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마녀(1)
한편.
세타가 떠나간 자리에서도 전투는 한창이었다.
꽈르르릉!
“빌어먹을…!”
마치 천둥이 치는 듯.
고막을 울리는 뇌전음에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발바닥을 들어 ‘쿵!’ 하고 내리찍자.
쩌저적!
순식간에 지면이 층층이 솟아올랐다.
거칠게 뻗어오던 뇌전의 줄기는 그 한수로 소멸되었다.
허나, 아직 주변에는 웬 늑대 떼와 골렘(Golem)들이 빈틈없이 포위망을 이룬 채였다.
“벌써 지친 건 아니겠지? 아까는 혼자서 이 인분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더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 얼빠 곱등이랑 삐죽 머리 곱등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젠장.”
세논이 어깨를 으쓱했다.
세간에는 소환의 마탑주와 뇌전의 마탑주로 유명한 두 남녀가 전방에 유유자적하게 서 있다.
허나, 정작 가장 큰 문제는 그 둘이 아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언제나 기분이 참 좋다니깐?”
“저 얄미운 년.”
하늘 위.
두 사람이 반격을 할라치면, 그때마다 기습을 감행하는 저 마녀.
분명 칠악의 서큐버라고 했던가?
예의 소환수들을 경계하며 세논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안하다. 고작 이 대 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나조차 예상치 못했다.”
“난 그보다, 그 에반젤린인가 하는 아가씨가 더 걱정이네. 그쪽은 혼자서 둘을 상대하고 있잖아.”
“아가씨… 라고 해야 하나? 물론 미혼이기는 하지만…….”
“엉?”
“그래 보여도 걔, 마흔은 훌쩍 넘었거든. 비교적 최근에 마탑주가 되었으니 넌 모를 수도 있겠군.”
“…그것 참,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네.”
세논과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와장창!
“……!”
그 순간, 무언가 산산이 부수어지는 듯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쿨럭!”
지금 막,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튕겨 나온 한 인영이 피를 토했다.
신체 곳곳에 하얀 서리가 내려 앉아 있는 에반젤린이었다.
사뿐.
그에 비해 함께 사라졌던 다른 두 마탑주는 비교적 멀쩡했다.
인근에 착지한 그들에게서, 눈에 보이는 큰 상처는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세논이 찰싹 제 입을 때렸다.
곤란했다.
원래 계획은 단숨에 이들을 처리하고 일행을 도우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스승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은가?
“세타한테는 면목 없게 됐네. 어째 갈수록 태산이냐. 이러면 다시 이 대 오잖아.”
“아니요. 삼 대 오입니다.”
“……?”
세논의 얼굴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여기, 저까지 포함해서요.”
“너…?”
진짜 말에 어떤 특별한 힘이라도 있는 걸까?
저도 모르게 픽- 하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멀리 마을 어귀에서 상처 하나 없는 그녀의 제자가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
‘늦지는 않았군.’
걸음을 재촉하던 내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스 스승님은 간단한 응급조치를 한 후, 따로 안전한 곳에 눕혀두고 왔다.
물론 끝내 따라오시겠다는 걸 수면 마법으로 간신히 잠재운 뒤였다.
그만큼 상처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검흔은 옅었지만, 내부를 파고드는 마기가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그 사이한 기운은 생기를 좀 먹으려는 특성이 있었으니까.
다만…
“음…….”
눈앞의 상황으로 보아, 골칫거리는 그게 끝이 아닌 듯했지만.
“어째 상황이 더 나빠진 것 같네요.”
“…끙, 이것 참 부끄럽구먼.”
“해명은 나중에 들을게요. 스승님과 초월의 마탑주님이 둘씩. 제가 저 위의 칠악을 맡으면 되겠죠?”
“…그것도 빡세긴 한데. 넌 괜찮겠냐?”
“참고로, 저는 지금 막 바람의 마탑주를 제거하고 오는 길입니다.”
“……!”
순간 아타락시아 페르잔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강상태에서 무얼 하나 빤히 지켜보던 다른 마탑주들도 멍하니 입을 벌렸다.
“방금 저 꼬맹이가 뭐라고 지껄인 거냐?”
“들은 대로일걸? 아이젠버그가 저기 잘생긴 애한테 당했다네~”
“레이나! 어째 넌 제대로 듣고도 즐거워 보이냐? 골렘들을 소환하더니, 머리까지 돌처럼 굳은 건 아니겠지?”
