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대립(2)
한편, 해방군의 본거지.
“뭐야!?”
쾅!
실비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묵직한 탁상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진 직후였다.
상석에서 웬 중년 사내가 거친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인버스 공작이다.
‘괜히 알려준 건가…?’
실비아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최초의 화근은 세타 일행이 남긴 편지였다.
하물며 이제는 할 말 있으면 직접 오라느니 하는 황당한 연락까지 해댔으니.
완전히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너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게다.”
“할아버지…?”
“너는 해방군의 참모가 아니더냐? 정보는 아군에게도 공유해야지. 더군다나 그 대상이 상관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신뢰는 이런 작은 일들로 조금씩 쌓여가는 게다.”
동의한다.
제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라 한들, 지금 해방군의 실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저 인버스 공작이었으니까.
“이럴 때 아버지라도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녀석도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날 테지. 치료에 차도가 있다고 하니까. 지금은 인버스 공작을 믿고 지켜봐 주자꾸나. 막말로, 하는 얘길 들어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지 않느냐?”
“…….”
부정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세타 일행들은 골 때리는 행동들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아닌 말로, 이유라도 제대로 설명해 놓고 가던가.
그녀와 달리 인버스 공작은 상당히 다혈질이었다.
소식을 접하는 즉시, 당장 그들을 잡아들이라는 명까지 내렸을 정도였으니까.
‘하기야, 지금은 해방군 전체가 극도로 예민해져 있으니…….’
실비아가 알게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은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아직도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이들과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특히나 인버스 공작이라면, 외부인인 그들이 언제 배신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비아라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쉬이 믿지 못했을 테니까.
더하여, 이번 일은 명백히 선을 넘었다.
“직접 오라고? 오냐, 직접 가주마. 에이드 후작! 잠시 내 빈 자리를 대신해 주시오. 필수 병력만 이끌고 곧장 국경지대에 다녀와야겠소.”
“정말 가시렵니까?”
“할 말 있으면 직접 오라는데 가줘야지. 호송한답시고 국경을 비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소?”
“하면, 이후에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번에야말로 그 속내를 낱낱이 밝혀봐야겠소. 나는 처음부터 그들을 믿지 않았으니.”
“알겠습니다.”
상대의 대답에 인버스 공작이 이번에는 뒤쪽을 돌아봤다.
“바이커, 크리스. 너희들도 따라오거라.”
“예!”
조용히 시립해 있던 두 젊은 청년이 당차게 대답했다.
“병력 운용에 차질을 빚지 않는 선에서, 우리 가문의 병력들만 따로 추리거라. 기사 3개 조와 마법군단 2개 조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것만 해도 도합 오백은 될 테니까.”
“명 받들겠습니다.”
크리스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직후, 실비아의 얼굴 위로 초조함이 깃들었다.
“저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어차피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단다. 차라리 그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을 때, 달리 손을 쓸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것이…….”
“늦어요. 그때에는 이미 사달이 벌어진 이후일 거예요.”
“흐음…….”
순간 실비아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까지 그 아이가 걱정되느냐?”
“네? 그, 그게 아니라, 우릴 도우러 온 소중한 원군들이니까요.”
“그래? 정말로 그뿐이냐?”
“당연히 그뿐이죠!”
조부의 묘한 눈초리를 실비아가 애써 외면했다.
내심 그녀는 억울했다.
정작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그런 감정 따위는 조금도 없는데, 괜히 혼인이니 따위의 말씀을 하셔선…….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리 걱정되면 우리도 따라가면 되잖아?”
“……!”
회의장의 열린 문틈으로 유리나가 빼꼼히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우리가 끌어들였는데 혹시나 죽이네 살리네.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면 안 되는 거잖아.”
“그, 그렇지.”
그제야 실비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미운 정도 정이라고.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있지, 어찌 끌어들여 놓고 이대로 모르는 체할 수 있을까?
귀족은 맡은 바 책임을 다 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실비아는 천상 귀족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가자. 뒷일은 부탁드릴게요, 할아버지.”
“흐~음…….”
재차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묘한 콧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실비아는 살금살금 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열 평 남짓한 초소.
“하암~”
의자에 기대어 앉은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일단 저지르기는 했는데, 기다리기가 영 지루하네요.”
“와봐서 알겠지만,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저녁은 되어야 도착할 것이다. 꼬박 하루는 이리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지.”
“오랜만에 휴식이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정이 지루하다면, 내 궁금증이나 풀어주겠느냐?”
“예?”
고개를 갸웃한 내가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말이다. 네 정확한 경지가 어찌 되는지.”
“아…….”
그제야 내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궁금할 만도 하겠지.
그전에야 재능 좀 있는 곱등이 정도로 평가했겠지만, 이제는 명실상부 마탑주까지 꺾은 거대 곱등이가 아니던가?
다만, 내 정확한 경지는 나도 잘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나한테까지 실력을 숨기는 거냐? 이건 좀 섭섭한데…….”
“그게 아니라, 일반적인 경지로 나누어 따지기에는 제가 좀 특이 케이스라서요.”
“특이 케이스…? 무슨 뜻이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같은 경지라도, 내 머릿속에는 지금의 마법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고대의 것들이 상당수 들어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이후의 일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그런 귀찮은 일은 절대로 사양이지.’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재차 물어온다.
“그럼, 써클의 고리만 따졌을 때 지금 네 경지는?”
“그저 고리의 경지라면… 일곱 개에 간신히 발을 걸친 정도요?”
