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테라 해방군(6)
달빛이 쏟아지는 평지를 우리는 걷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선두의 실비아가 말했다.
예상대로 어둠과 잘 융화되는 새까만 경갑옷을 착용한 이들 또한 세드릭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별일 없었냐?”
“똑같지 뭐. 매일같이 싸우고, 상처 입고, 가끔은 사망자가 나오기도 하고…….”
“…많이 죽었어?”
“별로. 어차피 강물이 어는 한겨울이 오기 전까진, 의미 없는 신경전의 연속이니까.”
“신경전치고는 규모가 크니까 하는 말이지.”
그걸로 실비아와 유리나의 짧은 해후 인사가 끝났다.
직후, 이번에는 루나가 걸음을 빨리하며 물었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나?”
“예를 들어서?”
“무엇이든 좋다.”
“가령, ‘인버스’ 가문의 동태라던가?”
움찔.
순간 루나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역시 루나는 알기 쉽다니까?”
“…아니다.”
“뭐가 아닌데?”
“방금 네가 얘기한 그런 걸 물으려던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랬어?”
“…진짜 아니다.”
‘훗’ 코웃음을 터뜨린 실비아가 가볍게 양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내 기준으로 무척이나 얄미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만, 그보다 더 큰 특이사항이 있기는 한데.”
“더 큰 특이사항…?”
“근데 그 얘긴, 오히려 내가 먼저 묻고 싶은데 말이지.”
그제야 실비아의 두 은안이 내게로 향했다.
“세타 쿤 이그니스.”
“어?”
“마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이야 워낙 많아서, 이런 곳에서 얘기하기에는 좀…….”
“대강은 들어서 알아. 아무튼, 지금 해방군의 진영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찾아와 있어.”
“뭐!? 진짜?”
“그래. 개중에는 무려 마탑주들도 포함되어 있지. 해서, 자세한 연유를 알고 싶은데… 그들은 자유 연합주님하고만 대화를 나누려고 하거든?”
자연스레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마도 그 마탑주들이란, 조직에서 배신당한 비(非) 제국 출신 사람들일 것이다.
이미 한 번 뒤통수를 맞은 이들이니 누군가를 쉽게 믿는 건 힘들겠지.
그래서 찾은 것이 스승님이라면…….
“…초월의 마법사! 그분이 살아서 오신 거구나?”
“그 사람뿐이겠어? 마탑주만 무려 네 사람이야. 깜짝 놀랐다니까? 분명 우리 사정을 뻔히 알 텐데, 다른 곳도 아니고 다 무너져 가는 이곳을 찾았으니…….”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우뚝.
갑작스레 실비아가 걸음을 멈췄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강 하류 부근이었다.
한데 몇몇 기사들이 신속하게 주변의 자갈들을 뒤집어 놓자,
우우웅!
순식간에 자갈밭 아래로 새하얀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일단은 환영해. 테라로 돌아온 것을.”
“……!”
“아무래도 탑주들이 너랑도 관계있는 듯한데…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본다니까?”
파창!
순간, 마치 물감처럼 강물 위의 공간들이 흘러내렸다.
마나석을 이용해 만든 수준 높은 환영 마법진이었다.
이윽고 그곳에서 드러나는 것은,
“…배?”
열 명 정도는 거뜬히 탈 수 있을 듯한 나룻배 세 척이었다.
***
쏴아아아아!
배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강물을 가르며 맞부딪히는 밤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을 때렸다.
걱정했던 추격자들은 없었다.
실비아의 말을 빌리자면, 반란군들은 하루 두 번 치러지는 소모전 외에 움직임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리 대담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거겠지.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네?”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실비아가 말을 걸어왔다.
참고로, 세 척의 배는 적당히 인원을 나누어 승선했다.
나와 실비아가 같은 배를, 루나와 유리나가 한 배를 탔다.
나머지 하나는 기사들만 한가득이었다.
“뭐가?”
“반란군이 왜 이렇게까지 경계가 허술한지. 그걸 생각하고 있던 것 아닌가?”
