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09화 (109/251)

109화. 테라 해방군(2)

“미치겠네, 진짜…….”

홀로 앞으로 나아가는 세타를 보며 유리나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괜한 고생을 시키는 기분이라 미안했다.

아니, 설마 이런 곳에 마나 트랩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마나 트랩은 무지막지하게 비쌌다.

단순 경보용으로도 하나가 어지간한 4인 가족의 한 달 치 생활비와 맞먹을 정도였으니까.

주제에 아티팩트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군.”

“미, 미안하게 됐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엉?”

“지금의 테라는, 이런 변방까지 거액을 투자할 여력이 없을 텐데…….”

직후, 루나가 마나를 일으켜 안력을 돋우었다.

그러자 곳곳에 매립된 푸른 빛이 희미하게나마 시야로 들어왔다.

어림잡아도 그 숫자가 천여 개에 달했다.

“내전 이전에 이미 매립되어 있던 것 아닐까?”

“…아니. 마나 트랩은 최대 1년마다 마탑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소모된 마나를 충전시켜 줘야 하니까.”

“그 말은…?”

“반란군은 제국의 금력까지 등에 업었군.”

“……!”

유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군사적 도움에 재정적 지원까지.

정녕 반란군은 내전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 건가?

이대로 나라를 통째 팔아넘기려 하는가?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제 명분마저 손에 쥔 것이겠고.”

“그,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설령 반란군이 패하더라도 제국은 요청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나올 거다. 결국, 그 손해를 보상해 내라고 협박할지도 모르지. 자신들은 반란군이 아니라, 테라라는 나라 그 자체에 도움을 준 것이라면서.”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힘을 가진 자의 말이 법(法)인 시대다. 결국은…….”

잠시 말끝을 흐리던 루나가 힐끗 앞쪽을 바라봤다.

세타는 여전히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힘이 곧 정의다. 힘이 곧 자신감이다. 그러니까, 목소리를 내고 싶다면 그 힘부터 키워야겠지. 저 아이처럼.”

***

목책을 책임지는 사람은 아르센 영지 제일의 기사, 데카르트였다.

영주 성의 핵심 인물이자, 이미 엑스퍼트 상급의 경지를 바라보는 그가 이런 변방에 있는 데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누구보다 존경해마지 않는, 카이클 공작 각하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다른 어느 곳보다 국경지대의 경계를 강화하라고.

실제로, 현재 테라의 군은 상당히 예민한 상태였다.

해방군의 쥐새끼들이 국외로 빠져나갔다는 얘기가 속속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반드시 사로잡아야 할 론지에 후작가의 후계와 아리에나 자작가의 계집년도 있었다.

“각하 체면이 말이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 국경이라도 뚫렸다간, 당장에 내 목이 날아갈 테지.”

슬며시 미간을 찌푸린 데카르트가 목책 너머의 어둠 속을 응시했다.

유일하게 특정 지점만이 그곳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나 트랩이 발동했다는 신호다.

허나, 그 어디에도 수상한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마법인가? 이봐, 얀센.”

“예, 대장!”

“제이나 수석 마법사는 아직인가?”

“이미 연락은 취해뒀습니다. 이르면 20분 내로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20분? 그건 너무 느리잖아. 어디서 떡이라도 치다가 뒤늦게 출발하는 건 아니겠지? 그 발정 난 아줌마.”

“그, 글쎄요.”

“나라꼴이 엉망이야. 시대에 너무 뒤처져 있어. 저 제국이 대륙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이유가 뭐야? 검이 최고이기 때문이야. 기사들에게 다 퍼 줘도 모자랄 판에, 이놈의 나라는 여태 마법사 따위나 육성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으니 잘될 턱이 있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데카르트가 연신 혀를 찼다.

그는 천상 기사였다.

검 위에 그 어떤 것도 없다.

지금의 테라를 보라!

마법 왕국이니 뭐니, 자부심은 있는 대로 다 부리더니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게 다 기사를 천대했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이 ‘혁명’을 기점으로 나라를 완전히 바꾸고 싶었다.

“궁병들에게 시위를 당기라고 일러라.”

