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자이툰 왕국(2)
화르륵!
돌킨의 검 위로 푸른 화염이 피어올랐다.
엑스퍼트 상급 이상의 전유물, 오러 파이어(Auror fire)였다.
놀라운 것은,
화르르륵!
직후, 예의 프란체스라는 기사의 검에서도 샛노란 화염이 덧씌워졌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둘 다 엑스퍼트 상급…?”
“왜. 이제 스스로가 뭔 개소리를 지껄였는지 좀 알 것 같냐?”
돌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일개 공작의 개인 호위로 엑스퍼트 상급이 둘.
분명 과했다.
다시 말하지만, 저 경지는 왕국마다 열 정도가 평균이었으니까.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지크 공작님의 개인 호위는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급과 맞먹는다더니, 역시…!”
“저 정도 전력이면 왕실 기사단보다도 더 강한 것 아니야? 최고다!”
“애당초 마법사 따위가 기사랑 맞먹으려고 드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긴 했지!”
흥이 상당히 오른 모양이다.
지켜보던 데니스 자작가의 기사들까지 가세하여 휘파람을 불어대는 것을 보니, 슬슬 배알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물론 찬물 끼얹기는 내 전문 분야였다.
“개소리는 무슨.”
“뭐?”
“살짝 놀랍기는 한데, 그뿐이라고요. 어차피 이기는 건 우리일 테니까.”
“이거 진짜 웃기는 새끼네.”
“왜요, 아예 저도 검을 써드릴까요?”
쯔어엉!
직후, 나는 보란 듯 마력 검 하나를 만들어냈다.
애당초 도발 목적이 강한 행위였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미친놈.”
돌킨이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곁의 프란체스라는 기사조차 이번만큼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못내 신경 쓰였는지 루나가 재빨리 다가섰다.
“싸우기 전부터 상대를 너무 자극하는 건 좋지 않다.”
“그보다 루나. 일전에 보조 마법을 걸어줬을 때의 느낌, 객관적으로 어땠어?”
“…그때 말인가? 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루나가 이내 대답한다.
“그런 보조 마법들은 처음이었다. 내 경지가 엑스퍼트 중상급에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는 정도인데… 그때의 신체 능력은 엑스퍼트 상급에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 정도였다고?”
“물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더불어 장기전으로 갈수록 내가 훨씬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신체 능력은 비슷해도 마나의 격까지 차이를 줄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만 해도 어디야.
당대의 기사들에게, 경지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가령 그런 것이다.
똑같은 힘에, 똑같은 속도에, 체력까지 똑같은 두 사람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서로가 검을 부딪히면, 결국은 경지.
다시 말해, 검기의 수준이 낮은 사람이 밀릴 수밖에 없다.
괜히 검사니 검운이니 하는 복잡한 용어로 단계를 나눠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한데, 루나는 어느 정도까지 상대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제야 반짝이는 저 두 눈빛도 이해가 간다.
“너는 저 둘 중 하나랑 일대일로 붙어보고 싶은 거지?”
“…이런 상황에서 부끄럽지만… 그 말대로다.”
“그럼 그렇게 해.”
“응…?”
직후, 나는 이전처럼 각종 보조 마법을 루나에게 걸어줬다.
물론 내 스스로에게도.
“준비는 다 끝났냐?”
그걸 빤히 지켜보던 돌킨이 그제야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빡빡이 아저씬 나랑 붙죠.”
“엉?”
“척 봐도 다혈질이신 것 같은데, 비슷한 사람끼리 붙자고요.”
“하! 그러니까, 나랑 일대일로 승부하자?”
“이 대 일도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이름 높은 기사들의 자존심까지 짓밟을 수는 없죠. 아, 물론 제가 일입니다.”
“크크크크크…….”
돌킨이 비죽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냐. 이걸로 정했다. 네놈 허리를 새우처럼 꺾어 놓기로. 나중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마. 아예 사내로서의 구실조차 하지 못하도록. 평생 그 재미도 모르고 한번 살아봐라.”
“아저씬 생긴 거 보니까, 허리가 멀쩡해도 여태 못하셨을 것 같은데…….”
“……!”
찰나 돌킨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지, 저 반응은?
자연스럽게 맞받아친 것뿐이었는데.
“…풉.”
한데, 뒤에서 지켜보던 다른 호위 기사들이 대놓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 그런 거였어?
“얌마, 프란체스! 너 지금 웃었냐?”
“크, 크흠. 난 안 웃었다.”
“이 개자식이…!”
이윽고 그 분노가 내게로 향한다.
