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추락하는 달(2)
“드래곤!”
실비아의 목소리였다.
“…….”
그 한마디로 숨 막힐 듯한 침묵에 긴장감이 더해졌다.
상황이 이리되자 내 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미치겠네, 진짜.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데 아직은 조금 더 버텨야 할 듯싶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세타가 드래곤일 리가 없잖아.”
한때 나와 같은 방을 썼던 바이커의 중얼거림에, 실비아가 곧바로 태클을 걸었다.
“진짜 유희 중인 드래곤이든, 다른 무엇이든. 우리 해방군을 도와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잖아?”
“…….”
“입장 바꿔 생각해서. 세타는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러 와선 억울하게 뺨을 얻어맞은 격이야. 밀고자니, 선동꾼이니. 감사 인사는커녕, 줄곧 갖은 모욕들만 감내해야 했지.”
말은 바이커에게 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인버스 공작을 향하고 있었다.
역시 멕이는 실력 하나는 탁월했다.
“이제는 증명된 거 아닐까? 홀로 전장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저 대단한 반란군의 군세를 뒤로 물리기까지 했으니까.”
“…후자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생각보다 위력이 약했어. 아까 하늘에 떠 있던 메테오의 크기라면, 이곳 장벽까지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겠지.
티 나지 않게 크기만 부풀려 뒀을 뿐, 위력까지 늘어난 것은 아니었으니.
지금쯤이면 아마 적들도 당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희뿌옇게 뜬 흙먼지와 어둠 탓에 거기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니. 설령 피해가 예상보다 경미하다 해도 반란군은 진군을 감행할 수 없어. 정확히는, 그럴 이유가 사라졌지.”
“…무슨 뜻이지?”
“적들은 이미 목적한 바를 이루었으니까.”
말을 마친 실비아가 다시 한쪽을 돌아봤다.
“인버스 공작 각하?”
“……?”
“여기 있는 이들이 배신을 하지 않았다 함은, 우리 군 내부에 달리 밀고자가 있다는 뜻이겠죠?”
“…그렇겠지.”
“만약 적들이 이대로 병력을 물린다면, 그 내부의 배신자부터 색출해 내는 게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하는데요.”
인버스 공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야말로 적들이 원하는 바가 아닌가? 우리가 스스로 분열하게 만드는 것.”
“그렇다고 방목할 수도 없겠죠? 전쟁 중 등에 칼 맞기 싫다면요.”
“……!”
과연 그랬다.
그제야 실비아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가 알아들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적들은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할 실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
“그리고, 만에 하나 또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싱긋 눈웃음 지은 실비아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쪽에는 이미 든든한 아군이 있잖아요?”
“음…….”
인버스 공작이 나지막이 침음을 삼켰다.
완전히 실비아의 말에 넘어간 모양새였다.
솔직히, 그가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이라고는 나 또한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알려진 그의 성격대로라면 내 존재마저 이용하려 들겠지.
“…바이커.”
“옛! 공작 각하.”
“‘친구’를 방으로 안내해 주거라. 무리했는데, 잠시라도 쉴 수 있게 배려해 줘야지.”
“……!”
역시 예상대로였다.
속이 뒤틀렸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얘기만큼은 나도 지극히 공감했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힐끗, 내 쪽을 돌아본 바이커가 어렵사리 손을 내민다.
“이, 이쪽으로…….”
“크흠.”
가볍게 헛기침을 한 내가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한데,
덥썩!
“……?”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또 무슨… 세디스?”
“세타. 등 뒤에 업고 있는 그거, 내가 생각하는 사람 맞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없이 다가선 세디스가, 내 등에 축 늘어져 있는 복면인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옷이 걷어지며 살색의 속살이 드러난다.
그곳에, 둥그런 달 위에 ‘19’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거기에 그런 문신이 있는 줄은 몰랐네?”
“혹, 고문을 할 생각이라면 나한테 맡겨. 모조리 불게 할 테니까.”
“듣기로 자결을 하더라도 정보는 발설하지 않는 이들이라고 하던데…….”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돼.”
“…엉?”
멍하니 반문하는 나를 향해 세디스가 실로 섬뜩하기 그지없는 말을 덧붙였다.
“마나부터 폐할 거야. 스스로 폭주 상태에 들지 못하도록. 이를 뽑아 혀도 깨물지 못하도록 만들겠어. 그래도 안 불면, 바늘을 하나씩 집어삼키게 할 생각이야. 제아무리 고문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고통에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꿀꺽.
