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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107화 (107/251)

107화. 숲의 끝자락

달이 떠오른 밤.

나는 홀로 동굴을 나와 있었다.

이곳은 숲 초입에서도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인근에 수준 높은 환영 마법까지 펼쳐 뒀지만, 쉽게 안심할 수 없었다.

하여, 스스로 경계를 자처했다.

“하아…….”

막상 밤바람을 맞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줄곧 마음이 심란했다.

아이리스의 세 번째 조각을 해제한 직후부터.

그러니까, 죄악의 힘을 받아들인 이후로 감정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따위의.

인간이라면 응당 느껴야 할, 그 감정들 말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한 여인을 살리기 위해, 두 사내가 목숨을 버렸다.

그뿐인가?

방금까지 눈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대인원이 한순간 떼 몰살을 당했다.

내 나이라면, 분명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유리나가 줄곧 저기압이었던 이유도 분명 비슷한 맥락에서겠지.

허나, 적어도 나는 달랐다.

시신의 산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분노나 슬픔 따위의 감정들이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이 내게 어떻게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과장을 조금 더해, 눈앞에서 벌레 몇 마리가 죽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이게 죄악의 영향인지.

그도 아니면, 점차 전생의 기억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서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내 정체성은 또 한 번…

‘…아니, 나는 인간이다.’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뺨을 후려쳤다.

양 볼이 다 얼얼할 정도였다.

상념은 더 이어갈 수 없었다.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냐?”

“…….”

나는 놀라지도 않고 뒤를 돌아봤다.

인기척은 진즉에 느끼고 있었다.

온종일 말이 없던 유리나가 동굴 입구의 달빛 아래에 서 있었다.

“왜 안 자시고?”

“그냥, 잠이 안 와서.”

“마법에 대해 묻고 싶어서 나온 건 아니고?”

“엉…?”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있었잖냐. 얼굴에 티가 다 나던데.”

“뭐… 꼭 그것만 생각했던 건 아니었는데.”

잠시 머리를 긁적인 유리나가 이내 내 옆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네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묻는 건데, 오른 거냐? 7써클.”

“아마도?”

“진짜 대단하네. 나랑 동갑인 주제에.”

“너도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거야.”

“…치욕스럽네. 내가 고작 낙제생 따위에게 이런 응원을 들으며 열등감을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뭘. 앞으로 더 느끼실 텐데.”

“헹, 그러셔?”

혀를 삐죽 내민 유리나는 이후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뭐지.

용건이 있으니 따라 나온 건 줄 알았는데.

가령, 복수를 도와달라던가…

“…야.”

역시.

속으로 실소를 터뜨린 내가 옆을 돌아봤다.

햇살을 닮은 주홍빛 머리칼은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왜?”

“우리… 잘할 수 있을까?”

“뭔 소리야?”

“반란군에 제국에 칠악까지. 적은 갈수록 대단해지는데, 나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갑자기 분위기 잡길래 뭔 대단한 질문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뭐, 뭐. 그럼, 내가 진짜 너한테 마법이라도 알려달라고 할 줄 알았냐?”

“비슷한 생각을 하기는 했지.”

“됐다. 내가 또 그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라서. 더군다나, 너도 마음이 심란할 것 아냐? 사람이라면.”

“…….”

얜 왜 갑자기 감성적으로 변해선 이런 말들을 늘어놓는 것일까?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적어도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

“그, 그러니깐. 난 너를 친구로 생각한다고.”

“…….”

내가 계속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유리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냥,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야. 아씨, 아무튼 혼자 궁상떨지 말고 얼른 들어와라. 쌀쌀하네.”

“…….”

아무래도 의도치 않은 오해를 산 듯했지만, 남이 보기에 내가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고맙긴 하네.”

직후, 피식 웃음을 터뜨린 내가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 마음도 모르고.

밤하늘의 별은, 오늘따라 유달리도 반짝이고 있었다.

***

다음날 새벽.

루나가 깨어나는 즉시, 우리는 길을 떠났다.

물론 주변에 위험 요소가 없는 것은 두 번, 세 번씩 확인했다.

“몸은 괜찮아?”

“아직은 불편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다행이네.”

“날 치료해 준 게 너라고 들었다. 신성 마법은 대체 언제 배운 거지?”

