 위험을 감수하는데, 우리는 간자 하나를 잡자고 다른 귀족들까지 모조리 불구덩이에 밀어 넣는 셈이니까.”

그 말대로다.

오히려 애써 데려간 다른 귀족들마저 카이클 공작에게 탄복할지도 모른다.

이게 단순한 포로 교환이라면 말이다.

“…문득 든 생각인데요.”

“……?”

“차라리 크리스 경이 인버스 공작님의 자리를 대신했다면, 해방군이 이렇게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리지는 않았겠죠?”

“갑자기 그게 무슨…?”

“간밤의 일들을 겪고 나니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지금 해방군은 깨지기 직전의 유리라는 사실을. 제 턱밑에 칼이 들이밀어지자, 대번에 저들끼리 의심해대는 모습. 크리스 경도 보셨잖아요?”

“그건…….”

“제 상관과 동료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에요, 그건.”

“…….”

그제야 크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얼굴 위의 불안한 기색은 여전했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성자(聖者)도 아니고, 저도 악역만 자처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요.”

나는 확신했다.

만약 계획한 일들만 무사히 마치게 된다면.

최초 연극의 시작은 악당이나, 끝은 영웅으로 막을 내릴 것이라고.

***

약속한 날의 아침이 밝았다.

내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되어 갔다.

꼭두새벽부터 줄줄이 포박된 귀족들을 레이브 강 앞으로 몰았다.

얼굴에는 하나같이 과일이나 담을 법한 보자기를 덮어씌운 채로.

높으신 분들이 대번에 반발했지만, 그 정도는 가볍게 무시했다.

“배는 준비됐습니까?”

“…그래. 아마 이백 명은 거뜬히 승선할 수 있을 거다. 한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문제요?”

내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지금 막 아버지가 국경지대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것도 일천의 병력과 함께.”

“…일천이면 국경 수비에도 구멍이 생길 텐데?”

“그곳보단 이쪽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하여튼 마음에 안 든다니깐.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빨라가지고.”

“인정한다. 그 눈치 하나로 공작의 자리까지 오르신 분이니까.”

“뭐, 충분히 예상했던 바이기는 하지만요.”

크리스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세디스가 천천히 다가서고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풀 무장까지 갖춘 채로.

“세타. 이쪽도 준비 다 끝났어.”

“그래. 근데 진짜 같이 안 가줘도 되는데. 인원은 우리만으로도 충분하거든.”

“내가 돕고 싶어서 그래. 너한테는 항상 도움만 받았으니까.”

세디스의 대답에, 내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시다면야.”

“그리고…….”

“……?”

잠시 크리스의 눈치를 살피던 녀석이 내게 바짝 다가붙었다.

“추락하는 달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너도 알고 있겠지?”

“대륙 제일의 암살 집단이라는 명성에 금이 갔는데, 당연히 그러시겠지.”

“이제 어쩔 생각이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어?”

“네 생각부터 듣고 싶어서. 그냥 솔직하게 말해 봐. 가령, 복수라던가.”

“…….”

내 물음에 세디스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래, 복수하고 싶어.”

“…….”

“비단 내 개인적인 원한 때문만은 아니야. 다시는 나 같은, 죽은 내 친구들 같은 제2, 제3의 피해자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딴 조직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래?”

“하지만, 그들은 강해. 나는 알고 있어. 그들이 작정하고 기습해 오면, 스승님들이나 너마저도 큰 상처를 입고 말 거야. 자칫 목숨마저 위태로워질 정도로… 나는 그게 너무 무서워.”

부르르르.

말을 잇는 세디스의 전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몸이 기억하는 본능적인 공포겠지.

그런 녀석에게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세디스.”

“…….”

“걱정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

“뭐가 걱정이야? 주인공이 바로 네 옆에 있는데.”

“주인공…?”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고, 내 연극의 주인공은 당연히 나잖냐. 복수를 하겠다면 내가 도와줄게. 한번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보라고.”

“…미친놈.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말을 마친 내가 세디스의 어깨에 척하니 팔을 걸쳤다.

