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테라 해방군(5)
쨍그랑!
“빌어먹을…….”
데카르트의 손에서 칼이 내동댕이쳐졌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그는, 곧장 다른 기사들처럼 땅 밑에 파묻혔다.
이후로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경계병들은 모조리 무력화시켰으니, 이제는 느긋하게 국경지대를 통과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세타.”
그 즈음하여,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은 이대로 두고 떠날 생각인가?”
“응?”
루나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 한데 모인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었다.
고작 세 명이서 일천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을 관리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럼 뭐, 풀어주자고?”
“…그런 뜻이 아니다.”
“……?”
“이대로 떠날 거라면, 차라리 이들 전부를 죽이고 가는 게 낫다는 말을 하려는 거다.”
“…….”
절로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리나도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댔다.
“그, 그게 뭔 소리야? 이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이자고?”
“쉿. 목소리 좀 낮춰. 다 듣잖아!”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직후, 주변의 몇몇 기사들이 크게 몸을 떨었다.
공포는 마치 전염병처럼 전체로 번져 갔다.
“우, 우릴 다 죽인다고?”
“분명히 살려준다고 했잖아! 거짓말이었냐!?”
“사, 살려줘! 난 밑에 처자식도 많다고. 제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보다 못한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루나. 그건 진짜 복수가 아니야.”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풀어주면, 머지않아 이들은 또다시 우리를 향해 검을 겨누게 될 거다.”
“그거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요 거점들은 모두 빼앗겼고, 머릿수조차 열세임이 명확하지. 너는 여기서, 자력으로 줄일 수 있는 적들마저 풀어줘야 한다는 건가?”
“그게 너나 유리나를 위한 일일 테니까.”
“…뭐?”
순간 루나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저지른 짓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유리나도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사실 루나의 말은 지극히도 합리적이었다.
그 생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살인 자체가 꺼려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루나의 계획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니까.
다만,
“자세히 좀 얘기해 봐. 우릴 위한 일이라니?”
유리나가 불쑥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명확해. 바로, 민심(民心).”
“민심…?”
“저 아저씨가 론지에 후작님의 목을 직접 베어 광장에 효수했다는 사실은 이미 나라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 있어. 그런 상황에서, 그분의 딸인 루나가 원수와 맞닥뜨렸지.”
기사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앞사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누가 봐도 당사자는 눈이 뒤집힐 만한 상황이라는 거야. 한데, 벨 수 있는 적을 베지 않고 오히려 살려준다면 어떻게 될까?”
“…….”
“그뿐만 아니라 그 밑에 병사들까지 석방해 준다면? 아마도 해방군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자체를 뒤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
“잘 생각해 봐. 이건 반란군이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상황이기도 해. 우리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그 기회를 붙잡은 거고.”
실제로, 반란군은 지금의 3개월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현재 그들이 가장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 민심을 사로잡는 일이었으니까.
반란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 해방군의 악행은 날조한다.
마침내 왕위를 찬탈했을 때, 혹시나 일어날 폭동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것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잘 알겠다.”
이어지는 루나의 목소리에 내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럼…!”
“다만, 풀어준 이들이 다시 우리를 적대시한다면… 민심은 또다시 돌아설 것이다. 오히려 멍청한 놈들이라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지.”
“그거야 전쟁에서 이기면 되는 거잖아?”
“……!”
찰나 눈을 크게 뜬 루나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참… 언제나 말을 쉽게 하는군.”
“일단 저기를 봐.”
직후, 나는 예의 하반신이 파묻힌 적들을 가리켰다.
제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사람이 느끼는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저들이 느끼는 압박은 점차 가중되고 있었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
그것은 적들의 이성을 통째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살려줘어어어어어어어!”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게. 제발, 제발 살려만 달라고오오오오!”
“야이, 개자식들아!!!! 니들이 사람 새끼들이냐? 너희들은 악마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반응조차 각양각색이었다.
엉엉 통곡을 터뜨리는 병사.
분노로 삿대질을 해대는 기사.
혼자서 연신 무어라 중얼대고 있는 마법사도 있었다.
그 모든 이들에게 시선을 두며, 나는 마나를 담아 목청을 높였다.
“살려 드릴 테니 조용히 좀 해봐요.”
“……!”
작지 않은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저들은 지금, 실낱같은 희망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침묵의 중심지에서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애당초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공포로 야기된 상황이라면, 같은 감정으로 매듭짓는 편이 나았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인간은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현실에 순응하고 굴복하거나.
그도 아니면, 끝까지 맞서 싸우다 개죽음을 당하거나.
물론 십중팔구 열에 아홉은 전자를 택한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이 악마 새끼야! 방금 저 미친 마녀가 우리를 다 죽인다고…….”
쐐애애액! 서걱!
나는 지금 막, 그 하나의 목을 베어냈다.
순식간에 생성된 손안의 마력 창을 냅다 집어 던져서.
퓨륙! 퓨류류륙!
“…그르륵!”
자칭 긍지 높은 기사들 중 하나였다.
힘차게 흐르던 경동맥의 혈액이 갈 길을 잃고 사방으로 비산했다.
후둑! 후두두두둑!
그 끈적한 피의 비를 맞으며, 나머지 기사들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동요하던 병사들조차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내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지금부터 입을 여는 분은 모두 죽이겠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처럼요.”
“……!”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내게는 그럴 힘도, 명분도 있습니다. 이들과 그리 계약했으니까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루나와 유리나를 곁으로 당겨왔다.
