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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122화 (122/251)

122화. 대립(1)

마치 기나긴 통로를 지나온 듯, 이윽고 나는 기억의 바다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부르르.

그 아득한 여운을 느끼며 시선을 정면으로 뒀다.

어느새 내 앞에는 웬 분홍빛의 둥그런 구체가 두둥실 떠올라 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색욕의 권능이다.

“음…….”

절로 침음이 새어 나왔다.

내면의 식탐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색욕을 먹어치우라고.

저 힘 또한 나를 원하고 있다고.

그 권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나도 이미 봐서 안다.

우선 게이트가 필요 없는 전이(轉移) 능력.

마나석 대신 제물이라는 매개체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 대체자원을 구할 수만 있다면, 실로 사기적인 권능이 아닐 수 없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적이 예상치 못한 뒤를 노릴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 외에 어떤 능력이 더 있는지는 나조차 알 길이 없었다.

서큐버는 권능의 힘을 채 사용하기도 전에 내 손에 소멸되었으니까.

다만 그녀의 본체는 꽤나 께름칙했다.

칠마왕의 하나이자, 색욕의 주인인 마왕 아스모데우스.

그는 배신과 간살, 중상모략, 권모술수 따위의 갖은 술수들로 그 자리에 오른, 진짜 마족이었다.

육마가의 혈족이기도 한 그는 수많은 일족들을 서슴없이 죽이고 색욕의 권능을 차지했다.

그렇다곤 해도 여기까지 와서 망설일 생각은 없었다.

이미 식탐까지 취한 마당이니까.

그저 께름칙하다는 이유로 이 힘을 포기하기에는 못내 아쉽다.

이건,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내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그 어떤 힘이라도 취하리라고.

그렇게 마음먹었으니까.

“그러니까, 잡는다.”

그제야 내 손이 천천히 전방의 구체로 뻗어갔다.

자아라도 가진 것인지 예의 구체가 때맞춰 부르르 떨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곤,

화아아아악!

이윽고, 내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두근!

심장이 거칠게 박동한다.

기존의 식탐이 지금 막 들어선 색욕을 감싸 안았다.

자연스레 주변으로 마기가 들끓어 오른다.

설령 이 힘의 끝이 파멸일지라도,

상관없다.

지금껏 나는, 단 한 번도 정도(正道)를 걷지 않았으니까.

끝을 틀든, 때려 부수든.

나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

한편.

“끄응…….”

전신을 아리는 고통 속에서 에이스가 정신을 차렸다.

그 앞에서 세논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나?”

“어떻게 된 일이긴. 큰소리만 뻥뻥 쳐대고, 이런 데서 꿀이나 빨고 계시는 일이지.”

“거, 예쁜 아가씨. 말을 해도 참…….”

“참은 얼어 뒤질. 어지간히 한심해야 욕이라도 나오지.”

“차라리 평소처럼 시원하게 욕이라도 박아주시지. 한데… 세타는?”

세논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던 에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뒤늦게 제자 걱정은 드시나 봐?”

“…뭐, 딱히 걱정된다기보다는…….”

“일단 그쪽 몸부터 신경 쓰셔. 응급조치는 해뒀지만, 당분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까. 너,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마기가 심장이나 뇌 같은 중요 장기에 침투했어 봐라.”

“구명(救命)에 감사드립니다. 평생 충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존경하옵는 대장님.”

“흥. 나야말로 묻겠는데,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세논이 천천히 옆쪽으로 옮겨 가며 물었다.

힐끗, 에이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웬 금발의 아름다운 미인이 그곳에 고이 뉘여져 있었다.

“분명 환상의 마탑주였던가? 확실히 몸매도 제법…….”

“맞는다?”

세논의 주먹 감자에 에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없었어. 나야 보시는 대로 그 흑색 사내한테 당한 거고… 세타는 오히려 나와 반대였지.”

“그러니까, 바람의 마탑주. 그 빌어먹을 자식을 세타가 죽인 게 사실이라는 뜻이지?”

“걔가 그래?”

“어. 근데 막상 와보니 흔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잖냐.”

“시체라도 보고 싶다는 뜻 같은데… 그럴 수밖에. 광풍에 온몸이 갈가리 찢겨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거든. 뭐, 주변을 뒤져 보면 조각 정도는 찾을 수 있을지도?”

우뚝.

순간 세논이 손을 멈췄다.

물론 찰나에 불과했다.

이내 다시 눈앞의 환자를 돌보는 데 열중했으니까.

“…정말로 사실이었군.”