“…….”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니까.
“독심술까지 배운 거냐?”
“그 정도야 척 보면 척이지. 내가 그 궁금증을 풀어줄까?”
“…나한테 뭐 원하는 것 있냐?”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딱히 원하는 거라기보단, 서로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주자는 거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미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은데.”
“뭐?”
“반란군 입장에서는 크게 무리를 할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저쪽의 대장이라면, 강물이 얼 때까지 적당히 관망하면서 내부 결속을 다지려고 할 거야. 빨리 달리는 말이, 낙마의 위험성도 훨씬 큰 법이니까.”
이미 비슷한 얘기를 한 바 있었기에 설명이 술술 흘러나왔다.
“…아~주 대단하시네. 지 혼자 잘나셨어.”
제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일까?
실비아의 입이 곧장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거래를 하고 싶다면 내가 진짜 궁금해 하는 부분을 가져오라는 거지.”
“진짜 궁금한 거?”
“인버스 가문.”
“…….”
잠시 침묵을 지키던 실비아가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루나한테 다 들은 것 아니었어?”
“자세히는 못 들었어. 그냥 경계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
“…그래?”
알만하다는 듯 실비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일단 루나 입장에서 인버스 가문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내부의 원수… 정도면 설명이 되려나?”
“그게 뭔 소리야?”
“론지에 후작님이 돌아가신 그 전투 말이야. 한사코 반대하던 귀족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작전을 강행했던 게 인버스 공작이었거든.”
“……!”
“명실상부 우리 해방군의 수뇌부이자 두뇌니까. 결국 사람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지. 애당초 그의 입김이 가장 크기도 하고. 지금 해방군의 전력은, 태반이 인버스 가문 쪽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그런 일이…….”
“그 전투로 실로 많은 아군이 목숨을 잃었어. 그렇다고 연전연패를 거듭했던 건 아니고… 분명 괄목할 만한 성과도 더러 있었지. 하지만, 그날 이후로 승세가 완전히 기울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거야.”
“…….”
“인버스 공작은 너무 독선적이야. 제 생각을 당연히 옳다고 믿고, 아랫사람들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지. 싫으면 따로 움직이자는 주의니까, 다른 귀족들도 섣불리 나설 수 없어. 여기서 해방군이 둘로 나누어지면, 그나마 실낱같은 승산마저 제로가 될 테니까.”
말을 잇던 실비아가 씁쓸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인버스 공작은 루나의 원수야. 아까는 반응이나 떠보려고 한 말이었지만… 걔 앞에서는 특히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럼 일부러…?”
“그래. 루나는 우리 해방군의 소중한 전력이니까.”
이제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사람이 바뀌어도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루나를 배려하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너… 원래 이런 캐릭터였냐?”
실비아는 현재 해방군 내에서도 꽤나 영향력 있는 작전 참모라고 들었다.
다시 말해, 당연하게도 분노에 눈이 먼 동료까지 ‘변수’로 계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루나가 그 자리에서 화를 냈다면,
실비아는 추후 인버스 가문과 함께해야 될 작전에서 루나를 우선적으로 배제할 것이다.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롄가?”
“어?”
“자유 연합주님한테 들었어. 넌 연합에 있는 그 누구보다 괴물이라고. 어쩌면, 마녀라 불리는 자신보다 더.”
“…….”
“그래서 묻고 싶어.”
이내 하늘에서 시선을 내린 실비아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네 정확한 경지가 어떻게 되는지.”
***
월강(越江)은 순식간이었다.
강치고 깊이는 제법이었지만, 그렇다고 폭이 넓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배를 탄 지 고작 십 분 만에 강 건너의 육지가 시야로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너, 아까 했던 말 진짜지?”
“지가 얘기해 달래놓고 자꾸 귀찮게 왜 이래? 정 못 믿겠으면 유리나한테 가서 물어보든가.”
“유리나…? 걔는 네 진짜 실력을 안다는 거야?”