“뭘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래? 당연히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런 거치곤 아이젠버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이윽고 네 마탑주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그 답을 내어줄 존재가, 달리 또 있었으니까.
“그쪽의 동료는 어디로 갔지? 그 흑색의 사내 말이야.”
허공에서 서큐버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매만졌다.
“그게… 먼저 복귀한 것 같은데?”
“뭐…?”
“아마 쟤 말이 사실일 거야. 8월의 검사는 중상(重傷). 바람의 마법사는 전사(戰死). 방금 그렇게 전달받았거든.”
“……!”
“그리고, 나도 일단은 발을 빼라고 하네?”
“뭔 씹…!”
성질 급한 뇌전의 마법사, 엑스토나 제우스가 발끈했다.
접촉하지 않고 의지를 전할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가령 마법사들에게 메시지 전달 마법 따위가 있는 것처럼.
칠악들 사이에도 특별한 의지 전이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어느새 마탑주들의 얼굴 위에 장난스러움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곤 저들끼리 옥신각신해 대기 시작한다.
왜 그 꼴이 되도록 방치했느니.
동료는 또 어디로 사라지고, 저놈만 왔냐느니.
역시 칠악은 믿을 게 못 된다느니…….
그들 사이의 반감은 점차 극에 달했다.
물론,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당장 똑바로 대답해라! 사안에 따라, 지금부터 네년을 적으로 간주할 생각이니까!”
“음~ 곤란하네.”
서큐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해명을 늘어놓는다.
“나라고 이 상황이 달갑겠어? 무엇보다, 내 목적은 저 녀석을 죽이고 럼프의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했잖아.”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느냐!?”
“…대공이 절대 저 녀석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데,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가볍게 투덜거린 그녀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난 명에 따라야 하거든? 미안하지만, 이대로 돌아가 머리 좀 식혀들 줘.”
“……!”
쩌어어어억!
순간, 각 마탑주들의 앞에 새까만 아가리가 생성되었다.
당황하는 그들의 얼굴이 시야로 한가득 들어왔다.
물론, 나는 저것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제물을 바쳐 대상을 지정해 둔 이상, 색욕의 권능은 언제 어느 때나 권속의 의지에 따라 발현된다.
미리 설정해 둔 좌표로, 대상들을 단숨에 이동시키는 것이다.
“자, 잠깐…!”
꿀-꺽!
엑스토나 제우스의 목소리가 의미 없이 허공을 갈랐다.
예의 새까만 아가리는, 그만큼이나 순식간에 마탑주들을 집어삼켰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네?”
태반의 사람들이 사라진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윽고 제 앞에도 전이의 권능을 생성해 낸 서큐버가 싱긋 미소 지었다.
“대체 대공에게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수작?”
“내가 본 대공은, 너한테 훨씬 더 깊은 살의를 느끼고 있었거든. 이상하잖아? 그런 사내가 갑작스레 먹잇감을 살려두지를 않나, 이 지경으로 일을 망쳐 놓질 않나.”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달리 이유가 있어 나를 놓아준 것이라는 뜻인가?
“표정을 보니, 너도 딱히 짚이는 게 없나 봐?”
“……!”
“어쩔 수 없지.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제 할 말만 마친 서큐버가 이내 아가리 안으로 몸을 던지려 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허나, 결과적으로 그녀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이번에는 나도 그냥 두고 보지 않았으니까.
콰드득!
“……?”
갑작스레 예의 새까만 공간이 뒤틀리더니.
‘뱉!’ 하는 소리와 동시에, 마치 자석처럼 아가리가 서큐버를 밀어냈다.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이 곧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뭐긴 뭐겠어. 권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는, 여기서 너 하나가 아니라는 거지.”
“……!”
내 전신으로 새까만 기운이 뭉클거리며 피어올랐다.
힐끗, 내 쪽을 내려다본 서큐버가 그제야 씨익 미소 짓는다.
“재미있네?”
판은 만들어졌다.
“두 분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에이스 스승님이 중상이에요. 치료가 급한 상황입니다.”
“……!”
“일단 급한 마음에 두고 왔지만… 그냥 방치하면 좋지 않을 거예요.”
직후,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돌봐야 할 사람은 또 있어. 저기.”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 일견 보기에도 상태가 심상치 않은 에반젤린이 쓰러져 있었다.
