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역공(1)
“뭐…?”
실비아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루나와 유리나는 마주 마나를 끌어올렸다.
크리스 휘하의 기사들은 도합 서른.
그중, 스물이 나를 향해 접근해 왔다.
나머지 열은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듯 다른 일행들에게 검을 겨눈 채였고.
우스운 일이다.
“기사 스물에 6써클 유저가 하나. 고작 그 정도 인원으로 저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물론. 이들 중 엑스퍼트 이하의 기사는 아무도 없다.”
“…그건 좀 대단한데?”
“그럼에도, 내 생각이 오판이었음을 인정한다. 처음부터 이들과 함께 싸웠어야 하는 건데…….”
크리스가 힐끗, 쓰러진 로브인들을 눈짓했다.
나는 가만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요.”
“…오만하군.”
우웅! 우우우웅!
이제, 크리스의 주변으로 확연히 눈에 보이는 마나가 일렁였다.
알려진 바로 그의 주력은 전투에 뇌전을 접목시킨 특이한 케이스였다.
드물게 두 가지 주력을 동시에 타고난 더블 캐스터.
그런 크리스의 재능은 왕국 전체에서도 두 번째로 이름 높았다.
물론 본인은 자신이 첫 번째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지만.
다시 말해, 이 얘기는 크리스에게 발작 버튼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제노스 다음가는 재능이시네요.”
“……!”
“……!”
내 말에 실비아와 유리나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나조차 힐끗, 내 쪽을 한차례 흘겨봤다.
“저거 금기어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 금기어는 무슨. 속이 다 시원하구만.”
“…저 녀석, 진짜로 자신은 있는 거겠지? 제아무리 괴물이라도 이만한 거리라면 기사들을 상대로 무척이나 불리할 텐데…….”
“실비아, 네가 직접 안 봐서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하기야, 보조 마법이 주력인 너니까 이해 못할 일도 아니지만.”
“뭐라는 거야, 상성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일단 태우고 보는 계집애가.”
“어머.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분명 이론 성적은 내가 더 우수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실비아와 유리나가 연신 티격거렸다.
다만, 주변의 분위기는 갈수록 험악해졌다.
기사들은 거침없이 홀을 휘돌리며 자세를 다잡고 있었으니까.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그 모두의 검에 선명한 오러까지 덧씌워졌다.
예의 엑스퍼트 이하는 아무도 없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위축될 내가 아니었지만.
“크리스 경. 가문을 배신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
“보다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야망입니까?”
“…….”
“그도 아니면, 절망뿐인 현실의 회피 수단입니까?”
“…….”
크리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더욱 마나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허나, 내 물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둘 다 아니군요. 하면, 복수입니까?”
“……!”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아주 미미하게 크리스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니까.
나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만약 이유가 그거라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무슨 헛소리냐?”
“그도 그럴 것이…….”
직후 나는 곧장 메시지 마법으로 의념을 전달했다.
- 인버스 공작님을 증오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소중한 사람을,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려 한 아비를 세상 어느 누가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
순간, 크리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더하여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주군…?”
“…물러나라.”
“예?”
“모두 물러나라.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부탁이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 명에 따라다오.”
“……!”
가장 먼저 이변을 감지한 선두의 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이 갑작스러운 명령에 다른 기사들조차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물론, 크리스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타 쿤 이그니스. 대화를 나누고 싶다. 기사들을 뒤로 물리는 걸 허락해 주겠나?”
직후, 내 입가로 완연한 호선이 그려졌다.
“물론이지요.”
***
크리스는 휘하 기사들에게 거듭 당부했다.
혹여나 자리를 비운 사이, 쓸데없는 짓은 추호도 하지 말라고.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가장 지위가 높은 기사에게 별도의 명을 내리고 나서야, 우리 둘은 조금 떨어진 공터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크리스 경이 서자라는 것, 인버스 공작님이 경의 생모를 죽이려 했다는 것, 그 사실을 경은 이미 모두 다 알고 있었다는 것. 이 정도요?”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뜻이군.”
“저도 한 가지만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말해라.”
“그런 내막이 있는 것치고, 크리스 경은 딱히 바이커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던데. 거기에도 달리 이유가 있을까요? 아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내 물음에 그제야 크리스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한 번 더 주변을 살핀 그는, 이내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바라봤다.
“녀석은 바보다.”
“예?”
“모르는 사람들은 내부의 잡음을 잠재우기 위해 공작님이 일부러 바이커를 아카데미로 쫓아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무슨 뜻이죠?”
“나와의 싸움을 피하고자, 바이커 녀석이 스스로 아카데미에 지원했다는 의미다.”