“하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면, 스스로 나오도록 만들어야지. 저기 마나 트랩이 작동한 지점을 중심으로, 일대에 구멍을 뚫어버려라.”

“명 받들겠습니다!”

“쯧, 시건방진 마법사 놈들.”

데카르트는 확신했다.

이걸로 쥐새끼들은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다.

어쩌면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르지.

화살 한 발조차 제대로 피하지 못하는 신체 능력을 가진 비루한 족속들이 마법사였으니까.

불과 5초 전까지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대, 대장님!”

“엉?”

“저, 저기…!”

순간 얀센이 하늘 위를 가리켰다.

데카르트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의 부관이 꼭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뭐길래 그러는…….”

데카르트는 채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완전히 하늘 위로 고정된 직후였다.

단언컨대.

“미, 미친…….”

살아생전, 그는 저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불덩이’는 처음 봤다.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어둠 속에서 저만한 불꽃이라면, 그 밝기 때문이라도 진즉 눈치챘어야 했거늘!

그걸 눈으로 확인한 지금에서야 깨닫다니…?

화륵! 화르르륵!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리는 물론이고, 겉모습까지 분명 화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닌바 색깔이 문제였다.

하늘 위의 불꽃은 칠흑처럼 새까맸다.

마치 주변의 어둠을 그대로 빨아들인 것처럼!

결국 그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단 하나뿐이었다.

“피, 피해라아아아아아아아!!!!!”

***

“흐, 흑화(黑火)라니…….”

유리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불꽃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살아생전,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한다.

염화(炎火)니 청화(靑火)니 하는 것들은 순전히 잡기일 뿐이라고.

다만, 흑화만큼은 예외였다.

“왜 불꽃이 검은색이지? 유리나, 너는 뭔가 아는 건가?”

“나, 나도 잘은 몰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서…….”

“일단 알긴 안다는 거군. 내게 설명해 줄 수 있겠나?”

“그, 그게…….”

다시 말하지만, 유리나는 불꽃과 관련된 모든 마법 서적들을 뒤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책들에도 저런 완전한 흑화는 딱 한 번 등장했다.

불꽃의 마법사라 불리었던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이전의 세대.

지금처럼 열두 마탑주가 아니라, 오직 단 세 명의 마법사에게만 ‘아크메이지(Archmage)’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붙었던 시절.

검은 불꽃은, 다름 아닌 그 세 명의 아크메이지 중 한 사람의 전유물이었다.

“화염의 군주(Lord of fire) 블레이즈…….”

유리나의 동공이 요동쳤다.

만약 저게 정말로 그 전설 속 흑화라면.

그것도 잡기 따위가 뒤섞이지 않은 완전한 불꽃이라면.

저 멀리 보이는 목책은 그냥 타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

우우우웅!

인근의 마나가 강하게 떨어 울렸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직후, 나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목표는 목책의 하단부.

가능하다면 살생을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혹여나 사람이 휘말리게 되더라도 관계없었다.

나는 지금, 저들을 명확한 적으로 인식했으니까.

이미 테라에 자리 잡기로 마음먹은 이상, 언젠가는 저들도 내게 검을 겨눌 터였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더 나아가, 스승님과 다른 동료들에게도 피해가 간다.

그런 거라면 망설일 이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내 본성은 누구보다 이기적이며.

또한 독선적이니까.

화르르르르륵!

새까만 어둠 속.

한줄기의 검은 불꽃이 꼬리를 물고 지상으로 하강했다.

검은 바탕 위에 더 새까만 화염 덩이는 일견 식별조차 하기 힘들었으나.

꽈아아아아앙!

마침내 목책과 충돌했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존재를 인식했다.

안력이 뛰어난 기사들도.

육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일반 병사들도.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비명을 지르며 목책에서 뛰어내리기 바빴다.

기본적으로 나무는 불에 잘 탄다.

허나, 검은 불꽃과 충돌한 목책은 단순히 잘 타는 수준이 아니었다.

불씨가 채 옮겨 붙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소멸하고 있었기에.

유(有)를 무(無)로 만드는 힘.

