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테라 해방군(3)
“응?”
순간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상황이 급변했다.
그것도, 내게는 꽤나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로 방금까지 갑작스런 상황에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적들이었다.
한데, 어느 순간 진영이 갖추어졌다.
그리곤 재빨리 무기까지 고쳐 쥔다.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신속한 대응이다.
아마도 저들 속에 제법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던 모양이다.
‘유능한 지휘관의 존재는 전쟁의 흐름마저 바꾼다고 했지.’
어느 병법서를 뒤져 봐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었다.
“기사들은 사방을 경계하라!”
직후, 사내의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3조는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최대 광범위 마법을 준비해! 적의 마법을 디스펠(Dispel)시킬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좋아. 우리는 기사들의 뒤에 숨어서, 철저하게 적의 마법을 깨부수는 거야.”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궁병들. 빨리빨리 일어나란 말이야! 대체 언제까지 엄살 부리고 있을 작정이야?”
이런 뾰족한 고성도 뒤를 이었다.
목소리에 실린 마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방금의 두 남녀는 일정 경지에 오른 ‘강자’다.
‘반란군이 변방에도 이만한 경계를 기울이고 있었다니…….’
하물며, 이곳은 타국과 인접한 국경도 아니었다.
스르륵.
그때, 두 여인이 빠르게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돕겠다.”
“나도 도울게.”
루나와 유리나였다.
그 순간에도 전방의 마나는 점차 크기를 불려갔다.
곧 각자의 주력 마법이 된 마나에서 형형색색의 빛깔을 토해냈다.
무려 수십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쏟아내려 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를 대상으로.
“됐어. 둘 다 물러나 있어.”
“저쪽은 기사와 마법사 조합이다. 이쪽도 구색 정도는 맞춰줘야…….”
“루나, 너는 몸도 좋지 않은 환자가 자꾸 어딜 나서려고 하는 건데?”
“…할 수 있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루나가 마나를 불어넣었다.
유리나 또한 양손에 화염의 줄기를 생성해 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둘 다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다.
대체 무엇이, 그녀들을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만드는 것일까?
“…저기 마법사들이 입고 있는 로브. 그 위의 문양이 보이는가?”
“뭐?”
내 시선이 빠르게 전방을 훑었다.
뒤쪽에 자리한 마법사들은 루나 말대로 같은 문양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직사각형의 네모 안에, 마법진 하나가 단출하게 그려져 있는.
“더글린 자작가다.”
“더글린 자작가?”
“선두의 마녀가, 현 가주인 제이나 더글린이다. 평민의 신분으로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자, 실력만 따지면 왕국 내 서열 5위인 마법사다.”
“……!”
“그리고… 나와 유리나의 원수이기도 하지.”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직후,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유리나를 돌아봤다.
어느새 그녀 주변은 공기마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론지에 후작님이 함정에 빠졌을 때도. 전장에는 항상 저 여자가 있었다고 들었어.”
“뭐…?”
“더군다나, 저기 있는 기사 데카르트는 론지에 후작님의 시신을 욕보였지. 끝까지 반항하는 이들은 모두 이렇게 만들겠다면서, 그 목을 잘라 광장 한복판에 효수(梟首)했어.”
“……!”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리광들 부리지 마.”
“……!”
“그래서 뭐? 여기서 자진이라도 하겠다고? 아님 루나가 기사들을 삼백 정도 맡고. 네가 나머지 마법사들을 상대하게?”
“그건…….”
“이야, 참 대단한 계획이시네. 그런 뒤에는 저기 수천의 병사들까지 둘이서 때려눕히고 말이지?”
누가 봐도 일단은 자리를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분노에 눈이 먼 고집과 객기.
전장에서, 그것만큼 목숨을 위협하는 요소도 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냥 도망만 다니지는 않을 거다.
최초의 목적대로 우리는 저 안으로 들어간다.
반드시.
“일단 지켜나 봐.”
우우웅!
직후, 나는 몸에 걸린 모든 보조 마법들을 해제했다.
적들로부터 고작 백여 미터를 남겨둔 시점이었다.