“……!”
이건 의외였다.
공작가의 자제쯤 되면 아카데미 입학이야 자유의사라지만.
인맥을 위해서라도, 실비아나 제노스처럼 입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만, 바이커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확고한 후계자인 다른 둘과는 달리 녀석에게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으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가문 내에 머물며 제 편을 만드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다.
“녀석은 가문의 누구보다 총명했다. 재능도 있었지. 사실은 뒤늦게 각성 따위를 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제 재능을 감춰온 것이다. 그저 나와 반목하기 싫다는 이유로.”
“…….”
진짜 그런 이유라면, 나로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같은 방을 썼던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녀석이 그 수년 동안 어떤 모욕적인 삶을 살았는지.
하면, ‘진짜 실력을…’ 어쩌고 하던 허세조차 모두 진짜였다는 뜻이 아닌가?
“바이커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무척이나 따랐다. 허나, 그럴수록 나는 녀석을 모질게 대했다. 장남은 나지만, 녀석은 적자(嫡子)니까. 결국은 공작가를 두고 다투게 될 경쟁자가 될 테니까.”
“그래서 바보 흉내를 냈다는 건가요? 형이랑 싸우기 싫어서, 스스로 아카데미에 지원했고?”
“…그래.”
잠시 턱을 괸 채 무언가를 고민하던 내가 이내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경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모욕적이었겠네요.”
“……!”
순간 크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경은 그런 배려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할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
크리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이 곧 긍정이라고.
천재라는 족속들은 대게 이런 상황에서 감동이 아니라 치욕을 느낀다.
아마도 무시당한다고까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크리스는 서자였으니까.
그런 거라면, 수년 전 아카데미에서 바이커에게 보인 차가운 태도도 이해가 갔다.
“…네 말이 맞다. 녀석은 내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배려했지. 하지만… 당시 어렸던 나는 그 행동으로 모멸감을 느꼈다. 마치 자리를 구걸받은 기분이었지.”
“이해해요.”
“가문 내에서 내 영향력이 점차 커져 갈수록 공작님은 못내 신경 쓰이셨겠지. 후계로서의 자질은 충분한데, 천것의 피가 섞인 서자니까. 다만, 그 사실은 대외비였다. 의심은 하지만 함부로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역린(逆鱗).”
“그래서 조용히 치부를 은폐하려 한 거군요. 경의 생모만 사라지면, 의심은 그저 의심만으로 끝날 테니까.”
“그래. 하지만 공작님의 계획은 실패했다. 결국 실행도 하기 전에 내게 발각되고 말았으니까.”
이제야 그 상세한 내막을 모두 알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럼, 경의 모친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죽었다.”
“……!”
“내전 중에 목숨을 잃으셨지. 그것도 공작님의 책임이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다. 전쟁이 벌어지고 영지가 습격당할 무렵… 공작님은 식솔들을 모두 버리고, 측근들만 챙겨 몸을 피하셨으니까.”
“…시간 벌기였군요.”
“네 말대로다. 소식을 접한 바이커는 만사를 제쳐두고 가문으로 복귀했지. 그리고, 제 재능을 십분 살려 나를 돕기 위해 지금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 가문이 무너지면 재산도 지위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테니까.”
“바보네요.”
“그래. 녀석은 바보다. 바보를 넘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똥멍청이지.”
순간 크리스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허나, 나는 안다.
그는 지금 울고 있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세상 그 누구보다 슬퍼 보였다.
“이제 묻겠다. 너는 바이커의 친구인가?”
나는 조금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하면, 나와도 아군인가?”
“아군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의 적은 친구라고들 하잖아요?”
“그 말은…….”
“전쟁에서 이기려면, 내부의 썩은 살부터 도려내야겠지요. 그래서 크리스 경도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린 거잖아요? 이대로 내전에서 승리해 봐야 더 나은 세상은 오지 않을 테니까요.”
“…비록 적이지만, 카이클 공작님은 합리적인 인물이다. 내 아버지처럼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머저리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아.”
“카이클 공작님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후하시네요. 그리 말씀하시니까, 직접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요?”
“네가 원한다면 따로 다리를 놓아줄 수도 있다.”
“음…….”
이건 예상외의 소득이었다.
물론, 사양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럼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마침 이 지긋지긋한 내전과 관련해서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요.”
“알았다. 하면 이번 일은…….”
“네.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고, 이대로 묻기로 하지요. 물론 어느 정도 연기는 필요할 테지만.”
“인정한다. 내 아버지는 눈치가 빠른 분이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목적을 이루면서, 썩은 살까지 상당 부분 도려낼 수 있는 묘안이.
