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배신자 색출(2)
커튼이 곳곳에 쳐져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넓은 방.
더하여, 가구라고는 커다란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곳 위에 레이지는 죽은 듯 엎어져 있었다.
똑, 똑, 똑.
순간 절도 있는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이지는 언제나처럼 고개만 힐끗 돌렸다.
“들어 오세용~”
“…실례하지.”
찰나, 열린 문틈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반사작용으로 레이지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빨리 왔네? 근데 써드 문(Third moon), 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리를 비웠나 봐?”
“위의 둘은 임무 때문에 멀리 떠나 있다. 너야말로, 2황자 전하와 함께 있던 것 아니었나?”
“스노비 전하가 좀 바쁜 사람이야? 당연히 일하러 갔지. 마탑에서 사로잡은 인질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나 뭐라나.”
“하면, 굳이 나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는 뭐지? 여기는 2황자 전하의 개인 별장으로 아는데. 만에 하나 누군가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왜 어울리지도 않게 약한 소리야? 당연히 부탁할 일이 있으니까 불렀지.”
일순간 예의 사내의 두 눈 사이로 기묘한 빛이 일렁였다.
“단순한 부탁인가, 아니면 의뢰인가?”
“굳이 표현하자면 의뢰의 연장선상이기는 한데… 아니, 그보다 조직의 주인으로서 명하는 건데, 그리 정 없게 말할 거야?”
“…나는 너를 조직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흐응~ 그 말, 그대로 퍼스트한테 일러줘도 될까?”
“…….”
그제야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레이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 그녀와 추락하는 달은 한 가지 계약을 했다.
그 내용대로라면 달들은 결코 레이지의 명을 거부할 수 없다.
그래서 스노비도 실질적인 주인이 어쩌고 하며 운운했던 것이고.
“그리 싫은 티 팍팍 내지 마. 조직의 명예와도 직결된 문제니까. 열아홉이 사로잡혔거든.”
“……!”
순간, 사내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임무에 실패했다는 뜻인가?”
“응. 그러니까, ‘10’ 아래의 달들 중 현재 활동이 가능한 인원들을 전부 추려줬으면 좋겠어.”
“…의도는 알겠다만,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는데. 열아홉은 조직 내에서도 최하위다. 그보다 윗선으로 셋 정도만 움직여도 테라 해방군쯤은…….”
“절대로 무리야. 그 열아홉이 단 한 방에 무너졌거든. 그것도 제 특기인 궁술로 말이야.”
“……!”
이번만큼은 사내도 흘려들을 수 없었다.
“사실인가?”
“내가 뭣하러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상대가 누구길래?”
“세타 쿤 이그니스라고, 최근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유망주… 아니, 이제 유망주도 아니겠네. 무려 마탑주를 일대일로 꺾었으니까.”
“마탑주를 일대일로…? 아니 그보다, 궁사도 아니고 마법사라고?”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래. 바람의 마탑주 아이젠버그. 그도 녀석에게 죽었어.”
“…갈수록 믿기 힘든 얘기만 골라서 하는군.”
“믿든 안 믿든 상관없는데, 이번 일에는 조직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거야. 내게 말했던 너희의 진짜 꿈을 위해서라도.”
“…….”
“이제야 날개를 얻었는데, 채 날아보기도 전에 꺾이고 싶은 건 아니잖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반문한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나?”
“응~ 말해.”
“너는 알고 있나? 그 세타 쿤 이그니스라는 녀석의 진짜 실력을.”
“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나한테 시킨담?”
“…보다 빠른 일 처리를 위해서다. 그 정도 정보는 있어야 나도 곧바로 전력을 구상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래 뭐,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한데, 괜찮겠어?”
“상관없다.”
“정면승부라면, 써드 문인 너는 필패(必敗). 세컨드 문(Second moon) 정도는 되어야 얼추 수준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
충격이 배가되면 도리어 할 말을 잃는다고 했던가?
기실, 사내의 이런 경악스러움은 당연했다.
방금 언급된 세컨드 문.
그리고 추락하는 달 최고의 실력자인 퍼스트 문은, 전 대륙의 살수들을 통틀어도 그 둘밖에 없는 마스터들이었으니까.
그것도 십이월(十二月)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그런 그들이 작정하고 누군가를 암살하려 든다면,
이 세상에 죽이지 못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미있군. 이번 임무에는 나도 참전하지.”
“뭐야, 설마 살수 주제에 호승심 따위를 느끼는 거야?”
“최근에 벽을 앞두고 있거든.”
“……!”
레이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은…?”
“그래. 적당한 상대만 있다면, 나도 살수 마스터(Assassin master)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것 같다.”
***
“…….”
사위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저벅, 저벅, 저벅.
그 와중에 루나가 쓰러진 로브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곤 하나둘 그 면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정체를 추정할 만한 표식 같은 건 없군.”
“기대도 하지 않았어. 그렇게 바보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않았거든.”
“세타, 대체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걱정 안 해도 돼.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테니까. 일시적으로 마력의 흐름을 반전시켜, 그릇인 써클에 강하게 충격을 줬을 뿐이야.”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나도 막상 시도해 보는 건 처음인데, 그리 어렵진 않던데?”
“…그렇군.”
그나마 루나는 다른 이들보다 빠르게 충격에서 벗어났다.
같은 마법사인 유리나나 실비아, 크리스 같은 경우에는 여태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젠 놀랍지도 않다. 너네 할아버지가 사윗감으로 탐내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되네.”
직후, 나지막이 울리는 유리나의 말에 누군가가 곧바로 반응했다.
