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역공(3)
지금 내 앞으로,
“이놈! 이노오오오옴!”
일단의 무리가 마치 잘 엮인 물고기처럼 한쪽으로 연행되고 있었다.
참고로, 방금의 목소리는 안드라 후작의 것이었다.
속에서부터 묘한 쾌감이 치밀어 올랐다.
고작 평민인 내 한마디에, 귀족들의 모가지가 댕겅댕겅.
“너, 다 알고 일을 이 지경까지 벌인 거지?”
그때, 슬며시 옆으로 다가선 실비아가 속삭였다.
“무슨 뜻?”
“안드라 후작은 꽤나 오래전부터 네 은사인 학장님과는 적이었으니까.”
“적? 정치적 정적(政敵), 뭐 그런 걸 얘기하는 건가?”
“그래. 서로 생각하는 가치관조차 완전히 극과 극이었지.”
이건 몰랐던 사실이다.
아카데미 시절에, 스네이크의 아버지인 아이작 후작이 학장 할아버지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하물며 그 아이작 후작가의 사돈 되는 사람이, 저기 끌려가는 안드라 후작이거든.”
“아하.”
진즉 그렇게 얘기할 것이지.
실비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번 일로 사사로운 복수까지 한 셈이었다.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도 잡는 격이 아니겠는가?
“기뻐 보이네?”
“뭐, 그럴 수밖에. 일이 이렇게 잘 풀려준 덕분에 세 가지 이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썩은 살을 도려내고, 개인적인 복수까지 한 것. 두 가지는 알겠는데, 나머지 하나는?”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시지. 똑똑하잖아?”
나는 손가락을 들어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직후, 실비아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활약 조금 했다고 지금 유세 부리는 건가?”
“내가 그럴 성격으로 보여?”
“이런 태도라면, 나한테도 생각이 있어. 우리 가문이 루나네처럼 다 무너져 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빨이 빠져도 호랑이는 호랑이라는 것을…….”
“그런 거 아니고, 지금 해방군의 작전 참모는 내가 아니라 너잖아.”
“……!”
순간 실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유세 부리는 것 아니고. 잘난 척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나한테만 의지하지 말고 네 감각을, 네 능력을 한번 믿어보라는 뜻이야. 너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너…….”
“나 같은 낙제생과는 달리, 너는 아카데미 최고의 수재였던 실비아 스필 세드릭이잖아?”
“…….”
그제야 실비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묘한 눈빛으로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바라봤다.
“…뭐야, 여자 마음도 제법 움직일 줄 알잖아?”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 혹시 반한 건 아니지?”
“미친놈.”
“큭… 그래. 그래야 내가 아는 실비아 스필 세드릭이지.”
픽, 하고 실소를 터뜨린 나는 이내 상대에게서 멀어져 갔다.
아니, 가려고 했다.
“거기 멈춰. 일을 벌였으면 계획 정도는 얘기해 주고 가. 귀족들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데? 당장 인버스 공작이 노발대발 이곳까지 뛰어올지도 모르는 판국에.”
“물론 그럴 수 있지. 제 손발이 잘리셨으니까.”
“그래서, 대답은?”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대기. 그 계획을 논하기 전에, 아까 말한 세 번째 이점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거든.”
***
레이브 성의 동문은 꽤나 거대했다.
그 기나긴 성벽을 따라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고, 이윽고 올빼미 울음소리만이 고요하게 내리깔릴 무렵,
우우웅!
그 즉시 나는 통신용 수정구로 연락을 취했다.
- …세타?
“스승님.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네요.”
- 이제 고작 9시인데 잠이 오겠냐?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데, 혹 스승님도 그러신 건 아니고요?”
- 네 스승 할망구라고 놀리는 거냐, 지금?
“물론 아니죠. 제가 죽으려고 고사를 지낼 것도 아니고. 아무튼, 불초 제자는 지금 막 레이브 영주 성을 점령한 상황입니다.”
- ……!
찰나, 세논 스승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 우리 편 영지에 입성이면 입성이지, 점령은 또 뭐냐?
“아직은 우리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 …너, 혹시라도 위험한 생각을 하는 거면 관둬라. 이곳에 온 이후부터 너무 나대고 있잖아. 핏덩이 주제에.