“바람의 마탑주가 6써클 마스터라고 했던가?”

“아마도.”

“근데 그런 인간이, 우리 제자에게 쪽도 써보지 못하고 죽은 거고.”

“…….”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뿐이겠지?”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세논을 향해 에이스가 쐐기를 박는다.

“우리 제자가 무려 7써클이라는 어마어마한 반열에 들어섰다는 거.”

“…….”

“이 얼마나 대견한 일이야? 스승의 복수를 대신해 줬음은 물론, 장차 그 스승마저 뛰어넘을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이니.”

“…….”

“솔직히, 대장은 마탑에 복수 따위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잖아? 항상 연합을 최우선으로 뒀으니까. 혹여나 조직에 피해가 갈까, 혼자 쫄아선 속으로 삭이기만 했겠지. 안 봐도 뻔해.”

부상을 당한 와중에도 에이스는 능청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허나, 세논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우리 제자, 이제 신붓감도 줄을 서겠다. 그치? 부모가 없는 녀석이니, 스승이 그 역할도 대신해 줘야겠고.”

“…….”

“그 녀석, 조직이 완전히 자리 잡는 대로 내가 직접 데리고 다녀야겠어. 혹시나 이상한 여자한테 코라도 꿰이면 안 되니까.”

점차 인상이 찌푸려지던 세논이 그제야 반응했다.

“까불지 마라. 이런 상황에서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헛소리 아니고. 여자 보는 눈은 내가 정확하다는 건, 대장도 잘 알고 있잖아?”

“그게 아니라, 제자 덕 좀 보겠다고 제 입으로 떠벌리는 발정 난 수컷 같다만?”

“…아닌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내심 뜨끔한 에이스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물론,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세논이 아니었다.

벌떡.

한결 편안해진 에반젤린의 숨소리를 들으며 세논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찰싹!

“악!”

그 매운 손바닥이 곧장 에이스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아파! 나 환자라고!”

“환자 같은 소리하네. 그 사랑스러운 제자가 지금 위험하니까 얼른 일어나. 한시가 급하니까.”

“뭣…!? 그게 뭔 뜻이야?”

“아니다. 그냥 넌 여기서 얘나 잘 지키고 있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자, 잠깐…!”

에이스는 채 말을 마칠 수 없었다.

그리 말한 세논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으니까.

“…….”

직후,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에이스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움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

“윽…….”

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마침내 색욕의 죄악을 완전히 흡수했다.

당장 느껴지는 부작용은 없었다.

허나, 그걸 여유롭게 알아보고 있을 시간 또한 없었다.

이대로 곧장 국경지대까지 달려야 했으니까.

스팟!

속도와 체력을 상향시키는 보조 마법을 캐스팅하고.

때때로 단거리 텔레포트까지 이용해 가며, 나는 쉼 없이 목표한 방향으로 쏘아져 갔다.

탐욕의 디자이어.

내가 본 그는 다른 칠악들과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급한 마음에 일행을 먼저 보냈지만…

느낌상 초월의 마탑주가 홀로 그와 맞붙으면 열에 열, 필패(必敗)다.

“……!”

그렇게 대략 30분을 더 내달렸을 때였다.

점차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저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웬 어린아이가 그곳에 서 있었다.

“하아…….”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곳에 염려했던 사내는 없었으니까.

다만, 다른 의미로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진 듯했다.

“이 빌어먹을 곱등이 새끼들, 니들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는 아는 거냐!?”

“나는 위에서 내려진 명에만 따를 뿐이다. 초월의 마법사 아타락시아 페르잔, 환상의 마법사 에반젤린 페리시, 자유 연합주 세논 벤자민, 자유 부연합주 에이스 디 파르마, 마지막으로 자유 연합원 세타 쿤 이그니스까지. 이상 다섯은, 모습이 보이는 즉시 본거지로 호송하라는 명이다.”

“그러니까, 그딴 웃기지도 않는 명을 내린 게 누구냐고?”

전방의 기사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대답했다.

“인버스 공작 각하시다.”

“인버스? 그 멍청한 작자가 우리를 믿지 못해 의심을 한다, 이 말이냐?”

“…언행에 유의해라. 제아무리 손님이라도, 각하를 모욕하는 것은 묵과치 않을 것이니.”

“호오? 그 말인즉, 지금 나랑 해보겠다는 거냐?”

“원한다면.”

촤아앙!

예의 기사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한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그 어떤 기사보다 날카로운 예기가 절절히 느껴졌으니까.

‘…그러고 보니…….’

순간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현재 해방군 진영에는 마스터를 목전에 둔 기사가 있다고.

