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97화 (97/251)

97화. 칠악의 서큐버

루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무얼 들은 거지?

누나?

아니, 루나를 누나로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집중해!”

“……!”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대로, 지금은 집중할 때다.

마나를 운용한다.

복부의 홀을 한순간 강하게 휘돌려 단번에 기운을 뽑아낸다.

“윽…….”

마치 혈관이 타는 듯한 느낌에, 루나가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검기의 절삭력을 극대화하는 힘.

오러 파이어(Auror fire)다.

최소 엑스퍼트 상급에는 이르러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고급 신위.

조금 무리를 한다.

가문의 비기는, 오러 파이어와 함께 할 때 최상의 위력을 발휘했으니까.

우우웅!

때마침 보랏빛 대지가 눈에 띄게 옅어졌다.

힐끗, 그녀의 시선이 뒤를 향했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역시 등을 맡기기를 잘한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루나는 집중을 거듭했다.

신검(身劍)의 합일.

검이 나이되, 내가 검이 된다.

검이 적을 베는 것이 아닌, 내가 적을 벤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분산되면 목표는 이룰 수 없다.

적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꾸드득.

순간 루나의 다리 근육이 급격하게 수축했고.

파아아앙!

이윽고 전방으로 쏘아졌다.

허공을 가르는 루나는, 한 자루의 검이 되었다.

빛살과도 같은 궤적을 남기는 은빛 실선은 그만큼이나 올곧고도 빨랐다.

“이런…!”

서큐버가 부랴부랴 블랙 쉴드를 이중, 삼중으로 캐스팅했다.

허나,

쨍!

이번에는 ‘쩡’이 아니라 ‘쨍’ 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유리창에 금이 가는 듯한 경쾌한 소음.

해낸 걸까?

“다음은 나한테 맡겨!”

휘리릭!

튕겨져 나오는 반발력으로 유려하게 허공을 휘돌면서.

쑤욱.

루나는 잽싸게 자세를 낮췄다.

콰우우우우우우우!

직후, 어마어마한 광풍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꽝! 쩌저저적! 쨍그랑!

이미 전체로 실금이 가 있던 쉴드 마법 위로 예의 광풍이 뒤덮쳤다.

“에, 에어 캐논(Air cannon)?”

“뭔… 영창도 없이 5써클 에어 캐논이라고? 그럼 저 애송이가 최소 6써클 마스터라는 거야?”

“그것도 중화 마법을 펼치던 와중이었다고. 가만, 저거 혹시 개막전 때 그 녀석 아니야?”

“맞네! 워낙 평범한 얼굴이라서 금세 까먹었다. 분명히 저런 얼굴이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켜만 보던 관중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귀청을 때렸다.

역시, 동료 하나는 제대로 사겼구나.

저도 모르게 루나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번져 갔다.

“이익… 뭐 저런 경우도 없는 꼬맹이가!”

광풍은 아슬아슬한 서큐버의 옷가지도 날려 보낼 정도였다.

속옷이나 다름없던 상의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이제는, 딸랑 팬티 비스무리한 하의만 걸치고 남은 그녀였다.

잽싸게 양팔로 상체를 가렸지만, 그럼에도 풍만한 가슴은 가려지지 않았다.

“한 방 더!”

콰우우우우우우!

직후, 또 한 번 에어 캐논이 허공을 할퀴었다.

어쩔 수 없이, 질끈 입술을 깨문 서큐버가 자리를 피했다.

하늘 높이 떠오른 그녀는,

“……!”

무슨 이유에서인지 ‘흡’ 하고 눈을 치켜떴다.

“저 녀석…!”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것이다.

연달아 훼방을 놓고 있는, 그 빌어먹을 방해꾼을.

“지금!”

허나, 정작 당사자는 이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 막, 발딱 몸을 일으킨 은빛 대갈통을 이끌고 출입구를 빠져나가기 바빴으니까.

“…저 애송이였어. 럼프를 죽인 놈이.”

서큐버의 고운 얼굴이 마귀처럼 일그러졌다.

***

예상외로 탑 바깥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있기야 했는데…

지글지글.

그 모두가 하나같이 바닥에 뒤집혀 있었다.

마치 잘 익은 고기처럼 전신으로 매캐한 연기를 피어올린 채.

“…유리나?”

“어, 너네!”

직후, 유리나가 후다닥 달려왔다.

이 녀석의 솜씨였군.

새삼 십수 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을 홀로 감당한 사실도 놀라웠지만.

“…죽인 건 아니지?”

“죽지는 않았겠지. 그러게 왜 앞길을 막아선.”

말을 마친 유리나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숯덩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끄으으으…….”

그러자 숯덩이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들었지? 살아는 있네.”

“잘하셨네, 아주.”

“근데, 안쪽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되게 시끄럽던데.”

“일뿐이겠냐.”

“……?”

유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전투는 아직도 한창이다.

한데,

두두두두두두두두!

그 와중에 지축을 울리는 땅울림까지 느껴졌다.

“설마 벌써…?”

누가 들어도 분명한 말발굽 소리였다.