“혹시 알아? 스승님들에 나까지 힘을 합치면, 그 추락하는 달조차 아무것도 아닐지도.”

***

해가 중천에 떠오른 정오.

영지 전체를 둘러싼 레이브 강 위.

두 개의 커다란 배가 서로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배는 대략 오십여 미터를 남겨두고 멈춰 섰다.

머지않아 한 인영이 내 시야로 들어왔다.

저쪽의 뱃머리에, 금발의 미중년이 오롯이 서 있다.

“외모도 유전이었네.”

당장에 호크아이를 시전해 시각에 집중한 내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제노스의 부친인 카이클 공작이 분명했다.

직후, 나는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거리는 이만하면 됐겠다, 포로들은 그쪽에서 먼저 보내주시지요. 그 정도 배려는 해주실 수 있겠지요? 저희는 약자니까요.”

“…….”

“신원이 확인되는 대로, 이쪽도 협상에 응하겠습니다!”

카이클 공작은 행동으로 대신 답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형 배 수십 척이 두둥실 띄워졌으니까.

배의 크기가 범상치 않다더니, 모두 저것들을 싣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곧 배들은 빠르게 이쪽으로 접근했다.

- 이제 그쪽도 포로들을 보내도록.

“……!”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웅혼한 마나에 몇몇 귀족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카이클 공작은 스스로도 6써클의 경지에 들어선 고위 마법사였다.

저 자신감은 비단 권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윽고 바로 코앞까지 접근한 배들을 일별하며,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나는 당당하게 외쳤다.

“뭣…!?”

곁에 선 크리스가 대번에 반응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생각해 보니, 저도 크리스 경이 말씀하신 역풍이 우려되어서요.”

“그런 거라면 처음부터 요구에 응하지 말았어야지! 이건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알았으니까, 저를 믿고 일단은 지켜보세요.”

“아니! 이 이상 네 행동을 좌시하지 않겠다! 나는 귀족으로서의 긍지까지 내다 버리지는 않았으니까!”

크리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 말대로, 곧장 써클을 운용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허나…

“무언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뭐?”

“카이클 공작님 정도 되는 닳고 닳은 인물이, 크리스 경 하나만 믿고 일을 벌여왔다는 부분이요.”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크리스 경 말고도 포로 중에 진짜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에요. 물론, 그 존재는 경도 몰랐겠지만요.”

“……!”

그제야 크리스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럴 리가… 카이클 공작님이 나를 믿지 못하셨다는 건가?”

“그야 당연하지 않을까요? 반란군의 입장에서 크리스 경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적장의 핏줄이잖아요?”

“…….”

나는 줄곧 기묘한 이질감을 느껴왔다.

저 정도 되는 인물이, 나와 크리스가 손을 잡은 것을 너무 순순히 믿었으니까.

의심할 정황은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예로, 반란군은 근래에 경계심이 상당히 올라간 상태였다.

마탑주를 포함한 외부인들이 이쪽에 합류했고.

완벽하다 생각했던 기습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분위기가 이럴진대, 실낱같은 승세를 잡은 적은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었다.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만약 내가 진짜 크리스와 손을 잡았다고 가정하면, 국경지대에서는 반란군을 구태여 왜 막았을까?

그대로 사령관인 인버스 공작을 사로잡았으면, 게임은 끝이었는데.

의심은 의심을 낳고, 의문은 의문을 낳는다.

그럼에도 카이클 공작은 순순히 내 요구에 응했다.

다시 말해,

이 모든 상황들을 그대로 전달하는 또 다른 간자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카이클 공작님! 이쯤에서 배신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시죠?”

- …약속을 지키지 않을 생각이냐?

“에이, 그건 아니죠.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공작님을 상대로 먹튀를 하겠습니까? 다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곁에 선 기사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왜…?”

당황하는 기사에게, 나는 행동으로 대신 답했다.

스르릉.

섬뜩한 쇳소리와 함께 이내 그의 검이 내 손에 쥐어졌으니까.

“어차피 개혁을 꿈꾸기로 한 것. 말씀해 주시지 않겠다면, 그냥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베어버리겠습니다. 협상 중에 살려서 보낸다는 내용은 없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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