“…미친. 그러니까 열아홉에 7써클 유저(User)라는 거잖아?”
“말이 그렇게 되네요.”
참고로, 마탑의 3강이라는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7써클 마스터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
“시간도 죽일 겸, 저랑 대련 한 판 하시겠어요?”
“……!”
순간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셔댄다.
“그거… 무지하게 흥미는 생긴다만. 의도치 않게 여기 있는 이들에게 위력을 과시하는 모양새가 되겠는데?”
“오히려 저들도 잘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 유명한 마탑주의 실력을 직접 견식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그럼 더 안 좋은 것 아니냐? 우리 정보를 스스로 내보이는 셈이니까.”
“그렇다 한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절대적인 상대 앞에서는 큰 의미가 있을까요?”
“큭큭큭… 그놈의 자신감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
피식 웃음을 터뜨린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다만, 나중에 얻어맞고 네 스승에게 일러바치지나 말거라. 일단 싸움에 돌입하면, 친구 제자라고 봐줄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그거야말로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
같은 시각.
가스레인버는 제 방에서 조용히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곳은 다소 특이한 장소였다.
마을이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지만, 휴식을 취하러 그곳까지 들락거릴 틈은 없었다.
시국이 시국인데다, 언제 스란이 적으로 돌변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니까.
하여, 그 옛날 테라의 마법사들은 자체적으로 장벽을 개조했다.
높이 십여 미터.
길이는 수백 미터에 육박하는 이곳의 장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요새였다.
벽 내부에 각종 시설들을 갖추고 출입문을 뚫어, 장벽과 거주지를 겸한 철옹의 아지트로 변모한 것이다.
가스레인버의 방은 그 안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언제든 장벽 위에 뛰어올라 이변을 감지할 수 있도록.
“대장님. 공작 각하께서 지금 막 본거지에서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음… 도착까지 예상 소요 시간은?”
“이르면 내일 오후에라도 도착하실 듯합니다.”
“…그렇군.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예를 취한 부관이 곧장 방을 나섰다.
그런 그를 일별한 가스레인버가 재차 골똘히 상념에 빠져들었다.
솔직히 그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달갑지 않았다.
정확히는, 원군이랍시고 이곳에 온 예의 불청객들이.
애당초 그들을 받아들이는 방식부터가 잘못되었다.
어찌 도와주러 왔다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무엇보다, 그 상대가 문제였다.
자유 연합은 별론으로 하고.
마탑이 제국의 수족이라는 사실은, 이제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얘기였다.
한데, 그 정점에 있는 마탑주들이 원군으로 이곳에 방문했단다.
구린내를 넘어 썩은 내가 진동을 한다.
“…공작 각하께서 너무 무르신 게야. 한 번 실수를 하셨다고 의기소침해 계신 것일까?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나서서 결단을 내려야겠지.”
가스레인버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대, 대장님!”
열린 문틈으로 방금 나갔던 부관이 다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게… 잠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를 말하라.”
“감시 대상인 둘이 막무가내로 초소를 나서려 하고 있습니다. 연유를 물어도, 지루해서 몸풀이나 해야겠다는 얘기를 해대는데… 전혀 말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몸풀이…?”
직후, 가스레인버가 으득 이를 갈았다.
저들은 대체 이곳을 무어라 생각하는 건가?
이런 전시상황에서 몸풀이?
그딴 마음가짐으로 원군이라고?
“…거기가 어디냐?”
사납게 눈을 빛낸 가스레인버가 씹어 내뱉듯 중얼거렸다.
***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을 헤치며, 아타락시아 페르잔은 기어이 초소 밖으로 나왔다.
금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건지,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기가 마지노선인 것 같은데?”
“충분하지 않을까요? 초소랑 너무 가까워서 조금 우려스럽기는 한데… 그거야 뭐, 저희가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겠죠.”
“큭큭… 그래. 우리는 이미 충분히 경고했으니까.”
피식 웃음을 터뜨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멀지 않은 곳에서 기사 하나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당장 다시 들어가시오! 당신들은 호송 대상자란 말이오!”
“우리가 죄인도 아니고, 몸이나 풀겠다니까 거참.”
물론, 아타락시아 페르잔은 사내의 외침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너나 나나 상성이야 딱히 의미는 없을 테고. 특별히 시험하고 싶은 주력이라도 있느냐?”
“최근에 조금 깨달음이 있어서요. 혹, 전투에도 조예가 있으신가요?”
“전투?”
멍하니 반문하던 그가 씨익 미소 지었다.
“단언컨대, 그 전투의 마법사 로마르니도 내게는 상대가 안 될 것이다.”
“당사자가 없다고 함부로 말씀하시네요.”
“뭐, 사실이니까.”
찰나, 주변을 둘러본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이들이 보는 앞에서 전투 마법이라… 퍽이나 재미있겠구만.”
사뭇 기대가 되었다.
저 오만한 기사들 앞에서, 저들보다 뛰어난 몸놀림을 선보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데…
흠칫.
정작 그가 신경 써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
“……!”
순간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잘게 몸을 떨었다.
한순간, 정면에서 그조차 놀랄 만한 기세가 뿜어졌기에.
역시나 진원지는 녀석이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벌린 녀석이, 어느새 손안의 마력 창을 휘돌리고 있었다.
하여, 그도 곧장 마력 무구 하나를 생성해 냈다.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족히 그 신체의 네 배는 될 법한 초대형 할버드(Halberd)였다.
이건 꽤나…
아니, 전신의 솜털을 곤두세울 정도로 호승심을 자극한다.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