“너, 그걸 어떻게…?”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그리 동네방네 다 떠벌리고 다니시는데.”
“…흐응.”
실비아가 묘한 콧소리를 냈다.
“혹시 질투하는 거니? 네 남자친구를 빼앗길까 봐.”
“나, 남자친구?”
“너야말로 아카데미 때 네 입으로 떠들고 다녔던 것 같은데?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남자친구가 어쩌니… 아, 춤도 췄던가?”
“그, 그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거고! 애당초 질척대는 녀석들만 없었다면 그따위 말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네, 네. 당연히 그러시겠죠.”
“이익…!”
역시 말싸움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어느새 유리나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걸로 한 가지는 확실해졌네.”
나는 여전히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지?”
“의문의 배신자는 본거지가 아니라 국경지대에 있어. 확실해.”
“……!”
순간, 루나를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
“배신자 문제를 얘기한 게 고작 수 시간 전이야. 설령 통신용 수정구로 바로 연락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본거지에서 이곳까지 최소 반나절 이상은 걸릴 테니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지.”
“하면, 인버스 공작님의 최측근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인가?”
“얘기가 그렇게 되겠네. 실비아 정도를 제외하면, 이번 무리에 참가한 모두가 인버스 가문 쪽 가신들이었지?”
“…그 말대로다.”
아직 긴가민가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나와 함께 회의에 참석했던 실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테미르 후작인가?”
“왜 그라고 생각하는데?”
“…회의장에서의 태도만 놓고 얘기하는 건 아니야. 인버스 공작님의 대내외적 부관인 그라면, 개인 일정까지 줄줄이 꿰고 있을 테니까. 하물며 여태 함께 움직였으니, 실시간으로 정보를 흘리기도 용이할 테고…….”
“일리는 있네.”
다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무리에는 테미르 후작만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만약 어제와 같은 일들을 겪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리 판단했을지도 모르지만…
“…왜인지, 그 일과 그리 무관한 것 같지는 않거든.”
“응? 방금 뭐라고…….”
나는 더 대꾸하지 않은 채 루나를 돌아봤다.
“루나. 부탁이 있어.”
“부탁?”
“이들이 깨어나기 전에, 나중에라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전부 포박해 줄 수 있겠어? 저기 기사님들도 데려다가.”
나는 예의 크리스가 데려온 기사들을 가리켰다.
“…크리스 경이 협조만 해준다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만, 묶은 이후의 계획을 물어도 되겠나?”
“글쎄, 필요하다면 고문이라도 해야겠지? 어디서 온 건지,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건지, 반란군과는 어디까지 관련이 있는 건지.”
“고문… 이라고?”
“딱 봐도 입막음을 하려고 이리 과감하게 움직인 것 같은데, 우리가 사정을 봐줄 이유는 전혀 없지 않겠어?”
“하지만 이들은…….”
루나가 무어라 채 말하기도 전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또 동료니 어쩌니 할 생각이라면, 거기까지만 하도록 해. 이미 신의를 져 버린 그 순간부터, 이들은 동료가 아니니까.”
“…….”
“만약 고문으로도 입을 열지 않는다면, 나는 이들을 하나씩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어.”
“……!”
“이제는, 동료가 아니라 우리의 적이니까.”
내 말에 동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머리는 이해하지만, 끝끝내 마음 한구석이 찝찝한 거겠지.
물론 그렇다고 대놓고 반발하는 이도 없었다.
내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덥석!
나는 곧장 주변에 널브러진 한 사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리곤 마나의 흐름을 원래대로 돌려 그를 강제로 일깨웠다.
“…쿨럭!”
얼마 지나지 않아 틀어쥔 상대의 눈꺼풀이 들어올려진다.
흐릿했던 망막은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여, 여기는…?”
“딱 하나만 묻겠습니다. 누구의 명으로 이곳에 오신 거죠?”
“너는… 세타 쿤 이그니스인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시지요. 누구의 사주를 받으셨습니까? 누가 저희를 죽이라 했죠?”
“…큭큭큭. 내가 대답할 리가 없지 않느냐? 그 잘난 머리로 한번 생각해 보거라. 애송이.”
“…….”
역시나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허나,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러십니까?”
“그래. 네가 아무리 나를 겁박해도,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하면, 이대로 죽으시지요.”
“…뭐?”
나는 마나를 일으켜 단숨에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그 결과,
뿌드득.
섬뜩한 뼛소리가 울려 퍼졌다.
완전히 목이 꺾인 사내의 신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추욱 늘어졌다.
“미, 미친…….”
이 갑작스러운 광경에 실비아가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루나는 가만히 미간만 찌푸렸고, 유리나는 아예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투콰콰콰콰콰콰!
한 박자 늦게, 마력의 폭풍우가 들이닥쳤다.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살기.
절로 피를 들끓게 만드는, 농도 깊은 마나.
한데 뒤섞인 그 모든 기운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하나만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나설 생각이 드신 모양이네요. 하기야 소중한 부하들을 이리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으실 테니까.”
“네 녀석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냐?”
“순전히 의심일 뿐이었지만요.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 증거가 필요했죠. 바로 지금처럼.”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네놈은 악마다.”
“제 가족은 물론이고, 수만 동료들의 뒤통수를 치려 한 인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대사 같은데요.”
직후, 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그곳에 한 잘생긴 사내가 오롯이 서 있었다.
전신으로 나조차 무시 못할 마력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내 입가로 비틀린 미소가 맺혀졌다.
“크리스 론 인버스 경. 역시 배신자는 당신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