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색욕의 죄악(1)
펑! 화르륵! 우지끈!
지나온 길이 변해간다.
지면은 마물들의 피로 흠뻑 젖었고, 부러진 나무들이 그 위를 덮친다.
초입부에서 오크 1개 부락을 전멸시키고 다시 고블린이나 코볼트 따위의 하급 마물들을 이백.
아니, 삼백은 족히 넘게 학살시켰을 때였다.
그즈음 하여 이제 내 앞을 가로막는 생명체는 아무도 없었다.
깨개갱.
그 악명 높은 숲의 마물들조차 나를 보면 도망치기 바빴으니까.
기실, 이건 내게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지만.
일행들을 위해 미리 길을 뚫어두려는 목적 또한 있었다.
크르르르르.
“…진짜는 지금부터라는 거지.”
그리고, 그제야 내 앞에 포식자라 부를 만한 대형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적인 크기보다 대략 1.5배는 더 거대한 녀석.
5미터나 되는 키에, 피부 전체가 새까만 그것의 이름은,
“오우거.”
물론 이 녀석 또한 변종인 블랙 오우거였다.
쿵! 쿵! 쿵!
녀석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지축이 흔들려 댄다.
놈은 제 존재감을 숨기지 않았다.
상위 포식자로서의 자신감이겠지.
더하여, 여기서부터는 숲 초입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의미일 테고.
“루나 정도는 되어야 피부에 흠집이나마 낼 수 있겠는데?”
일반 오우거도 엑스퍼트 중급은 되어야 상대가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블랙 오우거라면, 최소 엑스퍼트 중상급은 되어야 싸움이 될 터였다.
아니, 상급이 아니면 승산 자체가 희박할지도 모르겠다.
힘은 악력으로 바위도 으스러뜨린다는 싸이클롭스를 능가하고.
이족보행 마물 주제에 100미터를 4초대로 끊는 민첩성마저 지니고 있으며.
재생력은 트롤을 방불케 한다.
이게 세간에 알려진 블랙 오우거에 대한 평이었다.
마물 사냥에 특화된 마법사라도 저 괴물이 상대라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블랙 오우거는 마법에 대한 저항력도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니까, 4써클 이하의 마법 정도는 그냥 맞아주고 코나 후빌 놈이다.
“근데 왜 안 덤벼?”
순간 내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녀석의 힘과 속도라면, 이미 내 몸을 삼백육십 등분으로 찢어 놓아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경계하는 건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픽, 하고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저건 여유도 뭣도 아니다.
지배 계급의 위층.
그러니까, 상위 포식자로서의 여유다.
제 영역에서 인간을 보는 것은 오랜만이겠지.
나는 녀석에게 색다른 먹잇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증거로, 입가로 아주 침을 질질 흘려대고 있었으니까.
그 점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크르르르…….”
“뒤도 좀 돌아봐. 이 못생긴 마물 놈아.”
물론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딱히 들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안 돌아보면 제 놈만 손해였으니까.
쐐애애애애애액!
직후, 무척이나 은밀한 파공음이 대기를 갈랐다.
서걱!
그와 동시에 섬뜩한 파육음이 뒤를 잇는다.
“…역시 이것도 되네.”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 목을 긁어대는 오우거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이번에는, 이전과 또 다른 시도를 해본 참이었다.
나는 항상 마물을 평가할 때 자연스럽게 기사를 기준으로 삼곤 했다.
검기의 경지.
즉, 상대를 벨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라는 명제만큼 간단명료한 것도 없었으니까.
이즈음 하여, 한 가지 생각이 더 떠올랐다.
하면, 마법사는 검기와 비슷한 위력을 낼 수 없을까?
근접전에는 전투 마법사라는 클래스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경지의 기사와 일대일 승부를 벌이게 되면, 열에 아홉은 전투 마법사가 진다.
로마르니나 제노스 델 카이클 같은, 특이 케이스는 제외하고.
패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마나의 비효율성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애당초 기존의 검에 제 마나를 덧씌우는 것과 검 하나를 통째 만들어내는 것은, 소모도부터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였으니까.
하면 마법사도 검을 들고 싸우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미친 소리다.
마법사가 검을 쥐어?
그건 더 이상 마법사이기를 포기하는 거다.
처음부터 검기를 보다 효과적으로, 강하게 밀집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오러 연공법이다.
모방 따위가, 오리지널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다 가랑이 찢어지는 것처럼.
몸 안의 마나는 금세 고갈되고 말 것이다.
하여, 나는 아예 새로운 개념을 떠올렸다.