그리곤 성난 멧돼지가 된 돌킨이 내게로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스팟!
“죽인다!”
“음…….”
찰나, 내가 가볍게 침음을 삼켰다.
예상은 했지만 빨라도 너무 빨랐다.
더 이상 잡담은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하여, 나는 잽싸게 마력 검에 몇 가지 마법을 캐스팅했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정!
“……!”
그와 동시에, 거짓말처럼 돌킨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검이…?”
하늘 위에 오롯이 떠 있는 새파란 마력의 검.
그것이 빠르게 증식을 거듭했다.
최초 하나였던 검은 이내 수십, 수백 개로 불어났다.
그리곤 그 검 끝을 모조리 돌킨에게 겨누었다.
“환영 마법…?”
과연 그럴까?
와락 인상을 찌푸린 돌킨이 재차 땅을 박찼다.
입으로는 연신 그럴 리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그에 맞춰 허공에 떠오른 하나의 검을 곧장 쏘아 보냈다.
쩡!
직후, 오러 파이어에 휩싸인 돌킨의 검과 내 검이 충돌했다.
잠시 힘겨루기를 하던 내 마력 검은 이내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물론, 이 시점에 돌킨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시, 실체라고? 아니, 소수겠지. 아마 대부분은 허상일 터…….”
돌킨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재차 열 개나 되는 검을 더 쏘아 보냈으니까.
쩌정! 쩌저정! 쩌저저정! 핏!
잘 쳐내다가, 마지막 한 개가 돌킨의 볼을 스쳤다.
주르륵, 진득한 핏물이 흘러내린다.
“전부… 실체라고…?”
돌킨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해갔다.
직접 부딪혀 본 그는 아는 것이다.
오러 파이어에 잠깐이나마 맞서려면, 적어도 5써클 이상의 마나 밀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한데, 방금 상대한 건 5써클짜리 마력 검이 무려 열 개였으니.
이건 더 이상 써클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나와 밀도가 격이 다른 괴물 수준이라 생각하고 있겠지.
그건 다른 이들도 같은 생각인지.
채챙! 콰직! 채채채챙!
이미 전투를 시작한 루나와 프란체스만이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을 뿐.
주변의 다른 모든 이들이 이쪽을 훔쳐보기 바빴다.
“너 이 새끼. 아까는 전투 마법사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싸우는 방식은 야비한 여느 마법사들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
“어떻게 싸우는지는 제 마음이죠. 따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요, 뭘.”
“…빌어먹을 자식이.”
이제 돌킨은 내게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다.
하늘에 떠 있는 마력 검은 최소 이백을 훌쩍 넘어섰으니까.
이게 일시에 검의 비가 되어 자신에게 쏟아져 내린다고 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할 테지.
“그렇게 서서 구경이나 하세요. 아, 혹여나 끼어들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저쪽한테는 따로 약속한 게 있어서.”
이왕 루나에게 서비스하는 것, 확실하게 해주기로 했다.
그래야 나중에 밥이라도 사달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루나가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일 것이라고는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쾅!
다시 약 5분여가 지났을 때.
루나의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윽…!”
초반만 해도 박빙의 승부를 겨루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역시나 루나가 밀리는 형상이었다.
검을 쥔 손은 하염없이 경련을 일으켰고.
전신으로는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족히 곱절은 차이 나는 나이에서 오는 경험.
거기에, 경지까지 밀렸으니 이만큼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그 증거로, 프란체스라는 기사의 얼굴에도 숨기지 못하는 감탄사가 떠올라 있었으니까.
그 순간,
쩡! 휘리리릭!
루나의 검이 크게 튕겨 나갔다.
내려 베기를 하던 와중이었기에 일순간 몸까지 크게 열리고 말았다.
프란체스의 눈이 뱀처럼 빛났다.
물론 나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쩌저정!
“……!”
마력 검 3개가 동시다발적으로 프란체스를 향해 쏘아져 갔다.
“음…….”
침음을 흘리면서도 프란체스는 그 하나하나를 침착하게 막아냈다.
그리곤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게 무슨…?”
점차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제야 발견한 것이겠지.
하늘을 수놓은, 어마어마한 검의 향연을.
목표는 이뤘고, 새로운 지식의 효과는 잘 확인했으니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안 덤빌 거죠?”
“…….”
“뭣 하면 두 분이서 같이 덤비셔도 되는데. 그건 대단하신 기사님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시겠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그러다 진짜 뒤지는 수가 있다.”
“즌쯔 뒤즈는수그있드~”
빠직.
돌킨의 이마 위로 짙은 혈관이 도드라졌다.