“나는 여기 이 두 여인들과는 다릅니다. 이 나라에 조금의 정도 없으며, 처음 보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연민도 느끼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돈’이니까요.”
“…….”
“알아 들으셨다면, 이 이상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마시길…….”
그제야 내 의중을 눈치챈 것일까?
유리나와 루나가 복잡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들의 예상대로.
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나는 기꺼이 악역이 되어줄 생각이다.
***
수 시간이 지나.
우리는 마침내 아르센 국경지대를 완전히 통과할 수 있었다.
물론 유리나의 기대와는 무색하게 오늘도 야영이었지만.
타닥, 타닥.
눈앞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른다.
의외로 두 사람은 내 의견에 순순히 따라줬다.
반란군들은 목숨을 빼앗기지 않았다.
다만, 땅 밑에서 꺼내주는 자비까지 베푼 것은 아니었다.
설령 적의 수뇌부가 이변을 감지하더라도.
가까운 영지에서 출발해 그들을 구출해 내려면 최소 이틀은 소요될 것이다.
하니, 추적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세타 쿤 이그니스.”
그때, 모닥불 너머의 루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가장 체력이 남아돌아야 할 유리나는 어느새 저 구석에서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어?”
“늦게나마 인사하고 싶다.”
“…인사?”
“네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후 루나의 행동이 정말로 예상외였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녀는, 땅에 닿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고개를 깊이 숙였으니까.
“가, 갑자기 왜 이래?”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 아버지는 테라에서 극히 비주류인 기사 출신의 대귀족이셨다. 왕국 전체에서도 둘밖에 없는 마스터였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나머지 하나는, 그 위명도 자자한 카이클 공작이었으니까.
기실 제노스의 그 어마어마한 전투 능력도 부친에게 물려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인정이 많으셨다.”
“…….”
“내전이 발발하고, 실로 많은 전쟁을 대승으로 이끄셨지. 한데, 당신께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취하셨다. 전쟁 중의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 포로로 사로잡은 적들의 목숨은 절대 빼앗지 않으셨으니까.”
“…그랬었어?”
“그렇다고 그들을 대가로 다른 이익을 얻는 것도 아니셨다. 그저 다 같은 테라의 국민이니까. 지금은 썩어빠진 윗선의 지휘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거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니까, 풀어주는 거라고 하셨다.”
말을 마친 루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역시나, 그렇게 돌아간 적들은 배가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살려줘서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고도,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
“내 아버지는… 바보였다.”
“아니, 현명하신 거야.”
“…뭐?”
“그렇게 다 죽여서 쟁취한 나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죽 쒀서 개 줄 것도 아니고, 결국 군사력은 태반이 잘려 나간 채 제국에게 집어삼켜질 건가?”
“……!”
순간 루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남들이 눈앞의 전투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론지에 후작님은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보신 거야. 그런 분이 바보라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너…….”
“결과적으로 계속 승리도 하셨다며? 만약 그게 반복되었다면, 분명 저들도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겠지. 방금도 봤잖아? 어떻게 해도 안 되는 상대에게는, 결국 순응하게 되는 법이니까.”
“…….”
“그분은 아셨던 거야. 몸이 아니라 마음을 꺾었을 때야, 비로소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언뜻, 루나의 볼 위로 투명한 무언가가 반짝였다.
나는 애써 그것을 모르는 척했다.
“그러니까, 론지에 후작님은 누구보다 존경받아 마땅하신 분이야. 내전이 끝나고도 테라의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정도로.”
***
3일이 더 지났다.
우리는 빠르게 국토를 가로지르며 남하를 거듭했다.
국경지대에서 말도 갈아탄 상태라 이동이 무척이나 빨랐다.
그사이, 제법 커다란 마을에 들렀기 때문인지 유리나의 얼굴은 광채까지 나고 있었다.
“역시, 여독을 푸는 데는 목욕이 최고거든.”
어느새 허리까지 자란 머리를 한데 묶어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틀어 올린 그녀였다.
표정이 한결 나아진 루나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가 레이브 강 하류다. 연락받은 대로라면, 저곳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강 상류에 비해 하류는 유속이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여, 반란군의 대부분이 이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대략 1km가 안 되는 거리에 설치된 수백 개의 군막이 그 증거였다.
다만, 해방군은 오히려 그 점을 역으로 이용했다.
이름하여 ‘등잔 밑이 어둡다’ 작전이다.
“강을 건너려는 반란군과 그것을 막으려는 해방군의 소모전은, 보통 새벽과 정오. 하루 두 번에 걸쳐 치러진다. 지금과 같은 저녁에는 적들도 군영에서 쉬고 있을 테지. 그사이에 우리는 빠르게 강을 건너면 된다.”
“그럴듯하네.”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멈칫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웬 중무장한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 수가 대략 스물을 훌쩍 넘었다.
“…정찰대 치고는 아무래도 인원이 많아 보이지?”
“아니, 진짜아아아! 여기서 왜 또 기사들이냐고! 쟤들은 밥도 안 먹나? 또 싸워야 하는 거냐고!?”
그때, 루나가 조용히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다 댔다.
“…잠깐만.”
“뭘 잠깐만이야. 당장 검부터 뽑아. 내 불꽃으로 엄호는 확실하게…….”
“그게 아니라, 아군이다.”
“…뭐?”
직후, 나와 유리나의 시선이 동시에 전방을 향했다.
새까만 경갑옷을 착용한 기사들 사이로, 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슴푸레 떠오른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는 그녀는, 분명 우리 눈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실비아!”
은발의 미녀가 그곳에서 말갛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실비아 스필 세드릭.
적이 아니라,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