그는 인버스 공작의 최측근으로, 가깝게는 사촌지간이라고도 했다.

‘명실상부 왕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기사가 인버스 가문의 사람이라… 이러니 그의 입김이 강하지 않을 수가 없지.’

제아무리 절반의 귀족들을 이끌고 있다 하더라도, 구심점이 될 만한 존재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게 인버스 공작 하나라고 하면, 무게감이 상당히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가주 그 자신은 고작 5써클 마스터에 불과했으니까.

달리 마법 왕국이라고 불리는 테라에서, 그만한 경지로 뭇 귀족들의 존경심을 이끌어내기는 무리가 있었다.

“오냐. 해보자. 나도 기껏 도와주러 와서 호구 취급받고 있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잠깐만 기다려 주시지요.”

“……!”

그 순간, 주변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국경을 가르는 높다란 장벽 앞, 나무 한 그루 없는 국경지대의 대평야 한복판에서.

외형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아타락시아 페르잔 하나를, 기사단과 마법 군단 수 개 조가 우르르 둘러싸고 있었으니까.

“고, 곱등이 너…?”

“생각보다 빨리 왔죠?”

“그, 그런 게 아니라, 그 마녀는?”

“죽었습니다.”

“……!”

내 대답에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런 그를 일별하며, 나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세타 쿤 이그니스?”

이제 처음 보는 사람들도 대번에 나를 알아본다.

구태여 얼굴을 숨기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때부터.

내 본판은 알아보지 못할래야 그럴 수가 없는 외모였으니까.

“…괜히 휘말리지 말고 그 자리에 서 있거라. 지금부터 이 주제도 모르는 곱등이들을 짓밟아줄 생각이니까.”

“…할 수 있다면.”

중년의 기사가 자세를 바로 잡는다.

그 뒤의 기사들도 분분히 검을 그려 쥐었다.

대기는 이미 그들의 마나에 반응하여 요동치고 있었다.

허나, 나는 이제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다.

“잠깐, 잠깐만요. 어찌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시려 하십니까?”

“……?”

순간적으로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딱 그거였다.

‘누가 닭인데?’라고 되묻는 듯한.

“이런 일은 제가 나서는 게 딱 알맞지 않겠습니까?”

“크흠. 네 녀석은 환자가 아니더냐.”

“보시는 것처럼, 멀쩡한데요?”

싱긋 미소 지은 내가 어느새 사람들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거기 기사님.”

“…나를 불렀나?”

“네. 그 명이라는 걸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 해서요.”

“…….”

별 해괴한 놈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순순히 답했다.

“…너희 둘 포함, 나머지 셋까지 전원 본거지로 호송하라는 명을…….”

“즉, 저희가 순순히 따라가기만 한다면 아무런 일도 없을 거라는 뜻이지요?”

“…그 말대로다.”

“그렇게 할게요.”

“……!”

대번에 발광하려는 누군가를 대신해, 내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근데, 경이 직접 우리를 호송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그야 당연히 내가…….”

“에이. 인버스 공작님께서 직접 믿고 맡기신 국경지대인데, 그 책임자가 자리를 비우면 어쩌시려고요? 혹시나 기습이라도 받으면, 그 후속 조치는 누가 하고요?”

“……!”

“애당초 이곳에 병력을 뺄 여유가 있던가요? 우리 쪽 전력이면, 최소 수천은 빼셔야 호송이 될 것 같은데. 아닌가요, 가스레인버 경?”

예의 중년 기사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네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느냐?”

“알다마다요. 전 테라 왕국 출신이니까요.”

“…….”

상대는 그 이상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속으로는 상당히 고심하고 있을 테지.

내 말마따나 직접 가자니 비어버리는 국경지대가 신경 쓰이고.

부하들만 보내자니 이쪽의 전력이 심히 걱정될 것이니까.

저런 완벽을 추구하는 기사들이 임무의 실패를 염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결국, 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거다.

“지들이 감히 누구더러 오라 가라에요? 아쉬운 게 있으면, 직접 와서 말할 것이지.”

“……!”

점차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내 속닥거림에, 그제야 의중을 완전히 파악한 것이다.

“너,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언제까지 저희가 끌려 다닐 필요는 없잖아요? 대마법사 자존심이 있지.”

“…푸핫. 푸하하하하하하하!”

직후,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 내막을 알 길이 없는 가스레인버는 인상만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네가 최고다, 세타 쿤 이그니스.”

더하여 그날은,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처음으로 나를 곱등이가 아닌 이름으로 부른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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