나는 보았다.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바이커의 두 다리가 쉼 없이 요동치는 모습을.
역시 이 녀석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
안 본 사이, 세디스는 조금 변한 듯싶었다.
예의 내 등에 업힌 사내가 원인이겠지.
잠시 그 흔들리지 않는 두 눈을 마주 바라보던 내가 이내 짤막하게 답했다.
“싫은데?”
***
바이커는 나를 친절히 안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벽 내부에 자리한 방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으니까.
침대에 몸을 던지자 순식간에 수마가 쏟아졌다.
비대한 마나의 소모와 급격한 써클의 운용.
두 가지 부작용이 뒤늦게 전신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그렇게, 꼬박 반나절을 자고서야 나는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일단 지하 감옥부터 가보는 편이 좋겠지?”
그곳에 내가 납치(?)해 온 복면인이 있었다.
잠깐 알아본 바로, 적군은 실비아의 말대로 후퇴했다고 한다.
하기야 그대로 공격을 감행했다면, 누군가가 벌써 나를 깨우러 왔겠지만.
“음…….”
문득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치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던 세디스의 얼굴 말이다.
녀석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간단했다.
정보를 채 캐내기도 전에 복면인을 죽일 것 같아서.
그래서야 이리 고생한 보람이 없었다.
“저기, 제가 잡아온 복면인을 좀 만나고 싶은데요.”
“……!”
분명 해가 중천에 떠오른 대낮일 텐데 장벽 내부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만난 건, 지금 내 눈앞의 경계병들이 처음이라는 뜻이다.
한데,
“어서 오시지요, 세타 쿤 이그니스 님!”
계단을 지키던 예의 경계병들이 내게 힘차게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는 것이 아닌가?
“무슨…….”
“오시거든 언제든지 지하를 개방하라는 공작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예?”
순간 내 머리 위로 큼지막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건 또 의외였다.
예상은 했지만, 손님 대접이 이 정도나 달라질 줄이야.
“어… 그럼, 수고하세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시지요.”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 내가 그대로 경계병 사이를 지나쳤다.
이런 호의를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
각설하고,
습기 가득한 계단의 끝, 지하 깊은 곳.
복면인은 그곳에 있었다.
아니, 이제는 복면인도 아니었다.
“…….”
인기척을 느낀 것일까?
팔다리가 속박당하고 재갈마저 물린 채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스물 전후의 사내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막, 나는 두 번이나 놀랐다.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 그 외모에 한 번.
마나라고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기운에 또 한 번.
“…이러면 약속대로 마나의 맹세를 받을 수도 없겠네.”
쓰게 미소 지은 내가 천천히 철창으로 다가섰다.
“좀 어때요?”
“…….”
사내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분명 그 시선은 똑바로 나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재갈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혹시나 혀를 깨물까 싶어 그러지는 못할 것 같았다.
물론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지도 않을 테지만.
“음…….”
문제는 또 있었다.
이곳 지하에, 사내 외에 또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적당히 할 것이지.’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아마도 사내의 마나를 폐한 것도 저들이겠지.
나는 망설임 없이 한 가지 마법을 캐스팅했다.
입을 열지 않아도 의지를 전할 수 있는 메시지 마법.
그것을 나뿐만 아니라 사내에게도 걸었다.
쥐새끼들에게 내 대화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 이제 말씀해 보세요.
- …….
- 홀이 파괴되었어도 감각까지 죽은 건 아니잖아요? 머릿속으로 의지를 전한다는 상상을 떠올려 보세요. 그때 화살에 념(念)을 실었던 것처럼.
- ……
- 혹, 양심도 없이 모르는 척하려는 생각은 아니시죠? 그야 약속을 곧이곧대로 지킬 거라 생각한 나도 바보긴 하지만…….
나직이 한숨을 내쉰 나는 저도 모르게 몇 가지 마법들을 떠올렸다.
마법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들은 모두 흑마법이라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일례로 정신의 마법사 저스틴 브레이너는 순수 마나로 멀쩡한 사람을 광인으로 만들고, 자폐 세계에 빠져들게도 하였으며, 제 의지로 상대를 조종까지 했다.
그래서 마탑주들 중 유일하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가 정신의 마법사이기도 하다.
힘의 성격상, 그 힘이 무척이나 께름칙하거든.
다만, 나까지 그런 감정에 동조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 …무엇이 궁금하지?
바로 그때, 상대가 의지를 전해왔다.
- 오, 말할 생각이 드신 모양이네요?
