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급습(2)
- 인버스 공작이 움직였습니다.
라는 보고를 받은 것이, 정확히 반나절 전이었다.
그 즉시 국경지대.
정확히는 스란의 영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밀라드 후작이 움직였다.
엄선하고 엄선한 일천의 기사들과 마법사들도 함께였다.
더불어 잘 훈련된 정예 병사 일만까지.
하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알고 미리 준비할 수 있었을까?
“진짜 무서운 적은 언제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나타나는 법이거든.”
아밀라드 후작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간자, 혹은 밀고자라고도 한다.
그들의 존재로 이쪽의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었다.
기실 그는 이쯤 되면 적군 사이에서 변절자들이 속출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걸 알기에 아군은 구태여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던 거니까.
다시 말해, 작금의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시간들도 모두 계획범위 내라는 뜻이다.
강물이 얼기까지 3개월.
아니, 앞으로 2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적들은 그만큼 시간을 벌었다고 좋아할 테지만,
천만에.
3개월은 그저 이쪽에서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사람은 선택이라는 길목에서 언제나 망설이게 된다.
끝이 사로(死路)임이 분명한 상황에서, 눈앞에 생로(生路)가 나타난다면 더더욱.
확실시되는 패배라면, 차라리 중도 포기하고 나 하나라도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 시작이 어렵다.
그런 탈주자가 한 명이라도 발생하면,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할 테니까.
보다 빨리 변절할수록, 보다 괜찮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군영을 설치해 둔 일도 모두 그런 이유를 겸해서였다.
“그보다, 대단하군.”
상념을 마친 아밀라드 후작이 이윽고 옆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곁에는 복면으로 얼굴을 감싼 웬 인영이 오롯이 서 있었다.
특히나 복면인이 쥔 커다란 흑궁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만약 직접 보지 못했다면 믿지도 못했을 터다.
자신은 저 멀리 망루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저 흑궁으로 어둠을 뚫고 정확히 그 위의 경계병을 꿰뚫는 신기라니.
완전히 멈춘 종소리가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공격의 적기라고.
“역시 돈값은 한다는 건가?”
아밀라드 후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복면인은 오늘을 위해 고용한 일종의 용병이었다.
적의 몰락을 알릴, 최초의 시작.
혁명의 완성.
이 한 수로 적의 공포는 더욱더 크고 넓게 번지게 되리라.
“길을 빌려준 스란에게도 따로 감사해야겠군.”
이제야 아밀라드 후작의 눈에도 일견 웅장한 장벽이 보였다.
테라의 대표적인 자랑이었던 철옹의 요새는 잠시 반역자들의 손에 넘어간 상황이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이 바로, 저 철옹의 요새를 되찾는 날이 될 테니까.
***
“으음…….”
옅은 신음과 함께 에반젤린이 천천히 의식을 되찾았다.
곧 흐릿한 이명 속, 웬 하이톤의 고성이 귀청을 때렸다.
“깨, 깨어났어요!”
“여기는…?”
마치 온몸을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이내 쓰러지기 전의 마지막 기억들이 떠올랐다.
아… 나, 마탑주들에게 당했었지.
“쪽팔리게 그게 뭐냐?”
“……?”
“뭐 마탑주 두 명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다더니, 지가 무슨 페르 급인 줄 아나 봐.”
“…….”
고통 속에서도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꽤나 눈에 익은 금발의 미녀가 멀지 않은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으니까.
“…상성이 좋지 않았을 뿐이거든요? 제 환상 마법은 멘탈이 약할수록 그 효과가 배가되는데, 빙결의 마탑주는 그런 쪽과 거리가 머니까…….”
“핑계도 가지가지다.”
“…일대일이면 진짜 이길 수 있다고요.”
게슴츠레 눈을 뜬 에반젤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도 아프다.
온몸이 쑤셔서 절로 침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허나, 이 이상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적어도 저 여자에게만큼은.
“빛의 마녀 세논 벤자민. 그러는 당신은 맡은 이들을 완벽하게 처리했나요?”
“어머, 얘 좀 봐? 제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말하는 꼬락서니가 그게 뭐니? 자기 때문에 난 아예 부상당한 부하까지 버려두고 왔더니.”