움찔.
안력이 뛰어난 기사들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곧 그들의 얼굴 위로 황당함이 번져 간다.
“…저게 뭐냐?”
“어, 어린아이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저 애송이 혼자서 이 난리를 피웠다는 거냐?”
“서, 설마요.”
“뭐, 직접 물어보면 알겠지.”
마나를 이용해 감각을 활짝 열어둔 와중이었다.
밤의 고요한 적막 속, 이런 대화들이 연이어 들려왔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복부에 힘을 준 내가 있는 힘껏 목청을 내질렀다.
“네놈은 뭐냐!?”
“인사는 나중에 드릴 테니, 일단 그 흉악한 마법들부터 집어넣어 주시라고요!”
“미친놈. 웃기지도 않는 개수작을…….”
갑작스러운 욕지거리에 몇몇 기사들이 피식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이지만, 기분이 가히 좋지는 않았다.
“…그럴 생각이 없으시다면, 내가 대신해 드려야지.”
조용히 뇌까린 나는 곧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마탑에서 칠악의 서큐버와 마주쳤을 때.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상극인 마기를 이용해, 마법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마나를 소멸시키던 예의 그 능력 탓이다.
그때부터 나는 줄곧 의문을 품었다.
하면, 마나로 같은 마나를 상쇄시킬 수는 없는 걸까?
‘안티 매직 필드라면, 분명 고대 시대에도 존재했다.’
수식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아이리스의 지식 내에.
이 마법의 포인트는 일정 범위에 존재하는 마나를 한순간 ‘0’으로 만드는 것.
하여, 한때는 제로의 영역이라고도 불렸던 고대의 마법이다.
‘해보자.’
이윽고 영창을 중얼대기 시작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마나여.
만물의 근원인 생명의 힘이여.
그 시간을 멈추어라.
잠시만 모습을 감춘 채 어리석은 자들에게 존재의 고마움을 일깨워라.
“데카르트!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막아! 쟤 지금 영창을 외고 있잖아!”
“…애송이가 뭘 어쩌려나 싶어서 잠깐 보고 있었을 뿐이오. 하여튼 오버는…….”
“그게 아니라, 저 녀석은…!”
뒤늦게 근처까지 당도한 제이나는 채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영창은 순식간에 끝났으니까.
그리고,
화아아아아악!
내 몸을 중심으로 이내 희미한 빛무리가 생성되었다.
곧이어 그것은 단숨에 적의 진영까지 퍼져 나갔다.
“이, 이게 무슨…?”
당황하는 적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허나, 그 얼굴은 곧 의문으로 변해간다.
하기야 저 빛무리는, 신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을 테니까.
다만,
“헉!”
적어도 후방의 마법사들에게만큼은 예외다.
콰장창!
마치 유리창이 터지는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언제든 마법을 쏘아 보낼 준비를 하던 오십에 이르는 마법사들의 마나가 동시다발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내 시도는, 이번에도 성공적이었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이나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는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마법을 준비하던 휘하의 군단원들이 순식간에 역으로 디스펠 당하는 모습을.
아니, 애당초 저런 마법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너무 사기잖아!
마법사가, 같은 마법사를 대상으로 상대의 마법을 원천 차단한다니!
“저 어린놈의 자식.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쟤가 아직도 어린애로 보여!?”
“물론 어린애로 보이오만. 나참, 이깟 애송이를 상대로 지금껏 무얼 한 건지. 아까 이상한 불꽃도, 분명 아티팩트의 힘이겠지?”
척하니 검을 어깨 위로 걸친 데카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서야 제이나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런 마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다만, 아티팩트라면.
그것도 마법 문명이 찬란했던 고대의 아티팩트라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래, 아티팩트의 힘일지도…….”
“그런 초고위 아티팩트가 여러 개일 리는 없을 테고. 혹 다른 기척은 느껴지시오?”
“…몰라. 다만, 술자가 마법을 해제하면 일시적으로 주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적어도 걱정할 정도의 대인원은 없는 것 같아. 그랬다면 잠깐이나마 기척들이 느껴졌겠지.”