대머리라서 그런지 그 십자 마크가 유독 시야를 가득 메웠다.
“…프란체스!”
“부탁인데, 혼자 어린애 도발에 넘어가선 날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럼, 저따위 개짓거리를 보고도 그냥 참고만 있으라는 거야!? 난 그렇게는 못하겠다!”
말을 마친 돌킨이 더더욱 검에 마나를 욱여넣었다.
화르르르르륵!
최초 검만 하던 오러 파이어는 빠르게 크기를 불려갔다.
“오…….”
그게 순식간에 높이 2미터가량까지 치솟았을 무렵.
“그만!”
때맞춰 누군가가 크게 고함쳤다.
“가, 각하…?”
“그만하면 됐네. 실력은 이미 충분히 확인했지 않나?”
“하, 하지만…….”
“돌킨. 이 이상 내 얼굴에 먹칠을 할 생각인가?”
“죄, 죄송합니다. 각하!”
돌킨이 빠르게 오러 파이어를 꺼뜨렸다.
프란체스도 한차례 고개를 숙이곤 뒤로 물러났다.
“세타 군이라고 했나?”
“예? 아, 예.”
“자네들을 인정하겠네. 확실하게 손님으로 대접하겠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눠보겠나?”
“…….”
찰나 말을 건넨 지크 공작을 빤히 바라보던 나는,
“현명하신 공작님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펑!
곧장 하늘 위의 검들을 디스펠시켰다.
한데, 그 대부분이 마치 안개처럼 제자리에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너, 너… 역시 환영 마법이 맞았던 거구나!”
씨익.
내 입가로 승리의 미소가 번져 갔다.
당연히 마력 검의 대부분은 뻥카였다.
무려 5써클짜리 마력 검이다.
그런 게 이백 개라니.
나라고 마나가 무한하겠는가?
다만, 상대를 그리 믿도록 만드는 게 중요한 거겠지.
“들켰네?”
“…컥!”
내 마지막 한마디에, 이내 돌킨이 제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
“흠…….”
지크 공작이 힐끗, 뒤를 돌아봤다.
거리는 제법 있었지만 의외의 손님들은 집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착실하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네가 보기엔 어떠냐?”
“저 아이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잠시 견식했을 뿐이지만… 적이 아니라면, 반드시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할 인재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역시 그렇지?”
조카의 대답에 지크 공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데, 정말로 제국군이 국경을 넘었을까요?”
“…정황상 가능성은 크겠지.”
“하면, 이리 한가하게 계셔도 되는 겁니까?”
“이런 극약 처방도 때로는 필요한 법이니까.”
“예? 극약 처방요?”
데니스 자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래에 왕도가 어땠느냐. 서로 물고 뜯느라 외부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지 않느냐? 기껏해야 나를 포함한 몇몇 깨어 있는 귀족들만이 공국으로 가랴, 폐하를 설득하랴… 이제 저들도 정신을 차려야지.”
“하지만 그게 모두 제국의 계략이라면요? 이제는 내부도 믿기 힘듭니다. 누가 황제에게 포섭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극약 처방이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 이걸로 적아를 보다 확실하게 가려낼 수 있을 테니까.”
“미욱한 저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은 제국군이 국경을 넘어 서두르고 있지만, 곧장 수도까지 치고 들어올 생각은 아닐 거야. 그런 거라면 구태여 포로를 사로잡을 이유도 없었겠지.”
“그 말씀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니?”
잠시 주변을 둘러본 지크 공작이 계속 말을 잇는다.
“명분이야. 한데, 지금 제국군에게 명분이라는 것이 있느냐? 갑자기 국경을 넘어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저 야만인들에게.”
“아…….”
“그러니까, 최우선적으로 그 명분을 만들려고 할 게다. 억지를 쓰든, 뒷 수작을 부리든. 그리고 그 수단은 역시 포로들에게서 얻으려고 할 테지.”
“설마…!”
“우리가 움직이는 건, 그 이후라도 늦지 않다는 거다. 하니,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거지.”
그러면서 지크 공작이 다시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전쟁에서 중요한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믿음직한 아군의 존재는 무엇보다 필수적이지.”
“그렇겠지요.”
“한 명의 고위 마법사가, 일만의 군세를 대신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타라는 저 아이는 보물이야.”
“동의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아까 우리끼리 하던 얘기를 계속하자면… 엘리나도 이제 시집을 보내야 할 나이 아니냐?”
“…예?”
“저 아이는 어떠냐? 듣기로 가문이 없다고 들었는데. 이참에 능력 있는 고위 마법사를 데릴사위로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예에에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