“그게 무슨…?”
“마탑주라는 것들은 이래서 싫다니까. 세상에서 지가 제일 잘난 줄 알지.”
에반젤린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조용히 눈치만 살피던 유리나가 잽싸게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그게요. 저희도 목적지로 가던 길에 마주친 건데, 부상을 당한 마탑주님을 자유연합주님이 직접 업고 계시더라고요. 물론, 그때에는 이미 응급처치까지 완벽하게 끝난 상태였구요.”
“…….”
“마침 실비아가 최상급 포션을 하나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아마 조치가 덜 되었다면, 이리 일찍 깨어나지는 못하셨을 거예요. 포션도 만능은 아니니까요.”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의식이 있었어야 알지.
자존심이 상했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인사부터 해야 할 듯싶었다.
“감사… 하다.”
“감사하다는 반말이고. 너 이제 고작 마흔을 넘겼다며?”
“…정확히는 서른여덟인데…….”
“뭐야, 내 동생하고 얼마 차이도 안 나네. 그런데도 건방지게 반말을 찍찍…….”
“감사해요. 아니, 감사합니다.”
에반젤린이 빠르게 말을 덧붙이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사실 그녀가 세논에게 특별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에반젤린이 막 마탑에 들어섰을 때 그녀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세논 벤자민이었으니까.
그 재능하며, 비슷한 분위기의 미녀 마법사라느니…….
정말 넌덜머리가 날 정도로 무수히 비교를 당하곤 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당사자를 보는 것은 처음인데도 말이다.
허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마운 생명의 은인이다.
“앞으로 언니로 모셔라?”
“…네에, 언니.”
손가락을 꼼지락대던 에반젤린이 수줍게 대답했다.
그제야 세논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즉 그럴 것이지.”
“대화는 끝났나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실비아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어요.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니네들은 어디로 가는 길이었냐? 느낌은 꼭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던데…….”
“네. 국경지대로 향하던 길이었어요. 인버스 공작님이 지금 자유연합주님의 소중한 제자를 혼내주려고 직접 행차하고 계시거든요.”
“…뭐?”
“그걸 바라시는 게 아니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지금 당장 움직이는 편이 나으실 것 같은데요. 저희랑 같이요.”
벌떡!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세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갈수록 태산이구만.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무슨 뜻이죠?”
“내 제자, 지금쯤이면 한창 칠악과 싸우고 있을 거거든.”
“칠악…?”
실비아가 멍하니 반문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세논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두 칠악과 마탑주들의 습격.
부상자의 발생.
그리고 피치 못하게 둘만 남겨두고 오게 된 일들까지…….
그 모든 설명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유리나가 걱정스레 다가섰다.
“괘, 괜찮은 거예요? 분명 그 칠악. 제가 마탑에서 봤던 마녀일 거예요. 그 정도 실력이라면 제아무리 녀석이라도…….”
“괜찮아.”
“……!”
“누구 제자인데. 당연히 괜찮지. 세타는 분명히 이겼을 거다.”
실로 대단한 믿음이었다.
세논의 두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다른 귀찮을 일들을 처리해 줘야겠지. 스승으로서 말이야.”
“그 말씀은…?”
세논이 씨익 미소 지었다.
“가자. 인버스 공작이고 뭐고, 내 제자를 건드리는 놈들은 이 빛의 마녀가 직접 쳐부수어 줄 테니까.”
***
“기름을 끓여라!”
“불화살을 준비하라!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 전에 시야를 확보하라!”
“마법사들은 광범위 마법을 미리 메모라이즈(Memorize)하도록!”
사방에서 사람들이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그 기민한 대응에 장벽 전체가 출렁인다.
그래도 사령관은 사령관인지, 빠르게 지시를 내린 인버스 공작이 측근들과 함께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홱!
허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할 일을 이어갔다.
직후,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단숨에 망루 위로 올라선 나는 장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대초월의 마탑주님이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오래 있으면 발광해 댈 게 뻔했기에 금세 아래로 내려섰지만.
“아무래도 저쪽에 마사수가 있는 모양인데요?”
“마사수? 마나를 사용하는 궁사를 말하는 거냐?”