그것도 최소 수천은 되는.

아니, 어쩌면 수만일지도 모르겠다.

정체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제국군이다.

“이대로 포위되면 끝이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같은 생각인지 루나도 자못 걱정스러운 투로 물어왔다.

하여, 나는 곧바로 품 안에서 한 가지 물건을 끄집어냈다.

“웬 돌멩이래?”

고개를 길게 뺀 유리나가 곧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워프석이야.”

“워, 워프석!?”

“마탑주가 준 것이니까, 효과는 확실할 거야. 이걸로 포위를 벗어나자.”

“그 귀한 걸 대체 마탑주 누가…?”

“일일이 설명할 시간 없어.”

한마디로 유리나를 조용히 시킨 직후, 곧장 마나를 불어 넣으려 했다.

한데, 이번에는 루나가 딴지를 건다.

“우리만 도망치자는 건가?”

“…….”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이 훤히 보였다.

“…어차피 제국은 관중들을 죽이지는 못할 거야.”

“왜지?”

“전쟁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포로로 만드는 게 더 값어치가 높으니까. 그뿐이야? 전쟁 이후도 생각해야겠지. 추후에 전 대륙의 공분을 사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저들을 인질로 삼아, 협상 카드로 이용할 생각이라는 건가?”

“응. 애당초 죽이는 것보다, 사로잡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인데. 이미 잡은 물고기라면야 말할 것도 없지.”

“그럼 더더욱 이대로 물러설 수는…….”

계속 듣고 있기 힘들었기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첫째, 돌아가도 우리 셋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둘째, 도시로 가면 다른 왕국들에 원군을 요청할 수 있어. 제국군은 이미 국경을 넘었지만, 보고 체계를 거쳐 해당 지휘관의 귀에 들어가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다시 소식이 다른 나라에 전해지기까지 최소 1주일은 걸릴 테니까. 지금 우리가 움직이면, 그 황금 같은 1주일을 벌어줄 수 있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이미 국가 간 전쟁으로까지 번졌는데,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나머진 나라에서 알아서들 하겠지. 반 제국 연합 전선을 구축하든, 다른 방법을 강구하든.”

“…….”

“너무 걱정하지는 마. 지들도 생각이 있겠지. 하물며, 지금 우리는 집안싸움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잖아.”

루나가 멍청하니 이쪽을 바라봤다.

유리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왜들 저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거래?

“…이해했다.”

“다행이네.”

“나는 머리까지 똑똑한 동료를 뒀군.”

“응?”

나 방금 칭찬 들은 건가?

“…난 못가.”

아주 번걸아 가면서 피를 말린다.

“아, 또 왜.”

“저 안에 내 원수가 있으니까.”

짜악!

직후, 나는 있는 힘껏 유리나의 등짝을 후려 갈겼다.

“앗…!”

“앗은 지랄. 정신 좀 차려, 이 화상아.”

“지, 지랄?”

“수십 년 전에 명을 달리하신 할아버지 복수를 하겠답시고, 사지로 몸을 던지겠다는 미친 소리는 하지 말라는 뜻이야.”

“…….”

화가 나서 조금 강하게 말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말귀를 알아듣기를 바라면서.

효과가 있었는지, 유리나가 이내 꾸욱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뿌우우우우우우!

진군을 알리는 나팔 소리다.

이제 다 왔다는 뜻이리라.

하여, 재빨리 준비를 마쳤다.

“더 할 말 없으면 바로 사용한다.”

손안의 물건이 오묘한 광채를 발했다.

생긴 게 꼭, 푸른 사파이어를 보는 듯했다.

워프석에 대해서는 나도 조금은 들어봤다.

당대의 마탑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다는 회심의 역작.

심지어, 일회성 소모품도 아니었다.

마나만 충전시키면 언제든 다시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워프에 ‘게이트’라는 매개체가 필요한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무지막지한 마나의 소비에 있었다.

워프석은 그 게이트의 초소형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최상급 마나석을 공정하여 만든 아티팩트.

이걸 이용하면, 게이트의 역할을 대신하는 소형 마법진이 생성된다.

가동거리는 고작해야 약 30킬로미터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인류를 진보시킬 발전이었다.

우우웅!

워프석이 진동한다.

그와 동시에, 내 발아래로 빠르게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한데,

“어…?”

곧 내 잇새로 당혹스러움이 터져 나왔다.

그 마법진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았으니까.

기껏해야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설 수 있을 정도?

“이 크기라면…….”

“…한 명은 업히고, 다른 한 명은 품에 안겨야겠는데?”

“…….”

내 묘안에, 주변은 순식간에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그러니까 너한테 안기라고?”

묘하게 얼굴을 붉힌 유리나가 그리 물어왔다.

“뭔 헛소리야? 마법사인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어…?”

“여기 힘 좋은 기사님이 계시잖냐.”

“…….”

나는 능청스레 루나를 가리켰다.

두 여인의 얼굴 위로 각기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유리나는 황당.

루나는 당황.

아니, 당연한 얘기 아닌가?