세논 스승님이 짐짓 험악한 기세를 내뿜으셨다.
허나, 나는 안다.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계셨지만, 그 진짜 속내는 제자를 걱정하는 스승의 마음임을.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옛날, 어떤 기사는 전투 중 자기 눈알에 화살이 박히고도 꿋꿋하게 전장으로 나섰다죠? 제 눈알을 으적으적 씹어 먹으면서요.”
- 갑자기 뭔 헛소리냐?
“기가 질린 적군은 결국 후퇴했고, 아군마저 그 용맹스러움에 없던 존경심마저 드러냈다… 라고 하는 이야기였는데, 제가 엄청나게 감탄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물론, 실화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어느새 수정구 속 스승님은 진지한 눈빛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걸 제가 흉내라도 한번 내볼까 합니다.”
- 흉내라고…? 방금 그 애꾸눈 기사 얘기 말이냐?
“네.”
- 빌어먹을 놈. 결국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듣겠다는 뜻이구만.
내 입가로 멋쩍은 미소가 지어졌다.
“걱정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더하여 표현을 조금 이상하게 했지만, 제 경우에는 눈알이 아니라 우리 해방군의 썩은 윗선을 씹어 먹을 계획이거든요.”
- 걱정은 지랄.
내 부연 설명에도 스승님은 척하니 중지를 추켜올리실 뿐이었다.
- 말이라고는 지독하게도 안 들어먹는 제자 놈은, 이거나 처먹어라.
***
한편, 포박한 귀족들을 한데 모아둔 영주 성의 광장.
“크리스 경.”
멈칫.
골똘히 상념에 빠져 있던 크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 앞에서, 흑발의 미녀가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저 외모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실제로 같은 나이이기도 한 그녀에게, 크리스는 알게 모르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루나 틴 론지에.”
“잠시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
가만히 루나를 올려다보던 크리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감사합니다.”
가볍게 목례한 루나가 곁에 착석했다.
자리라고 해봐야 기껏 바닥에 퍼질러 앉는 것이 전부였지만.
순간적으로 코끝을 찌르는 향기로운 내음에 크리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내게 달리 할 말이라도 있나?”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훗.”
역시 솔직한 여인이었다.
어디 돌려 말하면 당장 죽기라도 하는 건지.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그녀는 크리스가 봐온 그 어떤 사람보다 꽉 막힌 기사였다.
“무엇이 궁금하지?”
“그냥… 크리스 경의 진심을 알고 싶습니다.”
“…진심?”
순간, 크리스는 묘하게 심장이 떨려옴을 느꼈다.
진심.
그 한 단어로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이나 요동칠 수 있는 것이었던가?
“미워도 아버지시지 않습니까, 인버스 공작님은.”
“…….”
아아, 그 얘기였군.
대체 무슨 기대를 했던 건지.
픽, 하고 실소를 터뜨린 크리스가 그제야 상대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새까만 두 흑안(黑眼)은 고즈넉이 반짝이고 있었다.
“…얼굴까지 더럽게 예뻐선.”
“네?”
“아니. 혼잣말이다. 아마도 너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겠지. 누구보다 소중했던 아버지를 잃은 너라면 말이다.”
“…….”
“혼란스러운가? 분명 내 아버지는 무리한 전술로 론지에 후작님을 사지로 내몰았다. 허나, 그 일로 물을 먹이자니 이번에는 직접적인 원수인 반란군에게 도움을 주는 격이니…….”
루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응?”
“아버지의 선택이셨습니다. 본인의 의지로, 가문의 최선두에서 식솔들을 지키다 돌아가신 겁니다. 하니,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행동 자체가, 저 스스로 당신의 죽음을 욕보이는 일이라 생각하니까요.”
“…….”
“저는 다만, 이 이상 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
소중한 사람.
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크리스의 심장에 꽂혔다.
“크리스 경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까?”
“…있다.”
순간적으로 크리스는 ‘그건 바로 너…’ 따위의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기실,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이 깊어진 것은 과거의 한 사건 때문이었다.
3년 전 아카데미를 방문했던 그날, 크리스는 루나에게 구명(求命)의 은혜를 입었다.
일찍이 정신을 잃은 자신을 대신해 루나는 그 무시무시한 칠악과 전투를 벌였으니까.