“신성 마법 아니야. 내가 무슨 사제도 아니고.”

“그럼 내 상처는…?”

“재생력을 높이는 보조 마법, 시간을 빨리 감는 가속 마법. 뭐 그런 것들로 내 나름의 수식을 재정립해서 만든 잔재주 정도일까?”

“……!”

순간 루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기사인 그녀가 듣기에도 재주가 범상치 않아 보이겠지.

옆의 유리나는 아예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천재는 다르다는 거군. 그보다 그 마녀와 제국군이 여태 뒤쫓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리 여유롭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그 이전에, 이것부터 알아야지.”

“무슨…?”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근방에 제국군이 있다면 어느 경로를 통해 이곳까지 왔을까?”

“……!”

그제야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루나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참고로 서쪽 끝에 위치한 자이툰 왕국은 북으로 제국을, 동으로 검은 마물의 숲과 스란 공국을 인접하고 있었다.

남쪽은 거대한 대해(大海)가 자리해 있었고.

그런 제국군이 중심부인 마탑에서부터 우리를 추적해 왔다면,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젠 대놓고 공국의 국경을 이용한다는 건가?”

“이미 전쟁까지 벌인 마당이니까.”

“그럼 더더욱 큰일이지 않나!?”

“일단 국경을 넘은 이상, 저들은 속전속결로 거점 지역까지 파고들려고 할 거야. 쥐새끼 몇 마리 때문에 이런 변방까지 병력을 분산시킬 여유가 없다는 거지.”

가만히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레베카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자, 잠깐만요. 제국이 벌써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씀이세요?”

짧게 친 분홍색 단발머리에 웬 땡그란 안경까지 꺼내 쓴 그녀의 상태는 루나보다 훨씬 나았다.

아무튼, 저 반응은 꽤나 의외다.

“골든 버드 상단도 제국이 전쟁을 벌일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나?”

“저흰 상인이니까요. 확신에 가까운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죠.”

“이유는?”

“최근 1년 동안. 제국과 교역하는 나라의 수출품들은 유달리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강했어요. 가령, 말이나 철붙이 따위요. 저희도 상당량을 중개하기도 했구요.”

“전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건, 무려 1년도 더 전의 일이라는 말이지? 한데도 다른 나라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아니요. 단순히 의심만 하고 있는 나라들이라면, 저희 말고도 제법 있을 거예요.”

“근데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그런 정황만 가지고 먼저 제 몸을 희생하고 싶은 나라는 없을 테니까요.”

“…….”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제국이 딱 잡아뗄 건 뻔하고, 괜히 찍혀 봐야 좋을 게 있나요? 가장 먼저 딴지를 거는 나라가 피해 또한 제일 클 것이 기정사실인데.”

“이해했어.”

“바야흐로 대륙 평화기. 다시 말해, 자국민 이기주의가 극에 달한 시대에요. 나라마다 힘은 팽창할 대로 팽창했고, 혹여나 약해지면 언제 주변국들에게 물어 뜯길지 몰라요. 상황이 그런데, 어느 나라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남기려 할까요?”

이윽고 말을 마친 레베카가 제 안경을 고쳐 썼다.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움직일 줄은 전혀 몰랐지만…….”

“해서 말인데.”

“네?”

“네 말대로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 건 확실해. 평소에 얼마나 으르렁댔든, 다른 모든 나라들이 합심하여 제국을 견제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의미야.”

“당연히 그렇겠죠.”

“동의한다면, 리비아 왕국을 움직이는 일은 너한테 부탁해도 될까? 네 아버지라면, 분명 왕국에도 입김이 상당하실 것 같은데.”

레베카가 짐짓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제 아버지와 폐하는 친분이 있으세요. 귀족 아카데미에서 함께 자란 동기이기도 하고, 사적으로도 죽이 잘 맞으시거든요.”

“그럼…!”

“근데, 다른 귀족들이 문제에요.”

“다른 귀족들…? 왜?”

“왕을 제외한 최고 권력자라면, 리비아 왕국에는 총 세 사람이 있어요.”

“공작이 셋이라는 뜻인가?”

“네. 그 나머지 두 공작이 골칫거리예요. 원래는 안 그랬는데, 어느 순간부터 왕국의 정책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댔거든요.”