“그간 동행한 시간이 있으니까. 그보다, 환영 인사치곤 인원이 너무 많은 것 아니야?”
“……?”
그제야 실비아가 강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잠시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그쪽을 살피던 그녀의 미간이 이내 와락 찌푸려졌다.
“저것들은 왜 또 저기 있는 거지?”
“뭐야, 일행 아니었어?”
“일행은 무슨. 아까 얘기했던 사람들이야.”
“뭔 사람들…….”
순간 머릿속을 번뜩이며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설마 인버스 가문?”
실비아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필이면…….
물론 나야 특별히 저쪽에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내막까지 다 들은 마당에 껄끄러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가만. 인버스 가문이라면, 혹시 그 녀석도 있는 건가?”
“그 녀석이라니?”
“내 룸메이트 말이야. 바이커라고, 그 녀석이라도 있으면 얘기가 좀 통할 것도 같은데…….”
“바이커 론 인버스…? 야, 그 녀석은…….”
실비아는 채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철썩!
한차례 강물이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윽고 배가 뭍에 도달했으니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백수십의 대인원이 곧장 이쪽으로 접근했다.
하나같이 로브를 착용한 그들은 해방군 진영의 마법사들이었다.
달리 마법 왕국이라 불리는 테라 출신답게, 기세가 사뭇 심상치 않았다.
그 선두에 녀석이 있었다.
“뭐야, 저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실로 오래간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쫙 찢어진 두 눈 하며 쥐를 연상케 하는 외모까지.
바이커 론 인버스.
세상 몇 안 되는, 내 친구라고 부를 만한 녀석.
한데,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실비아 스필 세드릭.”
정작 그 녀석은,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 그 누구보다 싸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뭐가?”
“사령관님의 명을 잊은 건가? 이제 개인의 독단적인 행동은 엄금한다고 말씀하셨을 텐데.”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마중 나가는 일도 그 독단적인 행동에 포함되는 건가 봐?”
“애초에 전제가 틀렸다. 누가 누굴 도와주겠다는 거지? 설마 이미 예전에 국외로 도망친, 그 볼품없는 낙제생을 두고 하는 말인가?”
“……!”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할 말은 많은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워낙 당황스러워서.
그런 나를 대신해 실비아가 나서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정이 그리 생각한다면, 얘는 겸사 겸사로 생각해도 무방할 텐데? 루나와 유리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소중한 동료니까.”
“…….”
“설마 상황이 급박하다고 동료까지 버리자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바이커 론 인버스.”
직후 바이커가 코웃음을 쳤다.
“물론 아니다. 다만, 세타 쿤 이그니스는 우리 쪽에서 데리고 가겠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최근 군 내에 외부인들이 너무 많이 유입되고 있다. 혹시 또 모르지 않나? 그들이 어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이곳을 찾은 건지도.”
“그러니까… 우릴 도와주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지금 의심하는 거네? 너, 생각보다 더한 쓰레기였구나?”
“너야말로 참모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쏟아버린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그러면서 바이커가 내 쪽을 바라봤다.
“순순히 우리를 따라오겠나? 세타 쿤 이그니스.”
“…그래 뭐, 나라고 여기서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내 대답에, 실비아가 대번에 눈으로 쌍심지를 켰다.
“야! 네가 저런 무례한 요구에 응할 필요는 없다니까?”
“…….”
이렇게까지 호응해 줄 줄은 몰랐는데.
한차례 미소 지어준 후, 다시 바이커를 돌아봤다.
“근데, 나도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는데?”
“……?”
“결국 네 말은 내가 원군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믿을 만은 한지. 일종의 품평이라도 해보겠다는 거잖아?”
“…그게 어쨌다는 거지?”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고. 정작 나는 너희한테 내 힘을 빌려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을 마친 내가 천천히 양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실력도 확인해 볼 겸, 힘으로 한번 데려가 봐. 내가 지면 군말 없이 따라갈게.”
“…….”
“물론 상대는 누구든 상관없어. 아니면 거기 마법사들 다 같이 덤벼도 무방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