“본거지에 남아 있는 인버스 공작님 쪽 사람들. 그들의 명단을 제게 따로 추려 줄 수 있으실까요?”
***
우리는 그 길로 곧장 본거지로 향했다.
물론, 이것저것 캐묻는 일행들에게는 간략하게나마 사정을 설명하고.
예의 크리스의 수하인 로브인들은 일단 주변에서 대기하도록 했다.
지금은 보다 확실하게 ‘연기’를 해야 할 때니까.
조금 걱정했는데 루나나 실비아는 당연하다는 듯 내 뜻에 따라줬다.
아군이지만, 두 사람 모두 인버스 공작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의 무리한 작전으로 루나는 아버지를 잃었고.
사사건건 의견에 대립각을 세우던 실비아의 아버지는 중상을 입고 가사 상태에 빠졌다.
다만, 다른 한 사람만큼은 예외였다.
“웃기지 마! 썩은 살을 도려내기 위해 반란군과 손을 잡겠다고? 그게 할 소리냐?”
“아직 손을 잡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그리고, 제국이 건재한 이상 우리끼리 피 터지게 싸워봐야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라고 다 설명했잖아.”
“난 인정 못해! 반란군은… 그 개자식들이 우리 가문에 무슨 짓을 했는데…!”
내전 초기, 유리나는 가문과 아버지를 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반란군의 손에 의해서.
“카이클 공작… 그 인간은, 한때 절친했던 친구의 목도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낼 수 있는 악마야.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작자는 반드시 내 손으로…!”
“유리나 벤 아리에나.”
“……!”
한데, 그런 그녀를 진정시킨 것은 의외로 크리스였다.
“…뭐죠?”
“카이클 공작님은 수차례나 아리에나 자작님에게 몸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그 사실은 너도 이미…….”
“입 닥쳐요! 그따위 소리로 죄를 감춰줄 생각이라면, 당신부터 태워 버리겠어.”
“…그런 뜻이 아니다.”
“아니긴 뭐가…!”
“카이클 공작님은 끝까지 아리에나 자작님을 살리려 하셨다. 네 말대로 친구니까. 적을 넘어, 왕국의 귀중한 인재니까. 그리고 네 가문의 진짜 원수는 따로 있다.”
“뭐라고…?”
“다만, 자세한 내막은 나 또한 알지 못한다. 당사자인 카이클 공작님은 끝내 아리에나 영지를 피해 수도를 점령하려 하셨지만… 다른 외부적인 이유로 그 계획이 틀어졌지. 아마도, 카이클 공작님 당사자라면 그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그러니까, 지금만큼은 협조를 해다오. 네 진정한 복수를 위해서. 더 나아가 이 나라, 테라를 위해서.”
“……!”
직후, 크리스의 행동은 놀라웠다.
그대로 유리나 앞에 무릎 꿇은 그는 고개마저 조아렸으니까.
“주, 주군!”
“그만. 나서지 마라.”
대번에 끼어들려는 기사들을 크리스가 제지했다.
그리고…
“…당장 일어나요. 본인이 잘못한 일도 아닌데 웬 착한 척이람.”
“하면…….”
“일단은 지켜보겠어요. 당신 말대로 진짜 진실이 무엇인지부터 알 필요가 있는 듯하니까.”
“고맙다.”
그제야 크리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런 우여곡절들을 모두 겪고 나서야, 우리는 간신히 해방군의 본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해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갈 무렵.
그 황혼의 노을 아래에서, 저 멀리 횃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성벽이 보였다.
“아군도 속여야 한다면 차라리 조용히 진입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냥 날이 밝는 대로 들어가는 건 어떨까?”
실비아가 조심스레 제 의견을 피력했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나?”
“최초의 목적은, 밤중에 들이닥쳐서 하나둘 간자들을 캐낼 생각이었잖아.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고.”
“…썩은 손발을 잘라내야 하는 일. 이미 그 대상은 알고 있으니, 차라리 모두가 한곳에 모이는 아침에 일망타진하자는 건가?”
“응.”
루나와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어.”
“응?”
“어둠은 인간의 감정을 극한까지 자극하지. 무슨 수를 써도 어찌하지 못할 절대적인 힘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두 가지…?”
“도망치거나, 굴복하거나.”
“……!”
화르르르륵!
직후, 나는 양손으로 주먹만 한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곧장 하늘 위로 떠오른 그것들은 어둠을 환하게 밝히며 점차 크기를 부풀려 갔다.
“매번 그랬거든. 한번 지켜봐. 저들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