“리비아는 대대로 왕권이 강한 나라 아니었던가? 제아무리 공작이라도…….”

“원래는 그랬죠. 그야말로 갑작스레 기세등등 날뛰어대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뭘 믿고 저러나 싶었는데, 아마 제국을 등에 업어서인 것 같네요.”

“……!”

이제, 루나와 유리나도 퍽이나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까지 한 얘기들… 확실한 거지?”

“물론이에요. 극비지만, 아버지는 폐하의 명을 받들어 따로 정보 조직을 움직이고 계셨어요. 거기서 두 공작이 제국과 내통하고 있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발견하신 거구요.”

“…그건 아마 리비아만의 문제는 아닐 거야. 제국은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 왔으니까. 다른 나라에도 제국의 간자들은 수없이 많겠지.”

잠시 멈추었던 내가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정말로 한시가 급해졌다.

만에 하나.

내 예상보다 다른 나라들이 훨씬 빠르게 무너지게 된다면…….

내전이고 뭐고, 테라를 포함한 대륙 전체가 제국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잘 따라붙어. 지금부터 속도를 조금 높일 생각이니까.”

***

퍼펑! 퍼퍼퍼펑!

폭발음이 연달아 울려 퍼진다.

곧바로, 마물들의 통곡 소리가 뒤를 잇는다.

말을 타고 달리는 내가 손을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앞을 가로막는 마물들은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나고 있었다.

“세상에…….”

그것도 방금 트롤 한 마리가 마지막이었다.

고작 반나절 만에, 우리는 목적지인 숲 끝자락에 도착했다.

내 활약에 루나와 유리나는 이제 익숙한 얼굴이었고.

레베카는,

“우와! 트롤은 재생력 때문에 어지간하면 잡기 힘든 마물인데!”

불끈 주먹을 틀어쥐며 기뻐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친해지면 활발해지는 성격인 모양이다.

“이게 다 얼마예요. 아, 진짜 아쉽다. 시간이랑 인력만 있었다면, 이걸 전부 가져다 파는 건데…!”

그리 말하며 홱 하고 내 쪽을 돌아봤다.

“진짜 우리 쪽에 올 생각 없어요?”

“응. 안 가.”

“왜요! 대륙 최고로 대우해 준다니까요? 나라를 떠난 지 오래됐으니 애국심은 없을 거고, 지금은 자유연합 소속의 마법사라면서요! 참고로 저희 상단은 마나 영약 같은 것도 질이 다른…….”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유리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걘 내 거야.”

“…네?”

“아, 아니. 우, 우리 거라고.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네. 테라의 귀한 전력을, 상도덕도 없이 눈독 들이지 말라는 뜻이야.”

“흐응…….”

직후, 레베카가 묘한 눈빛으로 유리나를 흘겨봤다.

“뭐, 뭔데. 그 눈빛은?”

“그냥. 아쉽게 됐네요. 이만한 실력이면, 왕국 어디를 가나 자작 정도는 따놓은 당상일 것 같은데. 테라에서는 고작해야 평민이었다니… 인재를 몰라 봐도 정도가 있지.”

“자, 자작? 아니, 그때는 이런 실력이 아니었…….”

“아, 저기 제 목적지가 보이네요!”

유리나의 말을 끊어내며 레베카가 소리쳤다.

마법의 힘을 이용해 안력을 돋우자, 숲 바깥쪽에 대기하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일단 제국군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제 일행이 맞을 거예요. 이럴 줄 알고, 미리 통신용 수정구로 연락을 취해 뒀거든요.”

“…깃발을 보니 골든 버드 상단이 맞는 것 같기는 하네.”

다시 말해,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라는 의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천천히 말의 속도를 늦추며, 레베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각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우리 상단을 나타내는 표식이에요.”

“표식?”

그 말대로, 패 위에는 세밀한 새 한 마리가 양각되어 있었다.

“시간 될 때 방문해 주세요. 저는 ‘친구’를 맞이할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으니까요. 급한 일 있으면, 알려드린 주파수로 연락하셔도 좋고요.”

피식 웃음을 터뜨린 내가 손을 휘저었다.

“얼른 가라.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리고…….”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레베카가 생긋 미소 지었다.

“먼저 반말하셨으니, 그땐 저도 말 놓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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