허나, 크리스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정확히는 ‘있었다’라는 표현이 정확하겠군. 내게는 어머니가 그런 존재였으니까.”
“아…….”
“지금은… 한 명 더 있다.”
“그게 누구죠?”
루나의 눈빛이 재차 초롱거렸다.
물론 이번에도 크리스는 참았다.
“…바이커다.”
“그렇군요.”
“녀석은 내 어머니를 마치 친모처럼 따랐다. 옛적에 어미를 여위었으니 충분히 그런 감정도 느낄 만했지.”
“…….”
“그런 바이커를, 어머니께서는 나와 똑같이 대해주셨다. 마치 친자식처럼 사랑으로 보살펴 주셨지. 녀석이 5살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무척이나 사이가 돈독한 형제였다.”
조용히 경청하는 루나를 일별하며 크리스가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고깝게 봤다. 가문의 후계 자리는 단 하나이니까. 가신들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고심 끝에 한쪽을 택했는데, 형제를 배려해 다른 한쪽이 양보니 어쩌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으니까.”
“…….”
“그때부터 가신들의 이간질이 시작되었다. 소위 말하는 권력 암투였지. 정작 코흘리개인 당사자들은 떡밥에 관심도 없는데 말이야.”
“…….”
“하여, 나는 의도적으로 바이커를 멀리했다. 우리가 가깝게 지낼수록 가신들의 이간질은 더욱 심해질 테니까.”
“…….”
“그럼에도 내 어머니는 여전히 바이커를 친자식처럼 대해주셨다.”
이윽고 말을 마친 크리스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건 핑계였다.”
“…….”
“사실은 은연중 자리에 욕심이 있었던 거다. 그게 없었다면, 내 어머니처럼 나도 바이커를 똑같이 대했겠지.”
“…….”
“어머니를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리보다 소중한 것은 사람임을.”
직후, 크리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나도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 주변 환경 때문이니 뭐니, 핑계도 대고 싶지 않다. 그런 썩어빠진 환경이라면, 이제는 이 손으로 직접 쳐부수어 버릴 생각이다.”
“예. 저도 동의합니다.”
루나가 뒤따라 신형을 곧추세웠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한 가지, 크리스 경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 네가?”
“네. 원망이 아예 없다던 말… 실은 사실이 아니거든요.”
“…그야 사람이니까. 이해한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분명히 알게 된 사실도 있습니다.”
“그게 뭐지?”
루나가 한 점 흔들림이 없는 눈빛으로 답했다.
“과거의 복수심에 사로잡혀, 또 한 번 제 사람을 잃는 우는 범하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하면, 이즈음 하여 나도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나?”
멈칫.
목례를 하고 먼저 걸어가던 루나가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혹, 그 소중한 사람 중에 세타 쿤 이그니스도 포함되나?”
“…….”
루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답은 그거면 충분했다.
“…처음으로 녀석이 부러워지려고 하는군.”
크리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머릿속으로는 역시 ‘거짓말 못 하는 것 맞잖아’ 따위의 실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
성벽으로 돌아온 직후,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나는 한참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찾고자 하는 이는 그러고도 30분은 더 지나서야 시야로 들어왔다.
저 멀리, 중앙 광장 방향에서 한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크리스 경!”
나는 잽싸게 그쪽으로 달려갔다.
“…세타 쿤 이그니스.”
“진즉 광장부터 뒤져 봤어야 하는 건데, 제가 바보였네요.”
“…네 능력에는 다시 한번 놀랐다.”
“엥?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래요?”
“나조차 부러워할 정도의 팬을 만들었더군. 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 어마어마한 얼음덩이를 녹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순간 내 미간이 좁혀졌다.
“자꾸 알아듣기 힘든 말씀만 하지 마시고요. 그보다, 긴히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오늘 나는 인기가 많군. 근데, 기쁘지는 않아. 오히려 기분이 울적해졌달까…….”
“…….”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상태가 이상했다.
꼭 실연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하여,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됐고, 지금 당장 저쪽의 대장에게 연락을 취해주실 수 있을까요?”
“…대장?”
“카이클 공작님 말이에요.”
“……!”
흐릿하던 크리스의 망막에 점차 초점이 맞춰져 간다.
그 시선은 이내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바라봤다.
“…누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