“그래서, 어림잡아 몇 명?”
“기껏해야… 열?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고.”
“미치겠네, 진짜.”
제 머리를 벅벅 긁은 데카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런 걸로 스트레스 받아서 뭐 해. 그냥 단숨에 박살내면 그만이지.”
허나, 그보다 애송이가 한 박자 더 빨랐다.
저벅, 저벅, 저벅.
녀석은 거침없이 이쪽으로 다가섰다.
최초 일백여 미터에서 팔십.
칠십.
오십.
삼십.
그리고, 고작 이십여 미터가량 앞까지 빠르게 접근했다.
“…보기보다 화끈한 애송이였네?”
“저랑 한판 붙으시죠.”
“뭐?”
“그러니까, 마법사가 기사에게 일대일 승부를 청하는 거라고요. 자신 없으신 건 아니죠?”
“…큭큭큭.”
애송이는 이쪽 바닥의 습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목숨보다 자존심을 더 중시하며.
체면과 명예.
긍지와 예의.
그따위 돈도 되지 않는 것들을 중시하는, 기사라는 족속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좋아, 좋아.”
“…….”
“받아들이지. 그 기개를 높이 사 단 칼에 베어주마. 애송아, 네 이름이 뭐냐?”
“세타 쿤 이그니스입니다.”
“세타 쿤 이그니스라…….”
짧게 중얼거린 데카르트가 새빨갛게 미소 지었다.
결정했다.
저 애송이는 반드시 자신이 벤다.
“자, 잠깐만!”
“……?”
“그게, 가능하면 죽이지는 말아 달라고…….”
이어지는 제이나의 말에 데카르트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하니,
“이런 상황에서 저게 탐난다는 개소리는…….”
“그, 그게 아니라. 알아볼 게 많은 녀석인 것 같아서. 다, 당신도 봤잖아?”
“흠…….”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못내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이나의 두 눈에 묘한 열기 비스무리한 게 뒤얽혀 있었으니까.
하기야, 가까이서 본 녀석은 데카르트 그 자신이 봐도 잘생겼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애새끼보다도.
“뭐, 노력은 해보지.”
“진짜? 진짜지? 고마워, 데카르트 경!”
“…….”
언제는 근육만 들어찬 기사니 어쩌니 하더니.
이제는 ‘경’이라며 호칭까지 높여주신다.
하여튼 사내새끼들이나 나이 든 아줌마나, 생각하는 건 다 똑같은 모양이다.
“그렇다는군. 혹여나 저 아줌마의 노리개가 되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개똥밭에 불러도 이승이 낫다고, 죽는 것보다는 괜찮잖아?”
“이해해요. 뭐, 죽을 생각도, 노리개가 될 생각도 없지만요.”
“큭… 자신감은 좋군. 다들 물러나라! 이건 남자의 싸움이다.”
데카르트가 뒤쪽의 기사들을 빠르게 물렸다.
“비록 애새끼지만, 오랜만에 진짜 남자를 만났으니 내가 직접 상대해 주겠다. 와라!”
음.
스스로 외치고도 만족했다.
비록 상대가 애송이라 멋은 살지 않지만, 아무렴 어떤가?
위쪽에는 목책 하나를 통째 날려 버린 대마법사를 내가 베었노라.
그리 보고하면 되는 것을.
“큭큭큭…….”
데카르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내흘렸다.
“근데 그거 아세요?”
“……?”
“아까 제가 마법을 펼치면서, 지반에도 살짝 장난을 쳐놨거든요.”
“…뭐?”
“마법만 디스펠 시키면 좀 심심할 것 같아서요. 자체적으로 수식을 재정립하는 작업은 제법 숙련도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뜬금없이 뭔 헛소리냐? 공포에 이성이 날아가 미치기라도 한 거냐?”
이변이 감지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
“대, 대장님! 땅이 이상합니다!”
“땅?”
“마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기분입니다! 아니, 이건 모래보다는 늪에 가까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흐물흐물하게 변해 버린 땅은 부하들의 하반신을 천천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홱!
