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상대는 마탑주(1)
내 맹랑한 발언 이후.
나는 곧장 사람 한 명을 소개받았다.
기껏해야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상당히 젊은 여자였다.
허리까지 기른 금발 머리에, 특유의 아우라까지.
이걸 뭐라고 할까…
그래.
고급스럽게 생겼다.
먹는 것도 최고급 스테이크가 아니면 입에도 안 대고, 볼일도 안 볼 것 같은.
살짝 눈꼬리가 올라간 여우상이었는데, 그마저도 분위기와 무척이나 어울렸다.
“그러니까 이분이…?”
“환상의 마법사 에반젤린 패리시야. 실력만 따지면, 마탑 내에서도 나나 잭 다음이지. 물론 논외로 치는 블레어 마탑주는 제외하고.”
“그럼 나머지 두 분은요?”
“잭은 전신에 화상을 입었어. 당장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상당 기간 요양이 필요해. 방치하면 생명에도 지장이 있을 정도로 상처가 심각하니까.”
“…다른 한 분은 전투의 마탑주님인 거죠?”
“그래. 로마르니는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 의식 자체가 불투명하고.”
“…….”
무려 마탑의 3강이라는, 파괴의 마법사가 거동 불능이라고 한다.
근접전으로 기사조차 능가한다는 로마르니 씨는 사실상 혼수상태.
대체 어떤 싸움이 있었기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소개는 이만하면 됐어요, 페르잔. 그보다 저들이 말하는 국경지대란, 스란과의 접경지를 말하는 거겠죠?”
“맞아.”
“이런 비상시국에도 스란이 마탑에 길을 내어준다 함은… 역시 그들도 한통속이라고 봐야겠네요.”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지.”
고개를 주억인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힐끗 내 쪽을 돌아봤다.
“그래서, 자신은 있는 게냐?”
“싸워봐야 알겠지만… 일단은요.”
“상대가 넷이면 최소로 잡아도 각자 일인분은 해야 한다. 뭐, 상황 봐서 제일 약한 녀석을 붙여줄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마탑주야. 너 같은 열아홉 먹은 어린 곱등이 따위가 아니라.”
“그러니까, 확실한 대답을 원하시는 거죠?”
“…….”
“걱정하지 마세요. 자신 있으니까.”
그 순간, 잠자코 듣고 있던 에반젤린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렇게 자신하다가 죽는 놈 여럿 봤는데.”
“…….”
“아이야. 네게는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아. 솔직히 지금이라도 페르잔이 생각을 바꿔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니까.”
“…….”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마. 혹여라도 네가 위험해져도, 도와줄 여유는 없으니까.”
“네, 노력할게요. 그럴 일이 없도록.”
허나, 그녀는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페르잔. 당신과 빛의 마녀가 셋을 맡아줘요. 만약 상대가 다섯이라면… 내가 둘은 어떻게든 처리해 볼 테니까.”
“왜 자꾸 그리 삐딱선을 타냐? 곱등이 상처받게.”
“지극히 현실적인 거예요. 이건 전쟁이니까.”
에반젤린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한차례 머리를 긁적인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어깨를 으쓱한다.
“실력이라면 너도 이미 봤잖아? 만약 마법 대전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았다면, 올해 우승자는 분명 이 녀석이었을걸?”
“한낱 여흥에 불과한 대전과 목숨을 건 전쟁은, 그 마음가짐부터 다른 법이에요. 하물며 애송이들이나 참가하는 그런 마법 대전 따위… 할 말은 많지만 더 이상 하지 않겠어요.”
“…쩝.”
아무래도 그녀는 내 참전이 끝내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작았던 불만의 불씨는 점차 커져만 갔다.
“페르잔. 그거 아세요? 여기서 우리가 지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어요.”
“…알지.”
“마탑은 완전히 저들의 손에 넘어가고, 결국 제국은 대륙을 정복하겠죠. 이후의 삶은 어떨 것 같나요?”
“…….”
“난 알아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얼마나 악취를 풍기는지. 말이 통일 제국이지, 높은 확률로 다른 왕국들은 사실상 식민지화 될 거예요. 지나온 역사가 그리 말해주죠. 굴복시킨 나라를 노예로 부리는 건, 권력자들의 공통된 행동이었으니까요.”
“하아…….”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좋아. 결정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이 아이는 이대로 두고 가는 걸로…….”
“뭔 소리야? 그 반대인데. 지금 바로 움직인다. 낭비할 시간은 조금도 없는 듯하니까.”
“……!”
이 의외의 대답에 에반젤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자, 잠깐만요. 전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는데요?”
“뭐 어쩌라고. 새파랗게 어린 곱등이니까, 체력이라면 남아돌잖아?”
“아니, 그래도 하루 정도는 쉬게 해주시는 게…….”