이른바 ‘수식의 재정립’이다.
3써클 윈드 커터.
거기에, ‘예리함’을 섞어낸다.
일전의 폭발성이나 파동성과는 차이가 있었다.
같은 공격 마법으로 분류되는 화염의 폭발성이나 파동성과는 달리.
예리함이라는 특성은, 수식의 구조 자체가 완전히 다른 보조 마법에서 가져와야 했다.
가령, 샤프니스(Sharpness)에 이용되는 수식 정도가 있겠다.
무기의 절삭력을 한층 끌어올리는 보조계 마법.
이 수식을, 여타 공격 마법들에도 섞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 결과가 지금 내 눈앞에 드러난 광경이었다.
주르륵!
어느새 완전히 굳어버린 거대 생명체가 그곳에 있었다.
쩌어억!
갈라진 목 사이로 꿀렁이는 피를 토해내던 그것은,
콰당!
이윽고 굉음과 함께 모로 쓰러졌다.
툭, 데구르르르.
직후, 몸을 잃은 오우거의 머리통이 내 발치까지 굴러왔다.
“이것도 가져가야지.”
마나를 이용해 예의 머리통을 허공에 떠올린 내가 미소 지었다.
이게 다 돈이다.
부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오우거가 있었단 식으로, 의뢰 완수금을 더 뜯어낼 생각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쯤에서 돌아가는 편이 낫겠지?”
전방의 시꺼먼 아가리는, 그 깊이조차 가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란 확신 따위는 없었다.
검은 마물의 숲은 여섯 개의 나라를 끼고 있을 정도로 광활한 넓이를 자랑했으니까.
이 안에 얼마나 끔찍한 마물들이 더 득실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숲 바깥에는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일단은 돌아간다.
소득은 충분했다.
내 두 눈으로 직접 숲속의 마물들을 확인했으니까.
아마 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었다면, 십중팔구 이곳에 이르기 전에 죽었을 것이다.
달리 얘기하면,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겠어. 내 부모들은 최소한 평범한 인간들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숲 어딘가에 안전지대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마물들이 소문보다 약한 것은 아닐까.
분명 그리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가 직접 보지 않았으니까.
허나, 역시 그런 곳 따윈 없었다.
최소한 오크 일개 부락과 오우거 정도는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존재나 세력.
그런 사람들이 내 부모일 것이다.
***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거야?”
유리나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돌아와도 한참 전에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건만.
“돌아올 거다.”
“혼자 잘난 체하다가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애야. 걔 성격이면.”
“…….”
“안 되겠다. 나라도 들어 가봐야겠어.”
순간, 루나가 조용히 앞을 막아섰다.
“뭐 하는 거야?”
“가지 마라.”
“…야.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자각이 조금 떨어지는 모양인데. 미우나 고우나 걘 우리 동료야. 누가 위험에 처한 동료를 그냥 두고만 보는데?”
“동료니까 이러는 거다.”
루나가 단호하게 답했다.
“동료니까 믿는다. 동료니까 인내하고 기다려 준다. 동료니까 등을 맡긴다. 그게 잘못된 일인가?”
“…엥?”
유리나의 잇새로 기괴한 괴성이 흘러나왔다.
이게 다 뭔 소리야.
그러니까, 이만큼이나 그 녀석을 신뢰한다고?
“나도 이제 그 성격을 조금은 안다. 남 좋은 일만 다 해놓고, 아직 의뢰금은 받지도 못했으니, 반드시 돌아올 거다.”
“…이유가 돈이야?”
“물론, 주된 이유는 동료인 우리겠지.”
“참나, 기가 막혀서.”
“……?”
“아주 대단한 동료 납셨네. 아니, 동료가 뭐야. 누가 보면 사랑하는 님을 기다리는 지고지순한 여인인 줄 알겠어?”
“…그런 거 아니다.”
“아주, 자기만 백 점짜리 동료지.”
털썩!
유리나가 곧장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혹시나 잘못되기만 해봐. 걔 무덤 앞에서, 네 책임이라고 다 일러줄 테니까.”
“잘못되지 않을 거다. 내가 아는 세타 쿤 이그니스라면.”
“헹. 그러셔?”
휘오오오오!
때마침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직후, 두 여인이 픽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왜인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함께 사선을 넘어야 생길 법한 유대감?
그런 게 느껴졌으니까.
사뿐.
“여기들 있었니?”
다만, 훈훈했던 분위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쫓아온다고 고생깨나 했지 뭐야.”
“웬 년이냐!?”
최초 세타가 나타났을 때처럼.
‘놈’에서 ‘년’으로.