이런 일에 남녀가 어디 있다고.

직후, 나는 다소곳이 루나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 곤혹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능청스레 중얼거린다.

“크흠. 겪어보니 이쪽이 편하더라고.”

***

워프석은 성공적으로 작동되었다.

푸르게 빛나던 그것은, 어느새 광채를 잃고 칙칙한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자체 마나를 모두 소모했다는 뜻이겠지.

각설하고,

“일단 들어오기는 했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마탑의 영역 바로 인근에 자리한 ‘아가세움’이라는 도시였다.

물론, 최초에는 지금처럼 도시 내부가 아닌 바깥이었다.

허가되지 않은 워프의 사용은, 소위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으니까.

참고로, 아가세움은 서부 자이툰 왕국의 영토였다.

우리는 루나가 가진 용병패를 이용해, 도시 안까지 손쉽게 들어설 수 있었다.

다만,

“지금부터 어쩌려고?”

진짜 문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일단… 영주를 만나봐야지.”

“엥?”

“…뭐?”

내 말에, 유리나와 루나가 차례로 반응했다.

“뭐가. 아까 다 설명했잖아. 우리 셋이서 대륙에 이 엄청난 사실을 다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알릴 수 있다 하더라도, 누가 믿어줄 건데?”

“그야 그렇지만…….”

쥐뿔도 없는 자유 연합 소속의 마법사가 하나.

무너져 가는 왕국의 귀족가 여식이 둘.

설령 알릴 수 있다 하더라도,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근데 이곳의 영주는 누군데?”

“나야 모르지.”

“장난 똥 때리냐?”

“모르니까 일단 만나서 설득하려는 거잖아.”

보다 못한 루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가세움의 영주라면, 아마도 서부의 대부호 데니스 자작일 거다.”

“데니스 자작?”

처음 듣는 이름이다.

“지크 덴 프라이트 공작은 알겠지? 그의 조카다.”

“아, 그 사람?”

이번에는 들어본 이름이었다.

공국의 연회에서도 마주쳤던 기억이 있으니까.

더욱이, 지크 공작이라면 명실상부 자이툰의 2인자인 재상이었다.

이러면 일이 쉽지.

이름 없는 촌구석 귀족의 말보다야, 그를 통해 왕국 재상의 입을 빌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멈춰라!”

“…….”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고궁에 도착해 있었다.

역시나, 성문 앞에선 경비 병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경계했다.

“신분을 밝히십시오. 이곳은 데니스 자작님의 영주 성입니다.”

“…이번에도 내가 하면 되나?”

왜인지, 꽁해 보이는 루나가 말했다.

웃긴 건, 그런 루나를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한 바라보고 있는 유리나였다.

“아니. 내가 할게.”

“…네가?”

뒷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지만.

루나는 표정으로 ‘네가 무슨 수로?’라고 되묻고 있었다.

“정식절차를 밟으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까. 신분을 확인하랴, 영주가 뭐 뉘 집 똥개인 줄 아느냐, 기다려라. 안 봐도 뻔하지.”

“절차를 밟지 않고도 만날 방법이 있다는 건가?”

“응. 직접 나오게 하면 되지.”

“……?”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의 루나를 뒤로하고,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 시험해 볼 것이 있기도 했다.

“어디서 온 핏덩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익숙하다 못해 신물이 나는 흐름은 가볍게 무시하고, 상념을 이어갔다.

‘아이리스의 세 번째 조각.’

죄악의 힘은 확인했지만, 정작 이건 아직이었다.

그럴 경황이 없었으니까.

다만, 머릿속에 새로운 지식이 들어 있었으니.

그중 하나를 지금 시전해 보려 한다.

‘6써클 마스터에는 올라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마법. 이전에는 경지가 부족해 시도조차 하지 못했지만…….’

개중에서도, 이왕이면 불꽃 마법이 좋겠지.

유리나가 직접 보고 판단해 줄 테니까.

“…해를 삼킨 식이여. 그 뜨거움을 간직한 어둠이여. 지금 내 앞에 그 소멸의 화염을 흩트려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라.”

“이게 무슨 영창이야…?”

직후, 유리나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용으로 보아, 분명 화염 계열 마법 같기는 한데.

살아생전 이런 영창은 책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했겠지.

“이클립스(Eclipse).”

“……!”

유리나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이클립스.

불꽃 계열 최대 광범위 마법 중 하나인, 잊혀진 고대의 마법.

화르르르르르륵!

순간, 내 머리 위로 어마어마한 불꽃 덩이가 생성되었다.

그것은 점차 더 거대하게.

무척이나 빠르게, 크기를 불려갔다.

언젠가, 프레이를 상대로 선보였던 마나운과 비슷한 형태였지만.

이번에는, 실제 화염을 품고 있는 초고온의 태양이었다.

치이익!

그 증거로, 주변의 대기가 타는 듯한 소음을 내흘렸다.

“마, 맙소사…….”

얼마나 놀랐던지, 문지기 병사 둘이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짐짓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집 다 태워 먹기 싫으면 이 집 주인 나오라고 해요.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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