“네. 올라가서 보니, 여기까지 거리가 적어도 1킬로미터는 되겠더라고요. 그 긴 거리를 뚫고 날아들려면, 마사수밖에 생각할 수 없죠. 무엇보다…….”
뾱!
나는 피떡이 된 시체에서 화살을 뽑아 들었다.
죽음에 익숙한 기사들조차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촉 끝에 웬 하얀 조각들이 점점이 묻어 나왔으니까.
그럼에도 내 손동작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왜인지, 갈수록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옅어지는 기분이다.
“놈… 반란군의 간자 따위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마사수라고? 웃기는 소리! 마사수를 육성할 수 있는 곳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단 한 군데밖에 없다. 그들은 어지간한 금력으로는 움직이지도 않아. 상식적으로, 오랫동안 전쟁을 이어온 반란군에 그럴 만한 여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맞다.
오직 단 한 곳.
대륙 제일의 암살 조직이라는 ‘그곳’만이 이런 마사수를 키워낼 수 있었다.
이는 그들만의 특별한 마나 연공법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는데.
애당초 손 안의 검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과 손을 떠난 화살에 마나를 유지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그뿐인가?
마사수는 기본적으로 궁사로서의 자질 또한 타고나야 했다.
매를 방불케 할 정도로 좋은 눈.
보다 탄력적인 시위를 버텨낼 수 있는 손가락 마디의 힘.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조준점이 흔들리지 않는 멘탈적인 부분까지.
그래서 키우기도 힘든 것이다.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세디스와도 관련이 있던 곳 같던데…….’
일전에 루나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나는 인버스 공작을 똑바로 마주 바라봤다.
은사와 연검, 그리고 마사수는 모두 그곳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이 화살 보이세요?”
“뭐…?”
“이건 흑궁(黑弓)에만 쓰이는 미노스 화살이라는 건데, 중급 마나석을 통째 갈아 넣어도 채 10개를 생산해 내지 못하는 기물이에요.”
“……!”
“상식적으로, 이런 게 아무 데서나 쓰일 리가 없겠죠? 적들은 지금 이쪽의 사기를 흔들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이런 저력도 있다… 라고.”
“끝까지 개소리를…!”
“여기, 친절하게 그 증거도 매달아 뒀네요.”
“……!”
자세히 보니 화살 꼬리 부분에 웬 종잇장이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보란 듯, 그것을 펼쳐 보였다.
종잇장에 적힌 내용은 실로 간단명료했다.
- 항복하는 자, 목숨은 살려줄 것이다.
“미친 작자들이…!”
인버스 공작의 곁에 선 바이커가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허나, 크리스가 그런 녀석을 제지했다.
“그걸로는 대답이 안 된다.”
“무슨 대답요?”
“네가 저들과 관련이 없다는 증거가 달리 있나? 상황이 이렇게 되면, 우리는 내부의 정보가 새어 나갔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증거라…….”
이게 바로 그런 건가?
매는 제 주인에게 맞고 엄한 곳에 화풀이한다는.
물론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웃어 넘겨줄 수 있었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훨씬 더 간단했으니까.
“그냥 뭐, 내가 저들을 다 쓸어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
“우선은, 받은 것부터 되돌려주고.”
우웅! 우우우웅!
써클을 휘돌림과 동시에 나는 재차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순식간에 손 안에 마력의 활을 생성해 냈다.
숙련도라면 이미 마법 대전에서 충분히 쌓아뒀다.
다만, 이번에는 ‘실체’가 있는 화살을 시위에 건다는 점만 다를 뿐.
꾸드드드득.
내 팔이 곧게 뻗으며, 곧 일직선의 완벽한 균형을 만들어냈다.
그 시점에, 이미 성벽 위 다수의 사람들이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흡을 멈춘다.
시선을 고정하고, 격발 순간까지 조준점이 흔들리지 않도록 마디를 단단히 고정한다.
평정심을 유지한 채.
마치 홀로 땅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고요하게.
그리고, 쏜다.
목표는 단 하나.
저 멀리 점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대군(大軍)의 중앙으로.
팅!
마치 실이 튕기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진 직후.
쓰애애애애애애애애액!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뒤를 이었다.
마침내 내 손을 떠난 화살이, 황혼의 하늘을 가르고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