흑화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이이이!”

“밑에서 받아줘! 받아달라고 개새끼들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졌다.

불꽃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뛰어내렸다.

물론 족히 5미터를 훌쩍 넘는 목책이었기에, 재수 없는 이들은 사지가 하나씩 부러지고 뒤틀렸다.

특히 일반 병사들의 피해가 막심했다.

다만,

“아직도 피를 볼 생각인가?”

비교적 피해가 경미한 기사들은 빠르게 채비를 갖췄다.

그 수가 자그마치 삼백을 넘는다.

“끝까지 해볼 생각이라면, 나도 설렁설렁 넘어가진 않을 거야.”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내가, 다시금 전방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막 평지로 내려선 데카르트의 얼굴은 허탈감으로 가득했다.

어느새 견고하기 그지없던 높다란 목책은 온데간데없었다.

뻥 뚫린 정면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숲만이 단독으로 망막에 맺혔다.

높이 5미터.

길이마저 수백 미터에 육박하던 목책의 절반이 그 자리에서 소멸한 결과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래?”

“……!”

그 순간, 새로운 목소리가 데카르트의 상념을 일깨웠다.

어느새 로브를 착용한 마흔 안팎의 마법사가 다가서 있었다.

물론 데카르트는 그녀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제이나 더글린! 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것이오!?”

“이거 왜 이러실까. 오밤중에 자는 사람을 다짜고짜 깨워 놓곤. 그게 여자 피부에 얼마나 안 좋은지 당신이 알기나 해요?”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알고 그딴 시덥잖은 소리를…! 하아, 됐고. 그쪽이 자랑하는 마법 군단은 데리고 온 거요?”

“저~기 뒤에 있네요.”

여인이 가리키는 곳에 대략 오십은 되는 듯한 로브인들이 정렬해 있었다.

“왜 저것밖에 데리고 오지 않은 거요!?”

“어머! 저래 보여도 우리 가문이 자랑하는 마법 군단 1개 조거든요? 저만한 전력이면, 어지간한 영지는 하루아침에 쑥대밭으로…….”

“잡담은 나중에 하시오. 지금 당장 이 상황부터 어떻게 해달란 말이오!”

“그러니까 뭐를요?”

“저기! 목책 너머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소? 보이진 않는다만, 마나 트랩이 발동했단 말이오!”

“아항. 인비저빌리티라도 사용했나 보네.”

“단순히 모습만 보이지 않는 거라면 우리가 진즉 눈치챘겠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소!”

“그거야 당신네 기사들이 머리까지 근육으로 들어차서 그런 거고요.”

“뭐, 뭐라고?”

“알았으니까 비켜 봐요, 걸리적거리니까. 이왕이면 저기 멀찍이 떨어져 있도록 해요. 당신네 대단한 부하들도 전부 데리고요.”

으득.

순간, 강하게 입술을 깨문 데카르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금은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당하는 것보단 잠깐 자존심을 굽히는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이제 좀 조용하네.”

그제야 제이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내심 작금의 상황이 기꺼웠다.

꼴에 기사랍시고, 그동안 저 머저리가 얼마나 잘난 체를 해왔던가?

데카르트가 천상 기사라면, 그녀는 전형적인 테라의 마법사였다.

그것도, 반란군 내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하여튼 입만 산 기사들이란…….”

피식 웃음을 터뜨린 제이나가 정면을 바라봤다.

이질적인 기운이라면, 그녀도 진즉에 느끼고 있었다.

당장 목책이 있던 인근에도 범상치 않은 마력의 잔향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만한 수준의 마법사라면, 그녀의 발치 정도는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낯짝이나 한번 볼까?”

직후, 제이나가 곧바로 마나 스캔을 시전했다.

한데…

“……?”

점차 그녀의 얼굴 위로 의문이 번져 갔다.

마나 스캔에 감지되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예의 이질적인 마력은 여전히 느껴지고 있는데도…….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설마 나보다 높은 경지라고?”

그녀는 왕실 3석 마법사, 제이나 더글린.

이미 6써클에 이른 초고위 마법사이자, 왕국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