“시끄러. 저들이 예고한 시간이 이틀 뒤니까, 지금부터 준비해서 출발해야지. 곧장 가서 네 스승에게도 알려주거라.”
“…….”
내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애당초 엄살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까 환영회라도 따라가는 건데…….
***
같은 시각.
마침내 복귀한 이들을 위해 연회장 내에서는 조촐한 환영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규모는 무척이나 작았다.
기껏해야 복귀자들과 그 지인들이 참석해 야식을 즐기는 정도?
그 한쪽 구석에서, 실비아는 조부와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막 자이툰 왕국에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이렇게 되었네요.”
“아무래도 세타라는 그 아이가 자이툰과 어떤 연이 있는 모양이더구나. 외부 전파도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이제 대부분의 나라가 제국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네요. 일단 말하는 이가 자이툰 왕국이니 믿는 거겠죠?”
“그것도 있지만, 아마 다른 왕국들도 어느 정도 의심은 하고 있던 것 같다. 요 며칠, 탑으로 관전을 떠났던 인사들과 대부분 연락이 끊겼으니…….”
“그럼, 구태여 우리가 나서지 않더라도 조만간 연합 전선이 구축되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저희도 함께할 수는 없겠죠?”
“힘들게다. 우리야 테라의 정통성이 이쪽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힘의 논리야.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면, 힘부터 키워야지.”
“네. 그러니 최우선적으로 반란군부터 때려눕혀야지요. 아예 그들과 제국 사이의 관계를, 다른 나라에도 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증거가 없지. 그런 걸 남길 위인들도 아니고.”
“판을 새롭게 짜겠어요. 자유 연합에 마탑주들까지. 이만한 전력의 증가라면, 어찌 상황을 뒤집어볼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생각해 둔 바가 있느냐?”
잠시 턱을 괸 채 고민하던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은 선방 필승이라고 하죠. 일단 강 건너 군막들부터 싹 쓸어버리죠.”
“굳이 이 요새를 버리고 우리가 선공을 감행한다고?”
“바로 그거예요.”
“…응?”
“모두가 그리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허를 찌르기에는 최적의 상황이 아닐까 해요.”
“호오…….”
실비아의 조부인 제페르가 나직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는 게릴라전을 벌일 작정이었다.
정면승부가 아니라, 철저하게 치고 빠지는 전력 깎기 전략으로.
“별동대를 꾸리죠. 별동대장은 그 변태… 가 아니라, 에이스 디 파르마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좋군, 좋아. 식충이들을 그냥 놀려 두지는 않겠다는 뜻이렷다? 그 여우같은 인버스 가주도 손뼉을 치며 좋아하겠어.”
“네. 거기에 세타 쿤 이그니스가 함께한다면, 아마 작전을 성공시킬 확률을 대폭 늘릴 수 있을 거예요.”
멈칫.
순간 움직임을 멈춘 제페르가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했던 말들은 모두 사실이냐?”
“네?”
“그 녀석이 6써클이라는 얘기 말이다.”
“확실해요.”
“…고작 그 나이에 부탑주 급이라, 허참. 세상사 일은 알다가도 모른다더니. 하기야 제노스 그 괴물 같은 놈을 보면 아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만…….”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앞으로 몇 년 만 지나도 마탑주까지 넘볼 수 있는 천재예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사람 보는 눈은 예전부터 정확하지 않았더냐. 아무튼, 반드시 붙잡아야 할 인재라는 건 분명하구나.”
직후, 제페르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마침 썩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하면 네가 붙잡는 건 어떠냐?”
“…네?”
“우리 사람으로 끌어들이는 것. 혈육으로 옭아매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지 않겠느냐? 슬슬 너도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이기도 하고.”
“하, 할아버지. 이 와중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더군다나 걔는…….”
“왜, 평민이라서 마음에 걸리느냐? 나라가 다 무너져 가는 마당에, 그따위 신분이야 무에 상관이더냐. 오히려 잘됐지. 그만한 실력이라면 신분은 얼마든지 높일 수 있을 테니까. 평민이니 데릴사위로 받아들이기도 쉽겠고.”
“데, 데릴사위…….”
“왜, 싫은 게냐?”
“좋고 싫고를 떠나서, 저는 아직 혼인을 할 생각이 전혀 없…….”
실비아는 채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시, 실비아 님!”
갑작스레 열린 연회장 문틈으로 한 인영이 날래게 뛰어들었기에.
물론 실비아도 잘 아는 이였다.
새로운 인사들에게도 수발을 들어줄 이가 필요할 테니, 그녀가 특별히 엄선하여 선별한 시종이었다.
“무슨 일이죠?”
“저, 초월의 마탑주님이 이런 편지를…….”
“……!”
실비아가 빠르게 편지를 건네받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볼일이 있어 잠시 국경지대에 다녀온다. 아, 자유 연합 사람들도 같이.>
와락!