“하면, 내가 그 둘을 맡지. 빛의 마나에는 기본적으로 치유력도 내포되어 있으니까.”
“그럼 내가 곱등이를 도와 저 마녀를…….”
그래서야 스승님이 둘을 맡아주는 의미가 없었다.
잽싸게 끼어든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초월의 마탑주님이 해주셔야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엉…?”
“저희를 쫓던 그 흑색의 사내는, 이대로 국경지대를 통과할 가능성이 커요. 거기서 무슨 짓을 할지 무척이나 걱정이 되거든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존재니, 화풀이로 일대를 쓸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고작 지 혼자 뭘 할 수 있다고? 차라리 이쪽부터 처리하고…….”
“아니요. 그 혼자서, 능히 병사 수 만 분은 할 수 있는 존재에요. 직접 보셨잖아요?”
“…음…….”
“지금 바로 뒤쫓아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반문한다.
“너 혼자… 괜찮겠냐?”
“물론이죠. 전 이미 마탑주도 꺾은 사내잖아요?”
“난 아직 인정할 수 없다. 직접 확인하지 못했으니.”
“초월의 마탑주님이 인정하지 않으셔도, 전 여기서 칠악과 마탑주를 하나씩 잡을 겁니다. 이 기회에 더욱더 유명해질 생각이거든요. 실비아는 야금야금 적의 전력을 깎아낼 계획까지 세우고 있으니… 거기에 딱 부합하는 전략이겠죠?”
그제야 찌푸려진 상대의 미간이 평평하게 펴진다.
“…시건방진 곱등이 놈.”
***
10분?
아니, 고작해야 5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전장의 상황이 급변했다.
그 넓은 평야에 사람이라고는 이제 단 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훗. 후후후후후.”
그게 못내 즐거워, 서큐버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저 아이는 그녀와 일대일로 싸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의중이야 어떻든, 서큐버는 무척이나 기꺼웠다.
‘이건 불가항력이니까.’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복수심 한편으로 묘한 열기가 치솟았다.
언제 또 이런 기분을 느껴봤던가.
‘…아. 기억났다.’
그건, 서큐버가 처음으로 ‘살인’이라는 걸 저질렀을 때였다.
문득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직 마족과 계약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었던 시절.
서큐버는 제법 명망 있는 고위 귀족가의 시녀였다.
미색이 출중하고, 부친 또한 기사로서 준남작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때다.
물론, 그 시절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썩은 건 매한가지였지만.
얼굴이 조금 예쁘다 싶으면, 주변에서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버지라는 울타리가 있었기에 아래 시종들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높은, 소위 진짜 귀족들은 또 달랐다.
은근히 그녀 앞에서 음담패설을 흘리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그 뒤틀린 욕망으로 인해, 결국 큰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
자정 이후, 당연하게도 저택의 전등들은 모두 소등해야 했다.
그 기다란 벽면을 따라 이어진 불들을 끄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일이었다.
하여, 그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맡은 일을 충실히 행하고 있었는데…
‘…읍!’
이윽고 마지막 전등을 꺼뜨렸을 때였다.
갑작스레 그 앞의 방문이 열리며 우악스러운 손길이 뻗어 나왔다.
밀폐된 방 안은 이미 알 수 없는 연기로 가득했다.
애써 버티며 정신을 바짝 차리려 했지만…
결국, 의식의 끈을 놓고 말았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침대 위에 나체가 된 상태하며.
바닥을 나뒹구는 무수한 술병들.
더하여,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내음까지.
그 곁에는 그녀가 모시던 귀족의 망나니 아들놈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푸욱!
“…꺽!”
탁상 위에 놓여 있던 촛불을 거꾸로 쥐고, 있는 힘껏 놈의 목을 찔렀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꿀럭꿀럭 피를 토해내며 죽어가던 놈의 얼굴이.
첫 살인의 충격?
전혀.
그때의 쓰레기를 치우던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다만, 여기에는 숨겨진 뒷이야기가 있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네.”
이윽고 상념에서 벗어난 서큐버가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한다.
“너, 이길 자신은 있는 거니?”
“그거야 붙어보면 알겠지.”
그 시원스런 대답에 서큐버의 미소가 한층 짙어진다.
“혹시나 어린애라서 내가 손속에 사정을 둘 거란 기대는 하지 마. 참고로 나는, 상대가 갓난아기라도 웃으면서 목을 졸라 죽일 수 있는 마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