한 글자만 바꿔 외친 골든 버드 상단의 호위가 앞으로 나섰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막 새로이 나타난 인영은, 상단 무리가 있는 방향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사뿐, 사뿐.
“어떻게 저 마녀가 여기에…?”
“아는 아줌마야?”
유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루나는 저 여인을 아는 듯싶었으니까.
더 놀라운 것은,
“나 혼자라면 몰래 국경을 넘는 것 정돈 아무런 문제도 아니지.”
“……!”
족히 일백여 미터는 넘는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마치 바로 곁에서 얘기하는 듯이 여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사실이었다.
“혼자서… 왔다고?”
“왜, 갑자기 없던 자신감이 샘솟는 것 같니?”
촤아아앙!
재차 대화가 이어질 때, 예의 상단의 호위가 발작처럼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방해야.”
“뭣…!”
푸-확!
“……!”
이제는 기껏해야 50여 미터 밖의 거리였다.
그럼에도 루나는 보지 못했다.
새로이 나타난 여인의 살수(殺手)는커녕.
털썩!
한 박자 늦게 세로로 갈라져 가는 호위의 시신도.
문자 그대로, 눈 한 번 감았다 뜨자 방금까지 살아 있던 사내가 내장을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자, 그럼… 진짜 장례를 시작해 볼까?”
그 시신의 한가운데, 여인.
칠악(七惡)이 있었다.
***
“…피 냄새?”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와중이었다.
내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혈향이, 숲 초입부에서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번쩍!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단거리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마나를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마법이었지만.
지금은 일분일초가 급했다.
화아악!
“……!”
이윽고 쏟아지는 밝은 빛무리에,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숲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내가 최초로 본 광경은…
“…이게 대체…….”
평야를 가득 메운 시신의 바다였다.
수백에 이르던 상단 무리가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상처는 없었다.
허나, 나는 알 수 있다.
저들은 모두 죽었다.
다만,
“마, 마녀…!”
아직 살아 있는 이들도 있었다.
가면이 반쯤 깨진 채 쓰러진 여인.
그 앞을, 두 호위가 필사적으로 막아서고 있었다.
특히 그 주변의 시체들이 참혹했다.
하얗게 쏟아진 뇌수.
바닥에 흩뿌려진 내장.
툭, 굴러 나온 눈알들까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유리나와 루나가 저 무리에 없다는 사실이었…
“…….”
순간적으로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예의 무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부러진 검에 의지한 채 흑발의 여인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그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이었다.
쩍 갈라진 복부의 자상(刺傷) 사이로, 언뜻언뜻 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내비쳤다.
루나다.
저 상태라면, 그녀는 얼마 못 가 죽고 말 것이다.
“어머. 이제야 왔니?”
그제야 무리 앞에 여유로이 서 있던 상대가 몸을 돌렸다.
“…서큐버.”
“나, 쫓아온다고 진짜로 고생했다? 칭찬 좀 해줄래?”
“네가 이렇게 만든 거냐?”
“맞아. 나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덕분에 대공한테 엄청 혼나기도 했고.”
그때였다.
“도망쳐, 세타! 이 마녀는 괴물이야!”
루나의 뒤에 숨겨져 있던 유리나가 고함쳤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루나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였다.
직후 내 시선이 서큐버에게 향하자,
“아아, 마탑에서 제법 많은 힘을 취할 수 있었거든.”
“…….”
“완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목표치의 80퍼센트는 달성했다고 할까?”
“…….”
“그러니까, 이번에는 절대로 도망 못 칠 거야.”
내 입가로 비틀린 미소가 맺혀졌다.
“도망칠 생각도 없었어.”
“아, 그랬니?”
“그리고, 80퍼센트가 뭐라고. 나는 이미 완전체인 럼프도 소멸시킨 경험이 있는데.”
“……!”
찰나 눈을 크게 뜬 서큐버가 뿌득 이를 갈았다.
“역시 네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잖아. 너한테도 들리는 거겠지? 이 소리가. 그러니 나를 쫓아올 수 있었던 거겠지.”
“……!”
“나도 너랑 똑같아. 지금 내 안에 있는 식탐이, 당장 네 죄악을 먹어 치우고 싶다고 아우성치고 있거든.”
“네놈이!”
“색욕의 서큐버. 네 가장 큰 실수가 뭔 줄 알아?”
순간적으로 몇 가지 마법들을 캐스팅한 내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한 번 당하고도, 또 혼자서 이곳에 왔다는 거야. 나한테.”
쾅!
말을 마친 내가, 마나를 실어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