“이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직후, 전방으로 고개를 돌린 데카르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비가 온 뒤의 땅은 더 단단하게 굳는 법이죠. 베이크 더 그라운드(Bake the ground).”
콰드드득!
“크아아아아아!”
곧 비명이 천지를 찢어발겼다.
늪은 순식간에 바위가 되었다.
하반신이 급속도로 수축되는 압박감은 아무리 단련된 기사라 해도 쉽게 버틸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한데, 그걸 보며 예의 애새끼가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기사들이란, 참 단순하다니까요?”
***
“딱 좋네.”
가장 귀찮은 기사들의 발을 묶었다.
데카르트의 얼굴은 이미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죽여 버린다, 이 야비한 자식! 못해도 고추 정도는 잡아 뜯어주마. 네놈은 사내새끼도 아니다!”
“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이상 시간을 끌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파창!
나는 곧바로 마력 창 하나를 생성해 냈다.
마치 제노스처럼.
창술을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녀석의 전투는 누구보다 신경 쓰며 지켜봐 왔다.
구태여 여기까지 와서 근접전을 펼치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거리를 벌리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붙어서 싸워야 함부로 화살을 쏘아대지 못할 테니까. 범위에서 벗어난 마법사들도 마찬가지고.’
추가로, 전투 마법사는 기사에게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그 대륙의 인식 또한 몸소 겪어보고 싶었다.
마법사는 암살에 취약하니까.
가능하다면, 기회가 있을 때 경험을 쌓아둔다.
휘릭! 휘리릭!
‘분명 이런 식으로 휘돌렸었지.’
사실, 현재의 대륙에서 창은 잘 쓰이지 않는 무기였다.
검 만능주의.
검이 최고이며, 검 위에 그 어떤 무기도 없다.
이게 당대 대륙인들의 인식이었다.
그 대단한 제국의 기사들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검을 사용했으니까.
다만,
‘이쪽은 마력 무구니까.’
기사들은 말한다.
창?
그까짓 것, 휘두르기도 전에 베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위력이 강하면 뭐 하는가?
리치가 길면 또 뭐 하는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려 터졌는데.
비슷한 의미로 메이스니 할버드니, 랜스니 하는 무기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게 마력으로 이루어진 창이라면 얘기는 또 달랐다.
이쪽은 가장 치명적인 단점인 ‘무게’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면서 절삭력마저 뛰어나니까.
그러니 제노스도 창을 고집하는 것이겠지.
‘오늘, 고정 관념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주마.’
만약 내 계획이 성공한다면, 기사들의 하늘같은 오만함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직후, 나는 도발적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럼 와 봐요. 쫄지 말고.”
“큭…….”
한데, 예상외로 데카르트는 쉽사리 내게 접근하지 못했다.
또 무언가 꿍꿍이를 파놓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잠깐.”
누군가 내 어깨 위로 살며시 손을 얹었다.
찰나, 내 눈썹이 꿈틀거렸다.
루나였다.
투명 마법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역시 일행이 있었나!? 가만 네년은…….”
말끝을 흐리던 데카르트가 눈을 치켜떴다.
“그 흑발에 외모. 설마 루나 틴 론지에냐?”
“…….”
제 원수가 눈앞에 있음에도 루나는 그쪽으로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오직 나만을 바라봤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하겠다.”
“제발 한순간의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지 말라니까…!”
“너는 지금, 내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나?”
“……!”
루나의 말 대로였다.
지금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침착했다.
코앞에서 원수를 맞닥뜨린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너는, 네 복수를 남에게 맡길 수 있는가?”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네 몸이…….”
“설령 싸우다 죽어도 상관없다. 원수의 검에 목숨을 잃는 것은 치욕이나, 전장에서 죽는 것은 무엇보다 큰 명예니까.”
“…….”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이렇게 원수와 검을 맞대게 해준 네게 감사를 표하고 있는 거다.”
“결국… 네 고집대로 끝까지 싸워보겠다는 거잖아.”
내 말에 루나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믿어라. 반드시 이길 테니까.”
“……!”
“나는 테라 제일의 기사, 루나 틴 론지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