실비아의 손안에서 나풀거리던 종잇장이 단번에 구겨졌다.
마치 지금 그녀의 얼굴처럼.
“이 인간들이 진짜…!”
***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실로 악독한 마탑주님들은, 정말로 자정이 되기 전에 길을 나섰다.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튼실한 말들까지 준비해 둔 상황이었다.
일행은 총 네 사람.
나와 세논 스승님.
그리고 다른 두 마탑주님들까지.
또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는 에이스 스승님에게는, 세논 스승님이 미리 연락을 취해뒀다고 한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영지를 둘러보겠다고 나가선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나 뭐라나.
덕분에 스승님이 무사하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페르잔. 강이 없는 반대쪽이 스란의 접경지대라 들었는데, 거기에는 해방군의 병력들도 있었죠?”
“그래. 스란이 제국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부터 그쪽의 경계도 대폭 강화했으니까.”
“…편지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보는 눈이 많아봐야 좋을 것 하나 없을 듯한데…….”
“그러니까 속전속결로 끝내야지.”
레이브 영지는 그리 넓지 않았다.
본거지인 영주성에서 꼬박 말을 타고 반나절만 달려도 국경에 이를 정도였으니까.
영주성이 레이브령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지 어디든 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는 의미다.
그리고…
“…잠깐.”
어느새 동이 완전히 튼 아침.
‘그 일’은 국경지대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관문인, 이름 모를 마을 부근에서 터졌다.
다 합쳐 봐야 백 가구나 간신히 넘을 듯한 소규모 촌락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갑작스레 선두에서 말을 타고 달리던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말을 멈춰 세웠다.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르던 일행들도 고삐를 틀어쥐었다.
“페르. 갑자기 왜 그러는데?”
“…저 마을 말이야.”
“마을?”
“지금쯤이면 아침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깨어날 시간인데.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예의 마을에서는 그 흔한 굴뚝의 연기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함정 같다는 뜻이야?”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거야말로 이상한데. 아직 목적지에는 도착하지도 않았잖아. 누가 뭐라고 해도, 여긴 레이브 영지령 내에 위치한 마을인데. 국경지대를 지키는 병력들이 뚫리지 않은 이상에야…….”
“직접 확인해 보면 알겠지. 마나 스캔을 시전하겠다.”
직후, 아타락시아 페르잔이 조용히 써클을 휘돌렸다.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든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괜히 힘 뺄 필요 없어.”
“……!”
그리 멀지 않은 거리.
부지불식간, 하늘 위에서 인영 하나가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한데, 그 정체가 실로 경악스러웠다.
내게도 무척이나 익숙한 얼굴이었으니까.
“일전에는 제법 신세를 졌지?”
예의 육감적인 몸매를 소유한 여인이, 나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칠악…?”
“술래잡기에 이어 숨바꼭질까지. 진짜 온갖 고생은 다 했다니까? 나, 정말로 이제는 그만하고 싶거든?”
이상했다.
저 마녀를, 국경지대에서 통과시켜 줄 리가 없었다.
하면 몰래 숨어들었다는 말인데, 그건 그거대로 의문이었다.
“…잠깐.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혼자인 건가?”
“응? 아, 저번에는 혼자였는데, 이번에는 아니야.”
“일행까지 있다고? 대체 어떻게…….”
내 반문에 서큐버가 양 어깨를 으쓱했다.
“내 고유 능력이지. 몇 가지 조건만 갖추면, 게이트 없이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거든.”
“조건…?”
“궁금해? 듣는 걸 딱히 추천하지는 않는데…….”
순간 서큐버가 새빨갛게 미소 지었다.
“신세를 졌으니 알려줘야지. 제물이야.”
“무슨…….”
“가령 내가 모시는 마왕, 아스모데우스에게 살아 있는 인간의 심장을 바친다던가?”
“……!”
“물론 가성비가 썩 좋지는 않아. 심장은 산 채로 최소 100개는 끄집어내야 하지, 고작해야 일회성이지. 한 번은 반드시 갔던 곳이어야 하고, 대규모 인원을 옮기는 건 또 무리거든. 고작 열 안쪽의 소수 정도?”
“…….”
“아무튼 일전의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지원군을 좀 데리고 와봤어.”
그 말에 맞춰 마을 쪽에서 인영들이 걸어 나왔다.
서큐버를 제외하고도 총 다섯이나 되었다.
한데, 그 면면이 가히 경악스러웠다.
넷이야 이미 예상했던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
나머지 하나는, 이곳의 누구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인물이니까.
“오랜만이군.”
“당신은…….”
서큐버의 뒤, 네 명의 마탑주들 사이로.
한 쌍의 검을 그려 쥔 사내가 조용히 자리해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틀림없었다.
그는…
“정식으로 소개하지. 칠악의 대공을 맡고 있는, 디자이어라고 한다.”
학장 할아버지의 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