- …약속은 약속이니까. 더하여, 그런 미친 운석을 소환할 수 있는 존재가 정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현명하시네요.
- 그렇다고, 네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지는 못하겠지만.
- 그건 또 무슨 뜻이에요?
- 정식 숫자를 부여받은 진짜 달들은, 정신에 금제가 가해진다. 만약 조직에 해가 되는 정보를 누설하려 할 경우… 네가 어떻게 손쓰기도 전에 내 정신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 흠…….
저 대답으로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세디스는 추락하는 달에 소속된 적은 있지만, 정식 번호를 부여받지는 못했다.
그랬다면 이 금제라는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고문을 운운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 추락하는 달은 반란군의 편에 완전히 서기로 한 건지… 라는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 무리겠네요.
- 그래. 말할 수 없다.
- 그럼 질문을 달리해서, 만약 당신이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직 전체가 해방군을 치려 할까요?
-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이 정도 대답은 가능한 모양이다.
아무튼, 곤란했다.
추락하는 달 전체가 해방군을 노린다는 말은.
결국,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밤도 끝이라는 의미니까.
수준급 암살자의 존재는 그만큼이나 골치 아팠다.
-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돼요?
- 질문이 많군. 약속은 한 가지에 대한 답이 아니었던가?
- 딱 하나만 더 대답해 주시면, 더 귀찮게 굴지 않을게요. 물론 금제가 예상된다 싶으면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고요.
- …말해라.
사내의 대답과 동시에, 힐끗 주변을 둘러봤다.
정확히는, 천장의 어둠 속에 숨은 존재들을 훑은 것이었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겠지만, 아마 저들도 눈치챘겠지.
이쪽이 마나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일단 저들은 나중에 손봐주기로 하고.’
- 추락하는 달에서 정식 숫자를 부여받으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죠? 훈련 중에 태반이 죽는다고 들었는데, 그중에 도망자는 없었나요?
- 그런 걸 왜 묻는 거지?
- 그냥, 개인적으로 관심이 좀 있어서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사내의 눈빛에 체념이 감돌았다.
- 우린 그들을 ‘탈주자’라고 부른다. 그런 이들이라면 무수히 많았었지.
- …었지?
답이 과거형이다.
곧장 그 부분에 대해 캐물으려 하자,
- 허나, 그 모두가 죽었다. 조직은 그런 겁쟁이들을 살려두지 않으니까.
- 전부 다요?
- …딱 두 명.
- ……!
- 조직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도망쳤다고 해야 할지, 놓아줬다고 해야 할지.
이거다.
반짝거리려는 눈을 애써 침체시키며 철창 앞으로 바투 다가붙었다.
- 그 부분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
따뜻한 볕이 내리쬐는 정오.
자이툰 왕국령, 덴마르 협곡 앞.
마치 이름난 장인이 직접 깎아내린 듯한 그 웅장한 골짜기를 전면에 두고 스왈로우 제국군은 진을 치고 있었다.
수도로 직행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
2황자인 스노비의 임시 숙소도, 그곳에 있었다.
펄럭!
지금 막, 천막 안으로 스노비가 들어섰다.
한데,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졸린 듯 축 처진 눈매에, 마치 침대와 일체화라도 된 듯한 여인이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으니까.
“레이지.”
“하암~ 왔어?”
나태의 레이지.
그녀가 누운 채로 고개만 스르륵 돌렸다.
“표정을 보니, 대공에게 꽤나 깨진 모양이네.”
“…부탁이 있어.”
“부탁? 스노비가 나한테?”
“응. 들어줄 수 있겠어?”
“으음~ 일단 말이나 해볼래? 들어줄 만한 거면 들어주고.”
천막 내로 완전히 들어선 스노비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 하나에게 감시자를 붙이고 싶어서. 이왕이면 은폐 능력이 마스터급 이상인 인물이면 좋겠거든.”
“그거야 내 전문 분야이기는 한데… 누구?”
“너도 한 번 본 적 있는 꼬맹이야.”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레이지가, 순간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거 혹시,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 아이?”
“응. 대공은 변덕이 심하니까. 언제 또 죽이려 들지 모르니, 감시는 필요할 것 같아서. 그 아이는 아직 죽어서는 안 되거든.”
“근데, 적당한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네? 듣기로, 서큐버도 그 아이한테 당한 거라며.”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거야.”
“…….”
“너라면 가능하잖아. 추락하는 달의 ‘진짜’ 주인인 너라면.”
부비적부비적, 침대 위에서 꿈틀거리던 레이지가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고. 일단 생각은 좀 필요할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